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줌마 '변절'해서 민노 후보 찍는다
        2007년 08월 29일 06:1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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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정규직 집단해고와 외주용역화에 맞서 이랜드-뉴코아 노동조합이 파업을 벌인 지 딱 2개월이 되던 28일 홈에버 상암점. 이날도 조합원들과 민주노총 1,000인 선봉대 7백여 명은 홈에버 매장 출입구를 완전히 봉쇄하며 이랜드사태 해결을 촉구했다.

    도시락으로 저녁식사를 마친 조합원들은 잠시도 몸을 놀리지 않고 피켓을 들고 곳곳에서 시민들에게 이랜드 문제를 알리고 있었다. 상암점 정문을 지키는 경찰들 사이를 비집고 홈에버 직원들이 매장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한 여성노동자가 소리를 지른다. “오늘 영업 안 해요. 이랜드 망했어요. 다른 곳으로 가세요.” 실랑이가 벌어지고 고함이 오간다.

    작은 몸집에 앳띤 얼굴로 경찰과 이랜드 관리자들에게 고함을 지르고 있던 남모(45.여) 조합원은 힘들지 않느냐는 물음에 “정말 힘들죠. 자고 일어나면 내일은 교섭이 좀 돼서 노조에서 얼른 들어가서 일하라는 얘기가 들렸으면 하는 마음이에요”라고 말한다.

    지난 6월 29일 바로 이곳에 들어와 전면파업을 시작했으니 이날로 딱 두 달이다. 하루 이틀이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벌써 두 달. 그러나 교섭도 열리지 않고 있다. 2005년 2월부터 홈에버 방학점에서 계산원으로 일했던 그녀는 남편과 사별하고 고3과 중3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가장이다.

       
      ▲ 힘이 든다. 하지만 참아내며 함께 웃고 싸워주는 동지들이 있어 든든하다. 내가 노동자라는 걸 알았고 연대의 소중함을 체험했다.
     

    파업하는 고3 수험생 엄마 

    “저희 애들이 처음에는 꼭 이겨야 한다고 화이팅 화이팅 했어요. 근데 방학이 시작되면서 길어지는 걸 느꼈는지 어느 날 갑자기 그러더라구요. ‘엄마 설마 추석 때까지 가는 건 아니지?’ 그래서 ‘그 때까지는 안 갈 거야’ 그랬는데 추석을 맞이하게 됐어요.”

    하루 일과를 마치고 밤 11시가 넘어 집에 들어가 공부하고 있는 고3 딸아이의 애처로운 모습을 마주할 때면 마음이 쓰리고 아프다.

    “다른 고3 엄마들처럼 기분 맞춰주면서 달래가면서 공부하게 하지는 못하고 도리어 애한테 싫은 소리를 해서 말다툼을 하고 나면 정말 눈물이 나고 미안해요. 신랑이 세상에 없어서 아이들끼리 매일매일 밥 차려먹고 지낸 게 벌써 며칠인지…” 어느새 그녀의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작은 애는 남자여서 그런지 꿋꿋하게 잘 있어요. 열심히 공부를 하면 비정규직이 안 되겠지, 엄마가 지금 이렇게 하니까 내가 어른이 되면 잘못된 법은 고쳐져 있겠지 하는 희망을 갖고 있어요. 그런 얘기 들을 때마다 힘이 나고 용기가 더 나요.” 아이들 때문에 포기하고 싶기도 했다가 아이들 때문에 용기를 얻기도 하는, 그래서 지금까지 당당하게 싸워 온 그녀는 ‘엄마’다.

    퇴직금 미리 받아 생계를 이어가고…

    파업을 시작한 지 한 달이 되었던 지난 7월 25일 그녀의 월급통장에 찍힌 돈은 19만원이었다. 아무래도 길어지겠다 싶어 퇴직금을 정산 받았다. 그렇게 한 달을 또 버텼다.

    8월 25일 다시 월급날이 돌아왔고, 통장에 찍힌 돈은 0원이었다. “민주노총에서 도와주신다고 하니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요.” 그와 그의 동료들은 또 다시 싸울 용기를 얻었다.
     
    평생 가정주부로 살았던 그녀는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후 아이들과 먹고 살기 위해 일자리를 찾았고, 그의 집에서 가까운 까르푸 방학점에 계산원으로 들어갔다.

    3교대 근무를 하면서 그가 받은 돈은 79만원이었다. 야간 일을 조금 많이 하면 90만원. 그렇지만 불평하지 않았고, 쫓겨나지 않길 바라면서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비정규직법의 저주’는 그와 동료들을 피해가지 않았다. 회사는 계약해지와 용역전환을 시작했고, 위기를 느낀 그와 동료들은 노동조합으로 뭉쳤다. 6월 10일 처음으로 부분파업을 시작했고, 29일 바로 이곳 월드컵 상암점에서 농성을 시작하면서 전면파업을 벌이게 됐다.

    점거농성과 강제진압 그리고 떠난 동료들

    다른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두 번의 점거농성과 강제 진압의 순간이 절대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 “딱 1박 2일만 농성하려고 왔어요. 근데 우리를 무시하고 우리 말을 안 들어주잖아요. 그래서 끝까지 싸우게 된 거죠.”

    그녀는 상암점에서 강제 연행을 당할 때에는 지방 순회 선전전을 하고 있었다. 동료들이 끌려나오는 장면을 TV로 보자 눈물이 쏟아졌다.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이어 많은 사람들이 휴가를 떠나던 때 뉴코아 강남점에서 2차 점거농성에 들어갔다. “진짜 첩보작전 하는 것처럼 떨리는 마음으로 들어갔었죠. 근데 공권력으로 또 끌려나오는데 얼마나 눈물이 나던지…”

    두 번째 공권력 투입은 내부적으로 많은 상처를 남겼다. 노동조합을 탈퇴하거나 회사를 그만둔 사람, 조용히 현장에 복귀한 사람까지 30여명이 그의 곁을 떠나갔다.

    “뉴코아 강남점에 공권력이 투입되고 그 뒤로 많이 복귀를 했어요. 아무 결과도 없고, 너무 길어지니까 그랬던 것 같아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사람들 마음도 이해가 돼요. 하지만 그래도 좀 같이 했다면 이런 시간이 좀 짧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들어간 사람들도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하더라구요.”

    민주노총의 한 간부가 “홈에버 상암점에서 방금 전 오늘 쇼핑을 마감한다는 방송을 했습니다”라고 말하자 조합원들이 함성을 지르며 박수를 친다. 그러자 그녀가 “우리가 철수하면 다시 문을 연다니까요. 제네들이 어떤 애들인데. 밤 10시까지 끝까지 싸워야 해요”라고 말한다.

    노태우부터 이회창까지 오직 한 길

    지금 그녀는 한나라당 당원이다. 노태우에서 이회창까지, 민정당부터 한나라당까지 그녀는 오직 한길(?)을 걸어왔다. 가정주부로 살면서 부녀회 아주머니들과 친해졌고, 자연스레 민정당에 가입하게 됐다. 선거철은 그녀에게 없는 가정살림에 큰 보탬이 됐다.

    지난 대선과 총선에서도 그녀는 도봉구에서 한나라당 선거운동을 했다. 유세에 동원되면 5만원, 출퇴근 유세에 나가면 7만원이 주어졌다. 두 달 정도 바짝 하면 적잖은 목돈이 주어졌고, 아이들 학원비에 보탰다.

    지난 달까지 그녀의 전화비에서 매달 2천원의 당비가 한나라당으로 빠져나갔다. ‘진성당원’ 제도가 도입되자 동네 한 분이 5개월치 당비인 1만원을 선불로 줬고, 그는 그렇게 ‘진성당원’이 됐다. 이랜드 투쟁을 하면서 민주노동당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대변한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그는 진짜 열성적이고 핵심적인 한나라 당원이었다.

    "연대하러 온 학생 민노당에서 돈 받는 아르바이트생이래"

    한나라당 열성당원이었던 그녀는 당연히 경찰 등 ‘관계기관’ 사람들과 친분이 두터웠다. 그녀가 이랜드 투쟁에 나서자 주변 사람들은 순진한 그에게 많은 이야기를 했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이 왜 도와주는 줄 알아? 나중에 조합비와 당비를 받아서 보충하면 되니까 손해 보지 않거든. 그래서 도와주는 거야.”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이 관여해서 늦어지는 거야. 민주노총이 참가해서 빨리 끝낸 파업은 없대. 해결은 되겠지만 길어질 거야.

    이보다 훨씬 더 심한 얘기도 그의 귀에 계속 들어왔다.

    “민주노동당 도봉구 위원장은 월급을 350만원이나 받아간데.” “연대하러 온 학생들도 다 아르바이트생이래. 민노당이 돈 주고 불러왔대.”

    처음에는 “설마 그러겠어?”하며 무시했지만 그런 얘기가 계속 들리니까 그녀도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느 날 그녀는 늘 연대하러 왔던 ‘노랑머리’ 고려대 대학생에게 평촌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진짜 아르바이트생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친구는 막 웃었고, 그는 미안해서 아무 말도 못했었다.

    민주노동당 지역위원회 위원장에게 당에서 단 한 푼도 지원하지 않는다는 얘기도 뒤늦게 알게 됐다. 주변 사람들이나 회사 관리자들이 하는 얘기가 모두 거짓이었다는 사실을 그녀는 하나씩 확인하게 됐다. 자기를 희생하면서 연대했던 사람들을 ‘알바생’으로 의심했던 모습이 너무 부끄러웠다. 

    한나라 당원에서 민주투사가 되기까지

    순진한 주부이자 한나라당 열성 당원이 민주투사로 변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가 일하던 홈에버 방학점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에 가입한 것은 지난 해 11월이었다. 회사가 리모델링을 하면서 외주용역화를 많이 했고, 이 과정에서 불안을 느낀 계산원들을 중심으로 노조에 가입했다.

    홈에버는 정규직 직원에게는 물건을 구매할 때 5% 할인을 해주면서 비정규직은 혜택을 주지 않았다. 그와 동료들이 리본을 달고 할인혜택을 요구하자 두 달만에 정규직과 똑같은 혜택을 줬다. 그런데 그건 방학점에서만 그랬다.

    6월 29일 홈에버 상암점에 모인 동료들은 전혀 몰랐던 다른 매장의 소식들을 알게 됐다. 그녀가 일하는 방학점에는 꼬박 4시간 동안 화장실도 못가고 일했었다. 생리를 해도, 배가 아파도 화장실에 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다른 매장에서는 2시간 일하고 15분을 쉬고 있었다.

    투쟁으로 부당한 걸 시정하고 권리를 찾았다는 사실을 서로 확인하는 순간 이랜드-뉴코아 노동자들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래, 가만히 있는 노동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주어지지 않는구나. 우는 아이 젖 준다고 싸워야 우리 권리를 찾을 수 있는 거야’ 그녀를 비롯한 많은 동료들이 이 진실을 깨닫게 해 준 곳이 바로 홈에버 상암점의 20일 농성이었다.

    민주노동당 열성 지지자가 되다

    “두번째 점거농성에 공권력이 투입되고 경찰서에서 나오던 날이었어요. 한나라당에서 이명박과 박근혜 후보가 경쟁하는데 추천을 받는다는 안내문이 집에 와 있더라구요. 너무 신경질이 나서 확 찢어버렸어요. 한나라당에 전화해서 더 이상 후원하지 않겠다고 했구요.”

    그녀는 아직 민주노동당 당원이 될 결심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노동당 후보를 찍겠다는 결심만은 확고하다. “당연히 민주노동당 후보를 찍어야죠. 제가 주위 사람들한테도 열심히 선거운동을 할 거예요. 이제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 노동자가 힘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사태가 일어났다는 얘기를 해야죠.”

    곁에 있던 진현미(37) 분회장이 “우리 조합원 중에 여러 명이 민주노동당에 가입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귀뜸한다. 이렇게 민주노동당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가슴에 새겨지고 있었다.

    그녀와 동료들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현재 파업 대오에는 같이 일할 때도 남 배려 많이 하고 많이 생각해주는 사람들이 남아 있어요. 어려운 고비는 다 넘겼어요. 평상시에도 열심히 일하고 반듯하고 마음 여리고 남 생각 많이 해주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연말까지라도 흔들리지 않고 싸울 수 있을 거예요.”

    “연말까지도 흔들리지 않고 싸울 거예요”

    그녀는 기대한다.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가 텔레비전에 나와 이랜드 노동자들의 울분과 분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설움을 전 국민들에게 알리는 모습을. 이랜드 불매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결국 이랜드 사용자들을 굴복시키고 당당하게 일터로 돌아가는 그 날을.

    그녀는 29일부터 1박 2일 동안 조합원들이 없는 전주와 광주 등에 선전전을 하러 간다. 다른 동료들은 아이들이 어려 외박이 쉽지 않기 때문에 그녀는 스스로 가겠다고 자원했다. 두 아이가 눈에 밟혔지만 잘 이겨내주길 바라면서.

    밤 8시 30분. 갑자기 경찰이 “불법집회를 중단하라”는 경고방송을 하더니 물대포를 쏘기 시작했다. 투쟁으로 단련된 조합원들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는다. 한 여성노동자가 “달리자”고 소리치자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뛰어 다른 출입구로 몰려 들어갔다. 경비를 서지 않고 버스 안에 들어가 있던 경찰들이 깜짝 놀라 당황한 모습으로 버스에서 내렸고 조합원들과 뒤엉켜 아수라장이 된다.

    파업투쟁 두 달. 이랜드 노동자들은 평범한 주부에서 민주투사로, 한나라당 핵심당원에서 민주노동당 열성팬으로 변했다. 나아가 그들은 가녀린 여성의 몸으로 850만 비정규직의 가슴에 응어리진 한과 울분을 거침없이 세상에 토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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