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초의 스타, 그리고 여전히 최고 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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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8월 27일 07:0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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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영화 <스트로베리 쇼트케이크> 속 한 장면. 여주인공 사토코가 담배자판기에서 일본 담배 ‘hope’를 찾습니다. 하지만 돈이 있어도 살 수가 없죠. 다 떨어졌거든요. 주인공은 이내 실망한 표정으로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희망은… 다 팔린건가?”

    사토코의 실망이 저의 실망과 다르다고 차마 말 못하겠습니다. 지금 사는 세상이야말로 희망이 품절된 담배 자판기와 다를 바 없어보이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밀려오는 막연한 답답함, 잘못된 세상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고 어쩌면 이 세상이 지금보다 더 악화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떨쳐내고 싶지만, 애석하게도 저를 구원해줄 희망은 일찌감치 품절된 지 오래입니다.

    품절된 지 오래된 희망

    물론 바쁘게 사는 덕에 제 살림살이는 좀 나아졌습니다. 하지만 살림살이가 나아졌다고 제가 더 행복해졌을까요? 그렇지 않던데요? 주택담보대출을 좀 갚는다고 해서 이 땅의 힘없는 사람들에게 진 제 마음의 부채마저 함께 상환되는 건 아니더라 이겁니다.

    대학교 때 운동 좀 했다고 알량한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게 아니냐구요? 맞습니다, 맞고요, 가증스러운 먹물(그나마도 맹물에 가까운 먹물이지만)의 근심이라고 손가락질 해도 딱히 피할 재간이 제겐 없습니다. 하지만 알량한 부채의식과 가증스러운 근심마저 없었다면 감히 민주노동당 당원이 될 생각도 못했을 겁니다.

    그러므로 저에게 민주노동당 당원이라는 소속감은 한때 시위 현장을 기웃거리던 ‘왕년의 운동권’이 더 이상 타락하지 않게 돕는 방부제와도 같습니다. 그런데 대통령 선거를 목전에 둔 지금, 이젠 방부제, 그 이상을 욕심내고 싶어지네요.

    1992년 대학교 1학년 때 백기완 후보 선거운동을 도왔습니다. 당시 민중에게 권력을 쥐어주라고 소리 높여 외쳐댔지만 솔직히 구호를 외치는 저조차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마치 떨어질 걸 뻔히 알면서 서울대 법대에 원서를 밀어넣는 전교 432등의 심정에 비할수 있을까요? 그런데도 ‘선거는 곧 선전전이다!’ 그 말 하나 믿고 참 공허한 구호를 목이 터져라 많이도 외쳤습니다.

    떨어질 원서 내밀면서 마음이 뿌듯했던 97년

    하지만 1997년 권영길 후보 때는 조금 달랐습니다. 여전히 커트라인은 까마득히 멀어보였지만 그 사이 등수가 겁나게 많이 오른 기분. 우리를 대하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어쩌면 우리도 멀지 않은 미래에(!) 대안으로 선택될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보고 나니, 어차피 떨어질 원서를 내밀면서도 이상하게 마음만은 퍽 뿌듯했습니다. 선거는 선전전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선전전일 수 만은 없다. 그것이 그때 품은 희망이었습니다.

    그리고 2002년 권영길 후보. 난생 처음 선거운동원이 아닌 한 사람의 유권자로 선거 운동을 지켜보았습니다. 마음으로는 민주노동당을 응원하면서 투표로는 노무현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보며 발만 동동구르던 생각이 납니다. 결국 우리가 오를 수 있는 봉우리는 여기까지인가? 실망도 하고 체념도 했습니다. 하지만 5년이 지난 지금, 오히려 그때보다 더 큰 기대를 품게 됩니다.

    말 잘하는 정치인과 믿음직한 리더의 쓰임새는 구분되어야 한다는 걸, 지난 5년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뼈저리게 깨달았나요? 그렇다면 지금이야 말로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고집스럽게 자기 길을 가는 민주노동당의 이미지를 더욱 부각시킬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늘 자신의 신념을 ‘웅변’하기에 앞서 민중의 희망을 ‘대변’하는 데 앞장서온 권영길 후보가 가장 적임자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는 민주노동당이 단지 ‘이념의 정당’이 아니라 ‘신념의 정당’임을 행동으로 증명해온 대중 정치인입니다. 그리고 비례대표 후보가 아니라 지역구 후보로, 말 그대로 ‘계급장 떼고’ 맞장 떠 국회의원이 된 현장정치인이기도 하죠.

    판갈이 된 불판 위에 어떤 고기를 올려야 좋을까

    제게는 새까맣게 타버린 판을 갈아야 한다고 외치는 것 못지 않게, 그 판 위에 어떤 고기를 올려놓을 지 먹음직스러운 메뉴판을 함께 내미는 선거 운동이 더 중요해보입니다. 그것이 설령 같은 고기일지라도 지난 10년간 같은 자리에서 한결같은 맛으로 고기를 구워온 베테랑 주방장이 내미는 고기라면 젓가락이 한 번이라도 더 가게 마련이겠죠.

    우리끼리 회식하며 구워먹는 고기라면 누가 구워도 맛있게 먹을테지만 대중을 상대로 제대로 장사 한 번 해보자고 마음 먹은 이상, 권영길 후보가 쌓아 온 신뢰와 명성은 그 무엇도 대신할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 될 겁니다. 유권자에게 권영길은 진보정당 최초의 스타이면서 여전히 최고의 스타이기도 하니까요.

    선거운동원이 아닌 유권자로, 사회 문제에 예민하게 눈과 귀를 열어둔 열성당원이 아니라 먹고 살기 바쁜 소시민으로, 한 발 떨어져 당을 바라본 지 꽤 되었습니다. 물론 그게 자랑은 아니지만 덕분에 일반 유권자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마음으로 선거를 맞이하게 되었네요.

    간혹 당원이 아닌 주변 사람들에게 슬쩍 이야기를 꺼내보면 제가 생각하는 본선 경쟁력이, 그들에게 어필할 본선 경쟁력의 조건과 많이 닮아있다고 느낍니다. 민주노동당이 언제까지나 ‘미래의 복안’으로 머물러있길 원하지 않는다면, 꽤 믿음직한 ‘현재의 대안’으로 인정받길 원한다면, 권영길 후보가 또 한 번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로 나서는 게 가장 영리한 선거전략일 겁니다.

    우리에게 선거는 더 이상 단순히 선전전이 아니지 않나요? 행여 아직도 선전전만 할 생각으로 선거에 임하는 정당이라면 유권자들 앞에서 감히 희망을 얘기할 자격도 없는 거겠죠.

    다시 한 번 권영길 이름 석자에 꾹, 사회 진보에 대한 당원들의 열망을 눌러 찍은 투표 용지를 밀어넣자고 감히 청해봅니다. 그러면 품절된 희망버튼도 다시 밝게 빛나게 될 겁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 * *

    김세윤

    전 <진보정치> 필진
    영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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