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잠식하는 불안, 이성 마비시키는 학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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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9월 03일 01:0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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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을 위조하는 사람들이 있다. 학력 올리기에 애쓰는 그들은 고졸 혹은 세칭 비명문대 출신자들이다. 하지만 이들의 능력만큼은 출중하다.

학력을 올리는 사람들

큐레이터 신정아, 연극인 윤석화. 아무도 그들의 전문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떻게든 미술계, 연극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혹은 사회적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학벌이 필요하다.

사회 저명인사나 인기 연예인만이 아니다. 영화 <타짜>에서 도박판 설계자 정 마담(김혜수)도 경찰서 유치장에 갇힐 때 “나, 이대 나온 여자야!”라 내뱉으며 자신의 품위를 지키려고 애쓴다. 큐레이터에게도 연극배우에게도 도박판 마담에게도 학벌은 일종의 ‘자격기준’이다.

언론은 그들에게 ‘거짓말쟁이’라고 돌을 던진다. 중앙일보는 8월 31일자 『학벌주의가 아니라 거짓말이 문제다』라는 사설에서 이들을 ‘학벌주의의 틈새를 노리는 미꾸라지’라 표현하였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에서는 ‘학력검증 대행서비스’를 실시하겠다고 한다. ‘물 좋은 곳’에 미꾸라지 몇 마리가 진흙탕을 튀기지 않도록 수질 관리를 철저히 하겠다는 이야기다.

학력을 낮추는 사람들

학력을 위조하는 사람들이 또 있다. 그런데 그들은 학력을 낮추고자 애쓴다. 애써 쌓아올린 명문대 학벌을 버리고 고졸 학력으로 위장한다. 우리는 그들을 ‘위장 취업’ 혹은 ‘현장 투신’이라는 이름으로 기억한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학벌이 아니라 미싱, 용접과 같은 능력이다.

노회찬은 대학 졸업식을 빼먹고 같은 날 직업학교에서 용접기능사 자격증을 받았던 경험을 지금도 자랑스럽게 기억하고 있다.

그들은 기꺼이 “전태일의 대학생 친구’임을 자처하고 나섰다. 나아가 ‘대학생 친구’에서 ‘대학생’이라는 말을 빼기를 원했다. 그들은 구로공단에서 인천에서 울산에서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파업투쟁을 이끌었다.

언론은 이들을 ‘좌경 불순세력’이라 불렀다. 5공과 6공 시절에 안기부, 검찰, 경찰은 ‘일선기관장회의’를 열어 ‘위장취업자 식별요령’ 매뉴얼을 작성하여 자본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미꾸라지 몇 마리가 공장 물을 흐리지 않도록 수질 관리를 철저히 하겠다는 이야기였다.

이제 학력을 애써 낮출 필요가 없는 사회가 되었나 보다. 용접공 노회찬과 미싱사 심상정은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이 되어 ‘비정규직 철폐’를 선동하고 다닌다. 이랜드 노조 파업 현장에서 노조원들을 보호하다가 경찰에 끌려 나오기도 한다. 대선 예비후보가 되어 ‘대학평준화’, ‘학벌 타파’를 공공연히 외치기도 한다.

‘학벌 없는 사회’를 만드는 사람들

   
  ▲ 학벌없는 사회 홈페이지.(http://www.antihakbul.org/)
 

‘학벌없는사회’라는 단체가 있다. 이름만 들어도 무엇을 하는 단체인지 알 수 있다. 이 단체를 상징하는 인물은 서울대 출신 홍세화 선생과 연세대 출신 김상봉 교수이다.

홍세화 선생은 대학평준화와 무상교육의 나라 프랑스의 사례를 열심히 전파하고 다닌다. 김상봉 교수는 『학벌사회』라는 명저를 출간하고 열심히 학벌 타파에 대해 강연하고 다닌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있다. 사람들은 홍세화 선생에게 “당신은 서울대를 나와 아쉬울 것이 없으니 학벌 타파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묻는다. 그러고는 김상봉 교수에게 “당신은 서울대를 못 나왔으니 학벌 타파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하듯, 학벌주의는 우리의 이성을 마비시킨다.

『국립대 통합네트워크』라는 저서를 통해 대학평준화 방안을 체계적으로 제출한 경상대 정진상 교수는 요즘 자전거를 타고 전국을 일주하고 있다. 그가 타고 있는 자전거에는 ‘입시폐지’, ‘대학평준화’, ‘학벌철폐’라는 깃발이 꽂혀 있다. 그가 자전거 전국 일주를 마치는 9월 20일에는 ‘입시폐지 대학평준화 국민운동본부’ 준비위원회가 출범할 예정이다.

개천에는 본래 용이 없다

유명 연예인이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학벌을 높이기 위해 애를 쓴다. 고등학생들은 하루 평균 14시간을 학습노동에 바치고 있으며, 대학생들은 ‘반수’나 ‘편입’을 통해 명문대 진입을 꿈꾼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가 아니다. 세칭 SKY 대학의 30%는 서울 강남과 특목고 출신이다. 나머지는 ‘개천에서 용쓰고’ 있다.

개천에는 본래 용이 없다. 하늘에 여섯 마리의 용이 날고 이무기가 용이 되는 일 따위는 조선 봉건왕조의 이데올로기 『용비어천가』나 신지식인 1호 심형래 감독의 영화 <디워>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용이 된 이성계는 봉건왕조의 운명을 500년 더 연장시켰고, 이 시대의 용들은 입시와 학벌을 매개로 자신의 부와 권력을 자녀에게 대물림하고 있다.

개천에는 다만 지렁이가 있을 뿐이다. 우리 사회를 이롭게 하는 것은 용이 아니라 지렁이이다. 지렁이가 땅을 비옥하게 하고 온갖 생명을 깃들이게 하듯이, 땀 흘려 일하는 대다수의 노동자 민중들이 이 사회의 기반이자 역사 진보의 원동력이다.

이들에게 더 이상 학벌이라는 굴레를 씌우지 말아야 할 일이다. 개천에서 용쓰다 결국 비정규직과 실업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야만적인 구조를 타파해야 할 일이다. 자녀의 사교육비를 위해 80만원의 임금으로 착취당하다 용도 폐기되는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눈물을 씻어야 할 일이다. 입시폐지, 대학평준화, 학벌타파의 기치를 들고 이 땅의 생명을 다시 북돋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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