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짜보다 더 심각한 진짜들의 '학벌숭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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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8월 09일 09:1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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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옥랑 동숭아트센터 대표가 학위 위조 ‘릴레이 기사’로 언론을 장식할 새로운 주자로 걸려들었다. 신정아 가짜 박사 파문 이후, 한달 넘게 장기 흥행이 되는 아이템을 낚은 데 흥분한 언론은 우리의 대단한 ‘학벌사회’를 희롱하는 발칙한 작자들을 발굴, 이들을 굴비엮듯 한 통속 으로 엮어, 독자들의 지속적인 관심을 촉발시키는 데 사력을 다하고 있다.

    대단한 학벌사회를 희롱하는 발칙한 작자들

    굳이 신정아씨와 비교하자면 김옥랑씨는 정반대의 케이스라 할 수 있다. 신정아씨는 석박사 학위가 가짜인 반면, 김옥랑씨는 석박사학위는 진짜이지만, 그 이전 학력이 가짜다.

    물론 그가 나오지도 않은 경기여중고와 이화여대를 나왔다고 한 것은, 그런 학력에 비할 수 없이 치열한 삶을 살아온 사람으로서 할 필요도 없었고 해서도 안되는 부끄러운 행동이며, 비난받아 마땅하다.

    언론은 그녀가 미국 퍼시픽웨스턴대학에서 딴 가짜 학사학위를 이용해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땄다고 전했다. 박사학위를 이용해, 교수직을 얻었다는 표현은 말이 되지만, 학사학위를 이용해서 석박사 학위를 딴다는 게 어법에나 맞는 소린가?

    학사가 아닐지언정 그녀는 성균관대학에서 석박사과정을 밟았고, 논문도 제대로 썼으며, 실력과 경력을 통해 자격을 갖춘 사람이었기에 교수로 임용되었다.

    석사과정을 밟기 위해 학사자격이 필요했고 그래서, 미국 대학의 학사 학위를 사왔다는 그녀의 설명을 들으면 우리는 비난해야 할 대상이 과연 그런 행동을 한 김옥랑이란 개인뿐인지, 25년 가까이 해당 분야에 투신해왔던 사람이 석사과정으로 바로 들어갈 수 없을만큼 대학졸업장을 대단한 것으로 여기는 한국사회가 더 근본적인 모순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할 수 있다.

    대학 졸업장이 그리 대단한가

    김옥랑은 젊은 시절 열성적 연극계 팬으로서, 개인적으로 극단들을 후원해오다, 그것으론 성에 안차, 인형극단 창단, 인형극 잡지 <꼭두극>을 발간하고, 1987년엔 본격적으로 대학로를 대표하는 문화공간인 동숭아트센터를 설립하였다.

    개인적으로 수많은 예술가들을 도와오던 그녀는 예술가 지원을 체계화하고, 지속되는 작업으로 남기기 위해, 91년 옥랑문화재단을 설립, 매년 지속적으로 예술가들의 작업과 해외연수 등을 지원해오기도 했다. 국내 최초의 예술영화전용관 동숭씨네마테크(현 하이퍼텍 나다)를 연 것도 그녀다.

       
      ▲ 김옥랑씨가 세운 한국최초 예술영화 전용관인 동숭씨네마테크 홈페이지.
     

    알려진 대로 그녀는 공연계 마당발이긴 하지만, 누구처럼 뛰어난 화술을 가져서, 인간 관계에 뛰어나서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곤궁한 공연계에 돈많은 재벌가 마나님이 어울리지 않게 뛰어들어 ‘돈지랄’한다는 손가락질도 많이 받았다.

    그런 몰이해 속에서도 25년간 , 밑빠진 독인 공연사업을 지속해 왔고, 최근 들어서는 보다 근본적 작업인 희곡발굴을 위해 희곡상을 제정해서 작가들을 키우며, 비상업적 영역인 다큐멘터리 분야에도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평생 수집해 온 조선시대 나무꼭두들을 모아, 『한국의 나무꼭두』라는 책을 펴내 잊혀진 전통문화 유산의 한 카테고리를 새롭게 열고 목우박물관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문화를 출세의 수단이 아니라 필생의 사명으로 대하는 진지함으로, 그녀가 늘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에 김옥랑은 자연스럽게 문화계 유명인사가 되었던 것이다.

    나이 50이 넘어 굳이 학위를 따야했던 이유

    한마디로 김옥랑은 학벌을 지렛대 삼아 출세를 모색할 필요도 명예를 탐할 필요도 없는 사람이다. 자신의 열정이 움직이는 대로, 주어진 재정적 여력을 송두리째 문화예술에 투여하며 살아왔던, 한국사회에서 그 비근한 예를 찾아보기 힘든 인물이다. 여타의 부자집 마나님들이 문화사업 한답시고, 갤러리등을 운영하며 미술품을 사들여 재테크 수단으로 활용해 왔던 것에 비하면, 그녀는 별종에 가깝다.

    나이 50이 넘어 그녀가 굳이 학위를 따고 교수가 되는 길을 택한 것은 명예나 학벌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엄청난 시행착오를 하며 걸어온 길을 사회적 경험으로 남기고, 그것을 후학들에게 전하고 싶어서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녀의 석박사 논문 모두가 그래서 자신이 설립하고 직접 경영해온 동숭아트센터 경영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김옥랑씨 정도로 문화예술계의 굵직한 경험들을 한몸에 체득한 사람이라면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라도 주었어야 하는 것이 순리라고 본다.

    수십억을 기부한 재벌회장에게 뜬금없이 명예 철학박사학위를 갖다 바치는 대학이, 수십년 경력자가 석사과정에 들어올 때에마저, 학사학위를 요구하게 하는 ‘간판사회’가 오히려 더 부끄러운 우리의 치부가 아닐까.

    학력과 직업경력 상화 호환 제도화 필요

    학력보다 실력을 중시하는 프랑스에서는 직업경력이 학력으로 인정되어, 굳이 석사과정을 마치지 않았어도, 바로 박사과정으로 들어가기도 하는, 학력과 직업경력간의 상호호환이 제도화, 보편화 되어 있다.

    한국대학에서 활발하게 진행 중인 산학협력은 기업에서 필요한 맞춤형인재를 대학에 주문생산해 낼 때만 써먹을게 아니라, 현장에서 길러진 경험을 대학에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데도 상호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하지 않을까.

    학력을 위장한 그녀의 잘못은 명백하지만 이런 일로 그녀가 피땀 흘려 만들어 놓은 모든 사회적 업적조차 “가짜”라는 조롱 아래 폄하된다면, 그녀의 열정 탓에 우리가 나누어 가질 수 있었던 눈부신 문화적 양분이 무색해진다.

    옥랑문화재단 지원을 받아 해외연수를 다녀온 예술가들부터, 95년 우리나라 최초의 예술영화 전용관에서 상영된 <천국보다 낯선>을 보기 위해 동숭씨네마테크에 몰려 들었던 수많은 시네필들까지 우리사회에 그녀에게 정신적인 빚을 진 사람들의 명단은 길다.

    그토록 충만한 열정 갖고, 어느 문화부장관 못지 않은 거대한 실천을 해왔으면서도 굳이 어설픈 중고등학교와 대학교 학력을 만들어내 물의를 빚은 김옥랑씨 역시 어쩔 수 없는 학력사회의 피해자다. 마녀사냥 끝에 그녀가 영영 문화계를 떠나게 된다면, 그녀가 그 동안 쉼없이 뿌려온 씨앗만큼이나, 크나큰 손실을 우리 사회 전체가 입게 될 것이 분명하다.

    학력위조 시리즈로 계속 장사를 해먹고 싶은 언론의 선동에 현혹되어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이까지 버리는 짓을 우리가 지금 하고 있지는 않은지 잠시 되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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