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모의 운동권 공식에서 해방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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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8월 23일 10:0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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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7년 외환위기 직후에 재벌 경제연구소 중 한 곳에서 외환위기 이후 예상되는 한국 사회의 주요 변화 10가지를 꼽아서 발표한 적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하도 인상 깊어서 지금까지도 기억하는데, “대학생들의 취업난이 심각해지면서 불만이 높아지고 그래서 학생운동이 부활한다”는 것이었다.

    그 때 이미 필자는 ‘대학생’ 중의 한 명은 아니었지만, 내심 그 예언이 들어맞았으면 좋겠다는 불온한 기대를 했었다.

    하지만 재벌 경제연구소의 드높은 권위에도 불구하고 그 예측은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현실은 정반대로 나타났다. 대학생들이 취업 경쟁에 내몰리면 내몰릴수록 학생운동이든 뭐든 집단행동으로 뭔가를 해결하려는 성향은 점점 더 약해져가기만 했다. 사실 학생운동은 이제 사회운동으로서 생명력이 다 한 것 아니냐는 평가까지 받는 형편이다.

    필자는 두 달쯤 전 인도네시아의 운동권 토론회에 민주노동당 발제자로 참석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98년 인도네시아 반독재 항쟁의 투사들 중 한 명이 이런 질문을 해왔다. “한국에서 학생운동이 그렇게 활발한 이유가 궁금하다.”

    필자는 솔직하게 답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에 더 이상 그런 학생운동은 없다.” 이 말이 입에서 나오자마자 회의석 곳곳에서는 탄식이 새어나왔고, 참석자들의 안타까운 눈빛에서는 “도대체 왜?”라는 물음이 역력했다.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 참으로 난감한 순간이었다. 딸리는 외국어 실력도 문제였지만, 나 자신 그 이유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래서 필자의 입에서 떨어진 말은 고작 이런 것이었다.

    “신자유주의가 그렇게 무서운 거야.”

    왜 ‘세대’인가?

       
     
     

    만약 우석훈, 박권일이 이번에 <레디앙>을 통해서 낸 책 『88만원 세대』를 먼저 읽을 수 있었더라면, 필자의 답변이 그렇게 궁색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이미 <레디앙> 사이트를 통해 독자들에게 친숙한 경제학자 우석훈 박사와 전 <말>지 기자 박권일 씨가 콤비를 이뤄 써내려간 이 책은 한 마디로 2007년 대한민국의 ‘20대’를 해부한 책이다.

    20대는 뭘 먹고 사나, 뭐하며 노나 식으로 흥미를 채우자는 게 아니라 ‘20대’를 열쇳말 삼아서 작금의 한국 사회를 성찰해보자는 게 취지이고, 적어도 필자가 보기에는 그 취지를 100% 충족시키고 있다.

    물론 저자들 역시 10년 전, 20년 전의 20대에 비해 지금의 20대들이 훨씬 더 출구 부재의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하는 이유로 다름 아니라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주목한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란 그런 거야” 식으로 무참하게 단정을 내리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훨씬 더 설득력 있게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한국 사회의 후속 세대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드러낸다. 한국 사회의 궤적을 훑는 대목에서도 많은 시사를 얻을 수 있고, 다른 나라 사례와의 비교도 결코 식상하지 않다.

    한데 이 대목에서 이런 질문을 한 번쯤 던져볼 수 있겠다. 단지 한국 학생운동의 퇴장에 뒤늦은 만가를 헌정하려거나 10여 년 전의 ‘신세대론’ 같은 것으로 독서 시장에서 한 몫 잡으려는 게 아니라 신자유주의 이후의 한국 사회를 진지하게 들여다보려는 것이라면, 왜 하필 ‘세대’를 그 틀거리로 잡은 거냐고. 물론 “왜 하필 ‘세대’냐”는 물음 앞에는 이런 한정 문구가 생략된 것이다. “‘계급’이나 ‘성’(gender) 혹은 ‘지역’이 아니라” …

    저자들을 대신해서 필자가 제 멋대로 이 물음에 답해본다면, 그것은 자본주의가 ‘착취의 체계’이고 ‘불평등의 온상’일뿐만 아니라 또한 ‘변화의 시간대’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인류 역사상 초유의 변화의 시대다. 흔히 ‘변화’라고 하면 좌파에게 더 인연이 깊은 말로 여기곤 한다.

    하지만 애초에 ‘변화’는 자본주의의 주체할 수 없는 충동이었다. “착취하라, 착취하라, 또 착취하라”가 자본주의의 첫 번째 정언명령이라면 그에 버금가는 또 다른 정언명령은 “변하라, 변하라, 또 변하라”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세대’가 중요하다. 세대는 사회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자본주의 이전에도 물론 세대란 관념은 존재했다. 그리고 세대간 차이란 것도 존재했다. 그러나 그 때의 세대는 그야말로 정태적이고 기능적인 것이었다.

    젊어서는 쾌락에 탐닉하고 나이 들어서는 재산을 모으다가 늙어서는 요가 수행자가 된다는 과거 인도의 풍습에서 드러나듯이, 세대란 모든 개인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채워가는 어떤 불변의 자리였다.

    하지만 일단 자본주의로 넘어가게 되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진다. 자본주의는 그 숨 가쁜 변화를 통해서, 불과 몇 년이 안 되는 세월을 ‘무엇 이전’과 ‘그 이후’로 가르는 역사적 경험들을 낳는다.

    사람들은 특정한 연령대에 특정한 역사적 경험들을 하게 되고, 그래서 서로 다른 연령대의 사람들 사이에서 삶의 조건이나 문법, 대응 방식의 유의미한 차이가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세대’를 이해한다는 게 곧 지금 이 순간에도 어지럽게 질주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운동을 포착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특히 ‘압축’ 성장과 ‘초고속’ 개방, ‘급속’한 양극화라는 궤도를 달려온 한국 자본주의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어쩌면 한국 사회는 다른 어느 자본주의 사회보다도 더 ‘세대’라는 변수가 중요한 설명 능력을 갖는 경우일 것이다. 1, 2년에 한 번씩 ‘세기적’ 사건이 일어난다는 게 결코 농담이 아닌 이 나라에서는 대학교 4학년생이 신입생과 세대차를 느낀다는 게 정말 우스갯소리만은 아니다.

    필자 자신 저자들의 분류법에 따르면 이른바 ‘X 세대’(‘386’ 다음 세대, 즉 한때 ‘신세대’라는 과분한 호칭을 선사받았던 90년대 초반의 20대들)에 속한다는데, 사실은 ‘386’은 물론이고 ‘X 세대’에게도 거리감을 느낀다. 차라리 ‘강경대 세대’(혹은 ‘91년 5월 세대’)라는, 두 세대 사이에 낀 세대의 정체성을 주장하고 싶어지는데, 이것은 곧 10년 단위의 세대 끊기조차 한국 사회에서는 별로 역동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과연 그 ‘민중’은 존재하는가

    우석훈, 박권일 두 저자의 이야기 풀어나가는 방식은 사뭇 흥미진진하다. 사회과학 서적이라면 그 딱딱한 문장과 서술 때문에 눈길조차 주지 않는 분에게도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겠다 싶다. 이 시대에 한국의 사회과학 전공자들이 지향해야 할 글쓰기의 한 모범을 제시하고 있다고 할까.

    다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세대간 단절과 경쟁을 해결하기 위한 출발점으로 제시한 몇 가지 대안들이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느낌을 준다는 게 못내 걸린다. 저자들은 ‘예산 제약’이라는 구호 아래 너무 많은 변수들을 ‘변화 불가능’한 상수로 처리해버린다. 이렇게 ‘혁명의 가능성’이라든지 ‘세계화 추세의 변화 가능성’ 등을 배제한 채로 해결책을 모색하기 때문에 대안의 목록도 제한될 수밖에 없다.

    물론 두 저자가 혁명주의자임을 선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타박하려는 것은 아니다. 『88만원 세대』의 최대의 미덕이 읽는 이로 하여금 사회를 바라보는 상상력의 눈을 뜨게 만드는 점에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안 제시 부분에서는 그 상상력의 자극을 저자들 스스로 너무 제한한 게 아닌가 라는 아쉬움을 표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지금의 20대가 앞으로도 계속 ‘88만원 세대’(표준적 용어법에 따른다면, ‘비정규직’, ‘영세 자영업자’, ‘비경제활동 인구’ 등등)에 머무르길 바라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이 책을 반드시 한 번은 읽어봐야 한다고 강권하고 싶다. 이 책이 운동권의 불모의 공식들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해방의 효과가 결코 작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집회나 당 모임에서 민주노동당 정치인들로부터 흔히 듣는 “1400만 노동자, 400만 영세자영업자, 350만 농민 운운” 하는 선동을 떠올려보자. 이 이야기만 듣고 보면, 게임은 이미 끝난 거나 마찬가지다. 이렇게 많은 ‘민중’이 있는데, ‘일하는 사람들의 정당’이 무엇을 더 걱정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 모두 다 알고 있듯이, 게임은 지금 끝이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가? 『88만원 세대』를 펼쳐들고 20대 미래 노동자들과 그들의 부모 세대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을 똑바로 쳐다보라. 거기서는 지금 기가 막힌 가족 비극이 상영되고 있다.

    영세자영업자, 농민은 고사하고 “1400만 노동자”는 지금 자신들이 살아오거나 살고 있는 저마다 다른 역사적 경험의 감옥에 갇혀 서로 통방도 못하고 있다. 50대의 노동자가 ‘착취’를 해석하는 언어가 다르고, 20대가 그것을 해석하는 언어가 또 다르다. 언어가 다르니 둘 사이의 대화도 불가능하다. 우리의 노동자들에게는 아직 공통의 언어조차 없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시간대가 공존하며 서로 접속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과연 ‘민중’은 어디에 있는가? 과연 존재하기라도 하는가? 요즘 유행하는 “나, 지금 누구한테 이야기하니?”라는 어느 개그맨의 대사처럼, 민주노동당은 과연 지금 <누구>한테 이야기하고 있는가?

    어쩌면 『88만원 세대』의 의미는 그 <누구>가 누구인지에 대한 한 연구 성과라는 점보다도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뒤늦게나마 이러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다는 점에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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