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하준의 무지와 착각 그리고 박정희주의
        2007년 08월 23일 06:1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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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스웨덴을 보고 배우는 데에도 여러 갈래가 있는데, 노동운동과 사회복지의 발달을 보는 게 한국 진보운동 주류의 시각이고, 이른바 사회적 타협 모델로 보는 게 노무현 정권 유럽파의 생각이다.

    그런데 이런 두 방향과는 달리 ‘재벌과의 타협’에 특별히 주목하는 흐름도 있으니, 금융경제연구소의 이찬근(인천대 무역학과), 대안연대의 정승일(국민대 경제학부) 교수이고, 근래에는 케임브리지대의 장하준 교수가 그 바통을 이어받았다.

    “우리나라의 민주화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경제적으로 실망스러운 결과를 낳은 것은 …재벌 총수 가족들과 같은 집단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일반 국민들은 …금융자본가들이 시장원리에 따라 재벌 총수 가족들을 압박하는 데에는 박수를 보낸다. 그 결과는 서로 힘을 약화시키고 공멸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사회적 대타협의 기본적인 줄기는 재벌들의 경영권을 안정시켜 주고 그 대가로 국민들이 더 적극적인 투자, 고용창출, 노사관계에 대한 전향적 접근, 그리고 복지국가를 요구하는 것이다.” – 장하준, 「민주화 20년, 경제민주주의, 그리고 사회적 대타협」,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프레시안> 공동 강연, 2007. 8. 22

    이른바 사회적 타협이라는 것은 ‘죽어도 안 한다’ 거부할 필요도, 애걸하며 목맬 필요도 없는 것이다. 할 필요가 있거나, 할 수밖에 없거나, 할 힘이 있으면 하면 되는 것이다. 어떠한 계급투쟁도 끊임없이 지속되기 어렵고, 마찬가지로 어떤 계급타협도 영원하지 않다.

    하지만, 장하준의 가설적 주장은 바람직하거나 가능한 타협안이라 보기 어렵다.

    첫째, 장하준이 고용 문제의 핵심으로 들고 있는 비정규직 문제가 재벌과의 타협을 통해 개선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재벌과 타협할 수 있는 직접 당사자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인데, 이들은 이미 단협상의 고용 안정을 이루고 있으므로 무엇인가 양보하며 고용 안정을 이루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중소기업의 비정규직들은 아예 재벌과 타협할 수 있는 자리에 있지 않다.

    또, 비정규직 발생의 직접 원인이 재벌로의 독점화, 그리고 불공정 거래를 통한 비용 전가에서 비롯되었고, 재벌 통제 약화가 그 정치사회적 배경임에 비추어 재벌과의 타협은 비정규직 문제를 더 악화시키면 시켰지, 개선시킬 개연성은 전무하다.

    둘째, 재벌이 사회복지의 주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법인세 인상을 통해 사회복지 재원 확충에 다소 기여할 수는 있겠지만, 그 정도로 한국 사회복지를 확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이다.

    현재 재벌은 사회복지보다 월등히 높은 기업복지를 보장하고 있는데, 그 혜택을 받는 사람들은 경제활동인구의 6%인 160만 명이다. 이 이야기는 중소기업 노동자와 자영업자들에게 재벌의 기업복지 수준과 비슷한 사회복지를 주려면 법인세든 뭐든 재벌이 20배쯤 더 내야 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재벌 고용률이 높은 스웨덴에서는 사회복지가 재벌의 문제였지만, 재벌 고용률이 낮은 한국에서는 자본 일반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셋째, 지금으로서는 재벌도 노조도 사회적 타협의 주체이기 어렵다. 스웨덴과 한국의 비교할 수도 없는 노동조합 조직률 차이에 대해서는 장하준 역시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노조만이 사회적 타협의 난관일까? 한국의 재벌은 어떠한가? 사회적 타협은커녕 합법 노조와의 산별 교섭도 거부하고, 아예 노동조합을 인정하지도 않는 전근대적 재벌이 과연 자본주의적이고 합리적인 계약을 할 수 있을까?

    장하준은 노조 대신 ‘국민’을 내세운다. 경제학에서 국민(gross national)은 산술적 실체이지만, 정치사회적으로 국민은 산술되지 않는 유령이다. 따라서 으레 국민을 국가가 대체하기 마련이고, 투쟁과 타협의 주체여야 하는 계급을 생략한 국가 주도 코포라티즘의 산물이 오늘날의 남미다. 장하준의 구상은 기껏해야 가부장 국가인 박정희주의의 21세기판이다.

    장하준과 그 동료들이 스웨덴과 발렌베리 가문을 거론하는 것은 꽤 바람직하다. 그런데 그들이, 발렌베리 가문이 금융자본에서 출발한 지배 주주이고, 전문경영인 체제를 두었다는 사실을 애써 말하지 않는 것은 불순하다. 스웨덴과 발렌베리를 예로 들며 산업자본인 재벌 일족의 경영권 세습을 옹호하는 것은 웃기는 일이다.

    재벌이라 칭해지는 대기업들과 그 산업적 토대는 마땅히 보호되어야 한다. 하지만 산업 보호를 재벌 일가 보호라고 일부러 착각해서는 안 된다. 또, 대기업의 경영 안정성이 재벌 2, 3세에 의하여야 한다고 강변해서는 더욱 안 된다.

    장하준과 비슷한 사람들이 가장 모르고 있는 것은 사회적 타협이라는 것이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힘의 문제이고, 정책적 선택보다는 대립하는 정치적 힘의 역사적 교차점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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