• 기륭은 KTX를, KTX는 이랜드를 부러워하고
        2007년 09월 05일 11:4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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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24일, 기륭전자 현장 점거파업 2주년 집회이자 비정규 4사(기륭전자, KTX, 이랜드 뉴코아, 새마을승무원) 연대투쟁 선포식이 기륭전자 정문 앞에서 열렸다. 기륭전자 투쟁이 시작된 뒤로 가장 많은 노동자들이 모였기에 기륭 노동자들은 그 흐뭇함으로 기나긴 싸움의 피로감을 덜어내는 듯했다.

    점거파업 2주년을 앞두고 기륭 친구들은 무엇을 해야할지 고민했다. 투쟁의 수단은 소진되고 투쟁의 기대 수위는 높아만 가는 처지에서 운동의 주체들은 괴롭다. 1년 전, 30일 단식 투쟁이라는 높은 수위로 투쟁을 벌인 바 있고, 감옥 문보다 더 견고하게 가로막힌 철문도 몇 차례 뚫어버린지라 현장 점거 파업 아니면 높은 곳을 점거하는 것만이 생각해봄직한 전술인데 어느 것이나 여성노동자 열댓 명이 벌이기에는 물리적 한계가 너무 컸다.  

    장기투쟁, 신경은 날카로워지고

    주체들의 피로감도 쌓일 대로 쌓였다. 신경들이 날카로워져서 동료에게 상처를 주기 일쑤다. 초기에는 허허 웃으면 그만이던 감정의 벽이 지금은 거대한 장벽으로 불끈 불끈 선다. 투쟁을 통해 바뀌고 깊어지는 것도 있지만 투쟁이 한도를 넘으면 오히려 가슴과 감정이 황폐해짐을 종종 목격하지 않는가.

    오랜 싸움은 주체의 위기를 초래한다. 이를 잠재울 도깨비 방망이는 어디에도 없다. 오직 ‘연대’로 자기를 넓히고 학습과 토론을 통해 자신의 심지를 깊게 다지는 길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투쟁 주체들은 당면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시작하여 바로 그 수준에 멈춘다. 조금 나은 경우가 연대 품앗이를 통해 우물을 벗어나 냇가로 나오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것도 결국 깊이를 채우는 학습 없이는 한계가 곧 드러난다.

    우리의 투쟁이 실리에 갇힌 좁은 투쟁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투쟁이 되려면, 피라미 아닌 고래만한 투쟁을 벌이려면 그 장소도 바다로 바뀌어야 한다. 학습의 깊이만 있고 넓이는 없는 책상물림의 창백한 운동론도 문제이지만, 사상과 노선에 대한 학습과 탐구의 노력이 없어서 그저 초기 투쟁의 열기만으로 지탱하는, 넓지만 얕은 연대도 문제다.

    피라미가 아닌 고래만한 투쟁을 벌이려면

    바다같이 깊어도 우물에 불과하거나 바다같이 넓어도 그 깊이가 냇물 같다면 그런 데서 고래는 살 수 없다. 세상을 바꾸는 공부가 없는 싸움터에서 해방의 고래는 살 수가 없다. 하지만 이런 말이 그저 공자님 같은 말씀으로 들리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당연한 일을 행하기가 어찌 이렇게 어려운가.

    기륭 노동자들은 고민 끝에 물리적 투쟁의 수위를 높이는 방향이 아니라 연대를 넓히는 쪽으로 2주년 투쟁의 방향을 잡았다. 올해가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20주년이 되는 해이니, 그 도화선이 된 70~80년대 구로공단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을 계승하는 투쟁을 벌인다.

       
      ▲ 지난 8월 24일 기륭전자 앞에서 열린 비정규직 4사 공동투쟁 모습
     

    이랜드 홈에버, KTX 등 투쟁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먼저 공동투쟁 선언을 하고, 그리하여 ‘전체 비정규직 투쟁’ 전선을 치는데 기여한다. 노동자의 60%가 비정규직이고 비정규직의 70%가 여성일뿐더러, 실제로 노동자 투쟁의 선봉에 서 있는 장기투쟁 사업장이 대부분 여성노동자 사업장이라는 데 생각이 닿은 것이다.

    게다가 모처럼 우호적 여론을 받고 있는 이랜드 뉴코아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것이 기륭전자와 KTX 노동자에게도 힘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실제 그런 것은 아닌데도 우리가 투쟁하면서 만나는 심리적 고갯길이 있다. 하나는 잘하는 쪽이 품는, 우리만 ‘독박’을 쓴다는 피해의식이다. “왜 맨 날 우리만 연대 투쟁에 동원되는 거야?”

    또 하나는 다른 투쟁이 커지면 우리 투쟁이 묻힌다는 피해의식이다. 르네상스 호텔은 기륭을 부러워하고 기륭은 KTX를 부러워하고, 이제 KTX는 이랜드 뉴코아를 부러워한다는 우스개소리가 그래서 나온다. 하지만 모든 투쟁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이어진 하나다. 그래서 연대가 아니겠는가. 투쟁의 승리로 종속의 고리를 끊어 내고 우리들의 연대 끈으로 서로를 튼튼하게 이어나가는 이 길에 너와 내가 다를까?  

    관료 절차가 투쟁을 가라앉힌다

    그리하여 기륭전자 노동자들은 여성과 비정규직을 하나로 묶겠다는 투쟁 제안서를 들고 노조 상급단위를 찾았다. 다들 ‘좋은 계획’이라고 칭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최근에 종종 심상찮은 이야기를 듣는다. 모든 투쟁 단위들은 언제나 연대와 지지에 목마른 법이다. 그 요청의 소리가 한둘이 아니라서 한번의 ‘연대 집중 투쟁’을 끌어내는 데에 꽤나 많은 절차와 논의가 필요한 모양이다.

    그리고 투쟁 현장과 노조 집행단위 간에는 의사결정 속도가 다르고 중요성에 대한 판단이 다르다. 그래서 ‘목마른 사람이 샘을 판다’고, 한시가 급한 쪽에서 투쟁을 밀고 나가면 “조직의 절차를 무시하느냐? 조직관에 문제가 있다”는 핀잔을 듣게 된다.

    언제부턴가 공식 절차를 통해 결정되지 않은 투쟁은 ‘민주노총의 투쟁’이 아닌 것으로 취급받게 되었다. 한 푼도, 한 사람의 일손도 지원되지 않는다. 아마 ‘관리되지 않은 투쟁’이 부담스러운가 보다.

    투쟁을 신청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현장 분회의 경우 공적 대표성이 없기 때문에 지회 지부를 통해 본조에 투쟁을 요청해야 한다. 지회에서 1주일, 지부에서 1주일, 본조에서 1주일이 걸린다. 순탄하게 ‘의결’이 이뤄진다 해도 최소 한 달이다. 하루가 급한 현장의 처지에서는 정말로 복장 터지는 한 세월이 흘러가는 것이다.

    요즘은 현장 투쟁이 장기화되는 추세다. 자본가들이 ‘모르쇠’로 버텨서 노동자들을 무릎 꿇리겠다는 속셈의 결과다. “너희가 지쳤을 터이니 ‘돈’으로 타결짓고 끝내자꾸나!” 이런 형세를 어떻게 돌파해야 하는가.

    산별노조 차원에서 사안의 경중과 완급을 타산하고 긴요한 부분에 전략적으로 집중해야 자본이 그리는 구도를 흔들지 않겠는가. 하지만 현실에서는 긴박한 투쟁이 관료적 절차를 거치다가 실종되거나 순치되어 버리는 일이 잦으니 주체들의 속이 숯검댕이가 되어버린다.

    지도와 집행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사업과 투쟁을 ‘계획’하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매사를 ‘계획’한 대로 벌이는 것은 노조의 실력이 커져서 상황을 제 뜻대로 조율할 수 있을 때나 들어맞는다. 뒤통수 퍽 터지고 옆구리 퍽 찔린 다음에 피를 철철 흘리고 신음소리 끙끙대는 투쟁을 하는 현실에서는 투쟁 현장에 노조가 자기 일을 맞춰야지 그 반대가 되는 순간 투쟁의 생기는 끊기고 만다.

       
     
     

    형편을 더 어렵게 하는 것은 돈 문제다. ‘연대 투쟁’이 꼭 노조의 공식 결정을 필요로 하는 까닭은 그래야 투쟁 비용이 나오기 때문이다. ‘돈 없이는’ 연대투쟁을 벌일 수도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랜드 뉴코아 연대 집회에서 ‘민주노총 조합원이 가장 적게 참여한다’고 어느 연사가 대놓고 말하는 것을 듣고 몹시 창피했는데 그 까닭이 ‘참가하라’는 공식 결정이 없었기 때문일까.

    전투성이 거세되는 산별노조

    연맹 산별노조는 기업별의 단점을 극복하려고 만들었으리라. 그런데 오히려 산별노조가 만들어져서 노동운동의 현장성과 전투성이 거세되고 있지 않은가? 꿈과 마음과 발품으로 벌이는 자발적인 연대는 이제 과거의 추억이 돼 가고 있는데 이를 ‘발전’이라 해야 할까. ‘관료적 통제력의 강화’를 바람직한 흐름이라 말할 수 있을까.

    결국 기륭 노동자들의 투쟁 계획은 상급 단위의 ‘결재’를 얻어내지 못했다. 다행히 함께 투쟁하는 단위, 여성문제를 중시하는 단위들이 동병상련으로 나서줘서 성황리에 집회를 열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성공이 언제나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는 관료 절차를 무사히 통과할 때라야, 상급단위 집행부가 ‘정략적’으로 배려해줄 때라야 생존권 투쟁도 엄두낼 수 있다는 것인지, 가슴 밑바닥에서 밀려오는 거대한 설움을 어쩔 수 없었다.

    사족을 덧붙인다. 내게 어용과 민주노조가 무엇이 다른지 물어 오는 노동자가 있었는데 실제 현장에서 그 구별은 사라졌다. 자본과 어용 세력이 노동자 대중 앞에서 자신들의 정체를 완벽하게 감춰버린 것이다.

    그 대신에 실리와 투쟁이라는 구별이 생겼다. 그들은 고용 불안의 두려움 속에 소시민적 가족주의에 젖어드는, 정치적 무기력증에 빠진 조합원들에게 오만하게 한 가지 답을 강요한다. 빠르게 손익을 계산하여 너만이라도 신간 편하게 살라는 유혹이다. 누가 눈 앞의 이익을 더 많이 가져다 주느냐 하는 경주에서 변혁적 노동운동이 제 구실을 할 여지는 애시당초 없다.

    변혁이란 체제와 사람의 상식과 습관까지도 바꿔내자는 것이 아닌가. 선거 때만 되면 모든 정파(계파)들이 ‘줄 세우기’ 다툼을 벌이는데 이 불임과 절망의 잔치(?)가 거듭되다 보니, 누가 어용이고 민주인지 더더욱 알 수 없게 되었다. “우리 정파에 참여하기만 하면 면죄부를 베풀어 주겠다!”

    산별노조 시대에 어용과 민주의 구분법

    첫째 중재 교섭에 나서는 사람(세력)이 어용이다. 노조는 조합원과 현장을 대표하는 단위이지 현장과 자본 사이의 거간꾼이 아니다. 하지만 실체는 어떤가. 교섭의 타결을 위해 자본 대신에 지부나 본조가 현장과 조합원을 설득하는 기가 막힌 역설이 곳곳에서 벌어진다.

    둘째, 자발적이고 헌신적으로 연대투쟁을 벌이지 않는 노조가 어용이다. 마지 못해 의례적으로 들르는 연대는 연대가 아니다.

    셋째, 현장에서 올라오는 급박한 요구를 관료적 절차나 재정 문제를 구실 삼아 외면하는 것도 결과적 어용이다. 그들은 현장의 요구를 “기업별 의식을 벗어나지 못한 자생적 요구” “분파적 요구가 담긴 불순한 요구” “전체를 보고 사업하는 상급단위의 고충을 이해하지 못하는 서툰 초보들의 요구”로 너무나 거리낌없이 단언한다.

    현장에서는 상부의 서슬이 서럽고, 위에서는 현장이 답답해 보이는 소통 부재의 현실! 지금이 그런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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