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형래의 치졸한 애국주의 마케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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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8월 15일 12:4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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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로서의 ‘디워’는 많은 평론가들이 한 목소리로 지적한 바 있듯이, 허술한 스토리 구조와 웃음나올 만큼 엉성한 연기(특히 한국 전설 부분), 괴수영화 특유의 부수고 죽이는 장면이 고성과 함께 버무려진, 특별한 매력이 없는 영화였다. 적어도 나한텐.

    그러나 여름방학이면 단골로 등장하는 많은 괴수영화들이 별다른 매력이 있어서 블록버스터가 된 것은 아니었듯이, 해마다 이맘때면 찾아오는 헐리우드의 SF영화를 즐겨보는 관객이라면 별 거부감 없이 디워를 즐길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그러거나 말거나다.

       
     ▲ 영화 ‘디워’의 한 장면
     

    괴수 영화들 언제는 매력 있었나

    같은 계열의 헐리우드 괴수영화 ‘고질라’도 평론가들의 혹평이 이어졌으나, 관객들은 그런대로 들었고, 비슷한 영화를 우리의 ‘영구’가 수년간의 노력끝에 독자적 CG기술을 개발해서 만들었다고 하니, 적어도 한국 내에서의 흥행 요소가 더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기에 심형래는 안전한 마케팅을 위해 특효 양념을 하나 더 쳤으니 그것은 ‘애국주의’에 대한 자극이었다. 이 무더운 여름을 달구는 재미없고 짜증나는 ‘디워 논쟁’의 핵심은 물론 여기에 있다.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양념에 대한 대중의 반응과, 그 반응에 대한 또 다른 계층의 알레르기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디워 현상’에 대해서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영화 말미에 뜬금없이 아리랑을 흘리며 애국주의에 호소한 감독 심형래와 그 뻔한 마케팅 전략에 넘어가 이 영화를 그냥 재미있게 보고 지나가는 것을 넘어 심형래를 영웅화하는 관객들. 그리고 이들을 비판한 이송희일, 김조광수, 진중권과 이들에게 가해진 네티즌들의 상식을 깨는 폭력적 반응에 대한 얘기다.

    애국주의 마케팅의 치졸한 재탕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늘의 이 현상은 한국사회에서 가장 효과적이고 확실한 마케팅 테마로 떠오른 애국주의의 치졸한 재탕이며, 그 원죄는 한국사회의 성역 ‘월드컵’에 있다는 사실이다.

    조갑제가 2002년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을 열정적으로 외치며 태극기를 온몸에 휘감은 젊은 세대에게서 보았던 ‘싹수’. 이들을 “50대와 연대하여 좌경화된 30대를 압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세대”로 치켜세웠던 예감은 그대로 적중하고 있는 중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월드컵을 한국에서 경험하지 못하고, 2003년에 한국에 와, 월드컵이 이 사회에 남긴 진한 흔적을 목도한 나는 좌우를 막론하고 어딜 가나, 월드컵에 대한 한 가지 평가만이 존재하는 것을 보고 당시 섬뜩한 공포를 느꼈다.

    “억눌려있던 한국인의 신명과 광장 공포를 일거에 해소한 민족의 대축제”로 묘사하는가 하면 한국인의 위대함을 전세계에 알렸다는 둥, 세계를 놀라게 했다는 둥, 지극히 민족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해석과 그에 대한 확신이 월드컵에 실려 있었다.

    어떤 진보적 지식인도 여기에 찬물을 끼얹을 엄두를 내지 못했고 월드컵에 대해서만은 정치적 해석을 유보한 채, 함께 잔치를 즐겼다. 당시 진보진영의 직무유기는 이후 두고두고 그 값을 비싸게 치러야만 하는 위대한 국가주의의 창궐에 불씨를 제공했다는 사실을 이젠 지적할 필요가 있다.

       
     ▲ 영화 ‘디워’의 포스터.
     

    정치적 해석의 성역 ‘월드컵’

    입장을 바꿔서12억 중국인들이 만일 내년 북경올림픽 기간 중에 붉은 옷을 입고, 대륙이 떠나가라 중국을 응원한다면, 그걸 바라보면서 우리는 뭘 느낄 수 있을지.

    중국언론이 중국인의 일치단결한 응원을 통해 중국인의 위대함을 전세계에 전파했다고 보도한다면 우린 그걸 또 어떻게 바라볼지 생각해 보시라.

    세계의 어떤 언론도 그런 일로 한 민족 전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뿐 아니라 찬사를 바칠 일은 더더욱 없으리란 건 상식이 아닌가.

    한국영화로서 두번째 관객 1천만 고지를 밟은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를 보자. 6.25를 소재로 한 이 영화의 주제는 형제애다.

    6.25는 단순히 시대적 배경만을 제공할 뿐이며, 전쟁의 허무와 가족주의를 버무리는 이 영화가, 태극기를 휘날릴 일은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엉뚱한 제목이 달리게 된 이유는 뭐였을까? 강제규필름은 월드컵이 만들어낸 태극기라고 하는 가장 확실한 상표를 이 헐리우드식 웰메이드 영화에 슬쩍 차용한 것이다. 다시 한 번 거국적으로 똘똘 뭉쳐줄 일이 생겨났다는 신호를 보낸, 애국주의 마케팅의 실현이었고, 아시다시피 제대로 적중됐다.

    헐리우드 전쟁 영화에 버금가는 리얼한 전쟁액션이 한국에서도 나왔다고 흥분했던 10~20대들이 천만 관객의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황우석도 자신을 최대의 상품으로 포장하기 위해, 애국주의를 적극 활용해서 추종자군을 조장해냈던 대표적 인물이다. 그의 연구를 위해 기꺼이 난자를 기증했던 여인들은 한반도를 장식하는 한송이의 무궁화로 형상화 되었고, 황우석은 자신의 줄기세포가 민족을 구원할 하늘이 준 기회인 것처럼 묘사했다.

    애국주의 마케팅의 단순 구조

    민족을 구할 영웅으로 각인된 이후, 그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불가능한 금기의 영역으로 들어서면서, 그를 비판적으로 보도한 방송프로그램의 폐쇄 운운하는 사태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지난해 독일 월드컵. 월드컵이 열리기 6개월 전부터 지겹게 애국가를 로고송으로 활용하고 태극기가 남발하는 광고들을 보아야 했던 것도, 태극기란 상표를 기호로 2002년의 뜨겁던 애국주의를 다시 한 번 지펴서, 물건 하나 더 팔아보고자 했던 기업들의 안감힘이었다.

    지난 일년 동안 모든 정부기관을 통해, 평창 동계올림픽의 유치 여부에 민족의 명운이 걸린 것처럼 홍보하던 정부는, 유치가 실패하자, 마치 수많은 인명이 희생된 대형 사고라도 난듯, 전 국민을 오열하게 만들기도 했다.

    애국주의 마케팅은 비교적 단순하다. 태극기, 대한민국, 가능성의 민족, 할 수 있다. 이 몇가지 상투적 단어를 적절히 섞고, 애국가나 아리랑 등을 백뮤직으로 까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그 효과는 만점이다. 적절하게 엮어낼 구실만 있으면, 태극기로 휘두르고 애국가로 심금을 울리기만 하면, 금기와 성역의 영역으로 승천하고, 단박에 비판을 거부하는 성역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반대 목소리의 존재 가능성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는 이 가공할 새로운 마케팅은 간혹 거기에 항거하는 자들이 생길 때, 공포를 느끼게 할 만큼 무섭게 달려들어 공격한다.

    단지 자신의 블로그에서 디워라는 영화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영화사 ‘청년’의 대표 김조광수는 1주일 간 검색어 1위에 오르며 욕설로 뒤벅범된 댓글의 세례 속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네티즌들은 그의 영화사가 제작한 영화들의 불매운동을 일순간 조직했다. PD수첩에 이어 반복되는 경험이지만 학습되지 않는 경험이다.

    100분 토론에 나온 김조광수씨가 디워에 대해 별다른 공박을 하지 않았던 것은 그가 지난 1주일 간 존재가 위협당할 정도의 공포를 겪고 난 뒤였기 때문이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비판적 이성의 날을 갈 수 없을 만큼 정신적 공황을 겪었을 터이다. 눈만 뜨만 인신공격을 하며 달려드는 저 익명의 절대 다수 앞에서 계속해서 목청 높혀 외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히딩크의 귀염둥이, 박지성 보도 행태

    히딩크의 귀염둥이였던 박지성이 어시스트를 하나 기록해도 그를 9시 뉴스와 스포츠뉴스에서 연달아 보아야 하며, 그가 골이라도 넣은 날에는 그를 9시뉴스의 헤드라인에서, 일간지의 1면에서 보도록 만드는 한국의 방송과 언론은 박지성의 성공이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입증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나의 행복인 듯한 등식을 반복해서 우리에게 주입시킨다.

    이렇게 수년간 미디어에 의해 학습된 대중들이 디워의 민족주의 마케팅에 오늘과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디워가 재미있고 없고는 개개인의 사회적, 문화적 경험에 따라서 매우 다르게 나타날 수 있는 주관적 평가다. ‘디워’에 대한 비판을 거부하며 디워와 심형래를 성역화하고, 비판을 가하는 이들을 사이버 테러의 대상으로 삼는 일. 이것은 ‘디워’의 옹호자들이 우리가 최근 몇년간 반복해서 보아왔던 애국주의 마케팅의 포로임을 입증하는 일이다.

    성역과 금기를 부수는 것.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잠시라도 우리가 멈추지 말아야 할 일이다. 오늘 아침에도 버스는 대형 태극기로 뒤덮힌 롯데마트 앞을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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