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노동당과 심상정 후보에게 바란다
    By
        2007년 08월 20일 06:26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새 술은 새 병에 담아야 한다고,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세대와 새로운 비전이 창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사회의 문화에서 낡은 것을 못 참아하는 ‘새것주의’는 그 병폐가 너무 심각하여 이루 말할 수 없는 지옥 상을 만들어내고 있지만 – 그대가 이미 폐기한 적 있는 구형 전자제품들, 옷들, 그릇들, 장신구들, 가구들이 지금 어디에서 무슨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지를 잠깐 생각해보라 – 새로움이라는 가치를 다른 쪽에서 생각해보면, 사람은 그가 뉘든 이 가치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다.

    그것은 그레고리 번스가 밝혀놓고 있듯, 기쁨과 만족의 한 상징 호르몬인 ‘도파민(Dopamine)’의 한 원천이 바로 새로움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인간은 어쨌든 새로운 미지에 열려 있는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자신의 자유를 실현하며 살아가려는 본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들에게도 새로움은 하루의 양식

    보수주의자들에게도 새로움(Novelty)은 하루의 양식이고, 살 날이 얼마 안 남은 구십 노인에게도 새로움은 생명의 양식이다. 하이데거는 언어가 삶의 환경이 아니라 삶의 구조라 했지만, 새로움 역시 인간 외부에 있는 어떤 가치가 아니라 인간 생명의 구조적 인자이다. 도파민이 바로 이를 증명한다.

    새로 열리고 있는 시대에 민주노동당도 구태의 이미지, 구태의 언어 실천, 구태의 사고 틀을 떨쳐 내고 새 옷을 입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열린우리당과 이 당의 이념과 유사한 이념의 스펙트럼을 가진 정치세력은 대선이 열어놓은 이 미정형의 공간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새 옷을 입었다.

    그러나 이들이 대중들이, 민초들의 요구에 합치될 만한, 부응할 만한 새 옷을 입은 것인가.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한나라당이 결코 이 나라 선량들, 민초들의 대안이 될 수는 없지만, 열린우리당의 ‘예정된’ 실패가 백일천하에 너무도 자명하게 드러난, 그렇다고 민주노동당이 그에 대한 어떤 확실한 대안으로 떠오른 것도 아닌, 막막한 정치적 공황의 상태였고, 다수 대중들, 다수 민초들 (농어민, 생산직, 서비스직 노동자 등의 생산자계급)의 요구를 반영할 정치 세력이 나타나야 할 새 공간은 물음표로, 미정형으로 남아 있었다.

    이 열린 물음표의 정치 공간에, 민주노동당이 손 놓고 있는 동안, 이른바 ‘손학규들’이 적극적으로 뛰어들었고, 결국 미래창조대통합민주신당이라는 새로운 구태로, 대선이라는 ‘디 워’의 무대에 등장하여 지금 우리 앞에 있다. 이들은 ‘범여’라는 이름으로 아귀다툼, 이합집산의 산통 끝에 새로운 괴물을 창조해내는 데 성공했지만, 이들의 기대대로 대선에서 승리할 만큼 성공적으로 변신했는지 뉘도 짐작할 수 없는 의문으로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구태가 만들어낸 괴물

    선거공간을 활용하는 것이든, 실제로 정권에 도전하는 것이든 간에, 선거공간에 참여하는 세력의 전략적 말은, 정권을 잡겠다는 것이다. 정권을 잡겠다는 것은, 정부를 운영하겠다는 것이니, 이를 추구하는 정당의 당명은 전체에게 비전을 제시하는, 시대정신의 요구, 대중들, 민초들의 요구를 담아내는 당명이어야 한다. 또 새로운 열망을, 새로운 시대가치를 표명하는 이름이어야 한다.

    민주노동당은 어떠한가. 정권을 잡겠다는 것은, 국민 전체를 대표해서 전체의 일을 하겠다는 것이니, 어떤 하위 집단, 특정 집단의 요구나 목소리만을 대표해서는 안 되고, 전체의 목소리를 포괄해낼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정부의 어떤 정책이 모든 사회집단에게 혜택을 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정책입안, 정책결정은 전체에 대한 고려 속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다수지만 힘이 없는 생산자계급에게 이익이 실질적으로 돌아가는 정책과 소수지만 막강한 권력을 지닌 자본가계급에게 결국 혜택이 주어지는 정책 사이에 타협은 있을 수 없고, 이 둘은 충돌할 수밖에는 없을 터여서, 한 정당의 공약은 전체를 포괄하는 공약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상호 충돌하는 계급들이, 상호 반목하는 이익집단들의 공동적 사회 공간도 있다. 가령 육아의 문제, 자식들의 교육 문제, 건강의 문제, 먹을거리의 문제, 안전하게 약속 지점까지 이동하는 문제, 환경 복지의 문제, 에너지 생산과 공급의 문제, 주거의 문제 등 기본적인 생명활동의 유지와 사회재생산에 관계되는 사회 안전망과 관계된, 이슈의 공간이다.

    계급과 이익집단들 사이 공동의 공간

    자식을 낳고 가계경제를 운영하는 이들 중에 이런 문제들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이들은 직업이나 계급을 초월해 하나도 없는데, 우리는 이들을 하나로 묶어 시민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그 정당은 계급이 아닌 시민들의 공통적 요구를 두루 정책에 포괄하고 반영할 수 있어야 하고, 이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서, 현 행정부의 체계를 대신할 수 있는, 현 행정부와 동등한 체계를 구성할 수 있는 충분한 인적 자원을 확보해야 한다.

    첨언하자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열린 정치 공간에 다수의 대중들은 계급으로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각성된, 혹은 각성되지 않은 시민으로서도 참가하고, 특정한 문화적 선호를 가진 취향인으로서도 참가하고, 여자 혹은 남자로서도 참가하고, 젊은 세대 혹은 기성세대로서도 참가하고, 배운 사람 혹은 지식인을 싫어하는 사람으로서도 참가하고, 의식적 무의식적 개발주의자 혹은 녹색주의자로서도 참가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다중정체성을 지니지 않은 인간은 단 한명도 없으며, 대선에서 누군가를 찍을 것인가 하는 결정의 최종적 주체는 계급적 정체성뿐 아니라 문화적, 각종 이데올로기적 정체성이 혼융되어 있는, 1천억 개의 뉴론(신경)세포를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매우 복합적이고 복잡한 개체라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 개체는 앞서 말했듯, 시간이라는 관념의 착각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움(Novelty)를 삶의 양식으로 쫓고 있는 개체다. 따라서 이 다중정체성과 새로움 추구라는 인간 본질을 고려하지 않은 모든 선거 전략과 전술은 성공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진보’와 ‘좌파’라는 말을 과감하게 버려라

    지금 한국사회에서 각 정당 간의 대립구도는 “실질적으로” 진보-보수, 좌파-우파의 대립 구도겠지만, 한국사회에서 진보적 좌파의 이념을 “정말로” – 머릿속에서가 아니라 – 실현하려는 의지를 가진 정치세력은 지금 당장 “진보”와 “좌파”라는 말을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그것은 이 말들이 지칭하는 실질적 내용의 전달과 확산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이 말들로서는 하루하루 새로워지고 있는 대중들, 시민들, 민초들의 새로움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 이 말들로서는 진보적 좌파와 그렇지 않은 정치세력을 효과적으로 구분할 수 없다.

    가령, “진보의 실현”, “좌파적 정책”이라는 말 대신 “공공성의 확대”라는 말을 쓰는 것은 어떠한가. “공적 민주주의”라는 말은 어떠한가. “공적 복지의 확대”라는 말은 어떠한가. “민주주의의 (균일적) 확대”, "자치 민주주의의 확대”라는 말은 어떠한가. “자원의 공정분배”라는 말은 어떠한가. “복지의 횡적 확대” “복지의 횡적 균일화”라는 말은 어떠한가. “초록의 복지”라는 말은 어떠한가.

    나아가 “초록의 공정분배”라는 말은 어떠한가. 이런 말들은 다중정체성을 지닌 시민-계급의 한 개체에게, 전체의 비전을 기대하는 한 선거권자에게, 훨씬 더 수용 가능하고, 신선하고, 새 시대를 약속하는 비전 있는 말들로 들릴 것이다. 그러면서도 진보와 좌파의 실질을 구현할 수 있는 말일 것이다.

    승리에는 이를 보장할 효과적인 무기가 필요하다. 전체의 요구와 새로움의 요구를 담당할, 옛 이데올로기의 새 옷이 필요하다. 자주니, 민주니, 평등이니, 진보니, 민중이니 하는 말들은 이전의 싸움터에서 너무나 오염되어, 너무나 많이 찢기고 뜯어지고 달걀 세례를 받아, 듣는 것만으로도 우리 모두의 마음에 역증을 불러일으킨다.

    옛 이데올로기에 필요한 새 옷

    우리 몸과 마음과 정신과 혼령은 이미 나날이 새로운데, 이 말들은 뒤로 빠져나가고 있는 과거의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말들이 담고 있는 가치는 지금뿐 아니라 당분간, 매우 오랫동안 우리의 문명적 삶에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들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 사회에서, 이런 말들은, “실제로” 자주적 삶과 평등한 세계를, 민중이 중심이 되는 진보된 세상을 창조하는 데 기여하는 대신 오히려 그것을 방해한다. 이러한 옛 말들로는 그어져야 할 전선이 뚜렷이 그어질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런 오염된 말을 하는 다시 꺼내는 정치인으로부터 대중들은, 민초들은 새로운 비전의 욕망이 충족되는 소리를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보를 가로막는 말들은 버려야 한다.

    이런 낡고 오염된 말들을, 태어나 이차 방정식을 처음 배울 적에 처음 들어본 이들, 87년 6월에 이 세상에 태어났던 이들도 이번 대선에 참가한다. 전선을 다른 진영과 명확히 하고, 새 비전을, 전체를 포괄할 비전을, 새로움(Novelty)의 요구를 담아내는, 옛 이데올로기의 새 옷이 필요하다.

    옛 담론을 계승하는 새로운 담론이, 옛 수사법을 대신하는 새로운 수사법이, 옛 정책과 사고를 계승한 새 정책과 사고가, 말의 새로운 얼굴, 이데올로기의 새로운 얼굴이 필요하다.

    열렸던 물음표의 공간은 아직도 완전히 닫히지 않은 채로 열려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미래창조대통합민주신당’이 요청되는 비전을 충분히 제공해주고 있는 것 같지 않기 때문이고, 한나라당은 아무리 새 옷을 입어보았자 이 공간에 들어갈 수 없는 이념적 한계를 지닌 집단이기 때문이다.

    이 물음표의 공간에서 무늬만 새로운 딴나라당, 어쩌구저쩌구민주신당의 옛 얼굴들에 맞서, 전선을 확연히 가르고, 새로운 시대, 새로운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진보와 좌파의 새 얼굴이 필요하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