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은 농담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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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9월 01일 02:5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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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시를 내 나름대로 분류하고는 한다. 느끼는 시가 있고 그냥 눈으로 보는 시가 있는 반면 읽어야 하는 시도 있다. 읽어야 하는 시를 나는 좋아한다. 느낌을 말하거나 적기에는 감성이 모자라 늘 곤혹스럽고 눈으로 본 시는 그냥 그것으로 족한다.

    반면 읽어야 하는 시는 시를 읽은 것에 대한 나의 여러 모가 가감없이 드러난다. 그 드러남이 내가 시인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비록 그것이 시인이나 타인의 눈에는 ‘농담’ 그 이상을 넘어서지 못하더라도. 오늘의 시적 주제는 바로 그 ‘농담’이다.

    나와 너의 사이에서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거나, 눈이 내린다

    나와 너의 사이는
    멀고도, 가깝다
    그럴 때, 나는 멀미하고,
    너는 풍경이고,
    여자이고,
    나무이고, 사랑이다

    내가 너의 밖으로 몰래 걸어나와서
    너를 바라보고 있을 즈음,

    나는 꿈꾼다

    나와 너의 사이가
    농담할 수 있는 거리가 되는 것을

    나와 너의 사이에서
    또 바람이 불고, 덥거나, 춥다

    이 시를 읽고 대뜸 생각나는 것은 김춘수의 그 유명한 시 <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 운운하는 바로 그 시다. 시에서 나와 너 그리고 그 관계를 말할 때 우리는 거의 본능적으로 ‘사랑’을 상상한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밑줄 치며 외우곤 했던 한용운 시의 ‘님’ 역시 그렇지 않은가. 어쨌든 너와 나가 등장하는 시들은 의도적인 신비감이 배어나고, 늘 따뜻하고, 조금은 애절한 법이다. 윤희상의 시 역시 그런 통념 혹은 상식 위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일종의 지름길이기도 하다. 물론 그 지름길을 윤희상은 자신만의 보폭으로 만들어간다.

    시에서, 너와 나는 사이다. 곧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의 주체라는 점이다. 그 둘이 ‘사이’라는 것은 또한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으로 쏠리는 일방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같은 사실을 반영하듯 시에는 아주 많은 쉼표들이 등장한다.

    쉼표는 문장과 문장을, 단어와 단어를, 명사와 명사를 나누고 지연시키는 문장 부호인 동시에 일종의 인식론적 장치이기도 한 셈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그 나뉨과 지연 사이에서 무엇을 의도하는 것일까? 김춘수의 의미, 한용운의 재회? 놀랍게도 시인은 “너와 나의 사이가 농담할 수 있는 거리가 되는 것을” 꿈꾼다. 농담? 그렇다. 시인은 농담을 꿈꾼다.

    그렇다면 그 농담의 정체는 무엇일까? 시에서는 그 대답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집 전체를 놓고 생각해보면 가령 이런 것은 아닐까? 자연(自然) 곧 스스로 그렇게 된 조화의 세계와 인공(人工) 혹은 인위(人爲)를 거친 갈등의 세계 사이에 있는 그 무엇이 아닐까?

    나주 들판에서
    정말 소가 웃더라니까
    꽃이 소를 웃긴 것이지
    풀을 뜯는
    소의 발 밑에서
    마침 꽃이 핀 거야
    소는 간지러웠던 것이지
    그것만이 아니라,
    피는 꽃이 소를 살짝 들어올린 거야
    그래서,
    소가 꽃 위에 잠깐 뜬 셈이지
    하마터면,
    소가 중심을 잃고
    쓰러질 뻔한 것이지
    -<소를 웃긴 꽃> 전문

    꽃 피는 봄날,
    꽃그늘에 들어가 울었다.

    1980년 5월 이후로,
    나의 안에서 이십여 년 동안 암약해온 무력 집단.
    -<光州 五月團> 전문

    곧 조화의 세계와 갈등의 세계가 있고, 그 두 세계가 서로 ‘농담할 수 있는 거리’가 되기를 시인은 꿈꾸는 셈이다.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꽃이 소를 웃기는 세상과 사람이 사람을 학살하는 세상이 서로 농담하는 사이가 될 수 있을까? 정말이지 그때의 농담이라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아쉽게도 시인 윤희상은 그 농담까지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화살표 하나만을 새기고 그 화살표 너머의 세상은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어법으로 말한다면 시인 역시 ‘사이’에 놓여있는 셈이다. “시와 시인의 사이에” “또 바람이 불고, 덥거나, 춥다.”
    덧붙여, 마지막 농담.

    화가는
    바람을 그리기 위해
    바람을 그리지 않고
    바람에 뒤척거리는 수선화를 그렸다
    바람에는 붓도 닿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어떤 사람들은
    그곳에서 바람은 보지 않고
    수선화만 보고 갔다
    화가가 나서서
    탓할 일이 아니었다
    -<화가> 전문

    윤희상의 시를 읽는 내가 “바람은 보지 않고 수선화만 보고”가는 사람이어도 나는 상관없다. 농담 없는 것보다는 농담하는 게 세상과 나, 시와 나, 너와 나가 연애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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