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파와 사회주의 원론에서 해방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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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8월 06일 07:0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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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정한 21세기 혁명, 한국 사회에의 함의

    현실 사회주의 소련, 특히 러시아 혁명 직후의 실험과, ‘일당 독재와 시장 철폐’를 주장하지 않는 21세기 베네수엘라에서의 전혀 정통적이지 않은 사회주의 실험을 비교하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 매우 중요하고 필요하다.

    앞에서 필자는 되도록 신자유주의/반신자유주의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다. 현재의 수많은 모순들이 신자유주의의 문제만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고유의 문제이기도 하며, 동시에 부분적으로는 자본주의가 사라진다고 해도 사라지지 않을 문제들도 산적해 있다.

    중요한 것은 베네수엘라의 사례에서 시장이냐 아니냐의 문제로 정력과 시간을 허비하거나 정반대로 또 다른 환상을 갖는 오류를 반복하지 않으면서, 좌파들이 좋아하는 거대 담론뿐 아니라, 베네수엘라 혁명이 가지고 온 노동 대중의 삶의 변혁이라는 미시적인 부분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마르크스 할아버지가 집권해도 마찬가지

    노무현 정부로 대변되는 일부 개혁 세력이 집권했다고 역사적인 기득권 세력들과 그를 받쳐주는 관료와 언론 등이 공고화시킨 구조를 하루 아침에 무너뜨릴 수는 없다. 같은 논리는 민주노동당이 아니라 마르크스 할아버지가 집권을 해도 마찬가지일 수 밖에 없다.

    진보 진영에서 얘기하는 어떤 것들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공허하고, 고통 속에 신음하는 이들에게는 코웃음만 치게 만들고 있다. 이제는 우리가 국가 차원의 대내외 정책이 민중의 현실과 유리되는 것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사회 곳곳에서 진보를 실천해야 할 시기다.

    일부 진보 단체에서는 비판의식 없이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을 만들고 있다거나, RCTV 방송국 폐쇄에 대해 옹호하고 있다. 물론 <조선일보>보다 훨씬 더 반민중적이고 친미적이며 반동적일 뿐 아니라, 공공연하게 쿠데타를 선동해 왔던 이 방송국에 대해 ‘언론의 자유’라는 권리를 줘야하는지에 대해서 회의적인 시각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느 권위주의 정권도 그랬듯, 처음에는 정당성을 가진 조치였더라도,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내부 관료 세력들 등의 부추김에 의해 필요한 단계 이상으로 나아갈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이유는 타당할지 모르나, 이러한 경향은 필연적으로 과잉적 대처로 나갈 수 있기에 매우 우려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거대 사회주의 집권 정당의 출현 역시 그 타당성에도 불구하고 의심스러운 지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적어도 베네수엘라 사회는 과거 사회주의 소련의 이데올로기인 노동자 계급의 단일한 이익을 추구하는 사회가 아니다. 한 마디로, 토대는 크게 변하지 않은 자본주의 사회인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지긋지긋한’ 무기(?)

    아무리 반동적인 야당이나 반대 세력이라 할지라도 베네수엘라가 과거 소비에트 국가와 동일한 경제, 사회 구성 원리, 즉 시장을 완전히 철폐하고 국가가 사회와 경제의 모든 부분에 관여하는 체제가 아닌 이상(그리고 바로 이 부분이 장점이다), 이익 집단의 이익을 근본적으로 차단하는 이러한 시도는 매우 모순적인 상황을 연출할 수 있다.

    토대와 상부 구조가 극단적인 모순으로 계급 갈등의 폭발 직전에 이른 중국의 상황을 재현할 가능성이 충분한 것이다. 중국은 친미와 공식적인 서구식 자본주의 찬양자들이 존재하지 못하도록 공산당이 막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오랜 기간 미국의 식민지나 다름 없는 상황에서 자국 내 친미적 자본가들이 아직도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베네수엘라에서는 그 ‘지긋지긋한’ 민주주의라는 무기를 가지고 달려드는 서구 국가들과 자본들, 심지어는 계급적 관점을 상실한 국제 인권 단체들의 협공에 위기를 맞이할 수도 있는 것이다.

    현재 사회주의적 실험들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차베스가 거대한 사회주의 정당의 통합을 추구하는 것은 우려스런 대목이다. 시장의 존재 여부와는 별도로 거대한 여당의 존재는 관료 조직의 부패와 비효율성을 필연적으로 가져올 수 밖에 없다.

    차베스 없이 지속되는 혁명 정당 운운하며 노동 대중을 동원하는 것도 걱정스럽고, 이와는 정반대로 연임 제한 철폐 개헌 시도는, 아무리 제국주의로부터의 침략 방어, 사회주의 혁명의 부단한 지속 등과 같은 타당한 이유가 있더라도 정당화되기 힘든 주장이다.

       
      ▲ 21세기 사회주의 이념과 극단적으로 반대되는 국가주의적, 파시즘적, 봉건적 이념을 추구하고 있는 정치 집단들과 연대는 모순. 사진은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왼쪽)과 차베스.(사진=뉴시스)
     

    또 비록 현재 미국과 서방의 공격적인 행보에 대항하기 위해 러시아-중국-이란 등과 정치 경제 군사적 동맹을 맺을 수 밖에 없지만, 차베스와 21세기 사회주의 베네수엘라의 이념과 극단적으로 반대되는 국가주의적, 파시즘적, 봉건적 이념을 추구하고 있는 정치 집단들과 연대를 하고 있는 모순적 행보는 피억압 민중들로 하여금 차베스의 혁명의 진정성에 대한 의심을 하게 만들고 있다.

    차베스 외교의 모순들

    주권 수호를 위해 무기 구입은 불가피할지 모르지만 자신의 이념과 반대되는 국가들의 입지를 강화시켜 주는 대규모 무기 구입은 유연함과는 거리가 멀다.

    아무리 정파적 접근과 집권세력의 접근이 다르다 할지라도 독재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벨로루시 대통령과 연대하고, 인권, 여성, 소수자, 민주주의에 대한 기본적 개념도 안 갖추어져 있는 현 러시아 지배자들, 공산당, 그리고 심지어는 파시스트 우익 정당 등과 한 자리에서 미국에 반대한다는 이름 하나로 연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서구에서 일반화된 일반 민주주의론을 들이대며 그 기준에 따라 평가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누구보다 비판 정신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할 한국 좌파들, 그 중에서도 베네수엘라 등지에서의 실험을 연구하고, 그 실험이 실패로 끝나지 말기를 고대하는 좌파들이 이러한 문제점들에 대해 비판을 포기하고, 베네수엘라에서 나오는 정보를 그대로 전달하고 있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논의에서 빠진 부분, 빠져서는 안 되는 것들

    베네수엘라 혁명에 대한 수많은 고민과 분석들 중 빠진 부분이 있다. 바로 젠더 문제, 여성에 대한 문제들이다. 대표적인 것이 중남미에서 이중적 착취와 타 지역으로 송출되어 더 가혹한 수탈을 당하는 여성 문제, 특히 성산업에 종사하는 여성의 문제에 대한 것이 그것이다.

    과거의 혁명가들에게 이들의 운명은 혁명 주력도 아닐 뿐더러 오히려 그를 방해하는 룸펜으로 규정될 뿐이었다. 따라서 자주 무시된 건 당연한 결과다. 그러나 이제 21세기의 진정한 혁명은 이러한 부분을 근본부터 줄여나가는 것까지도 포함해야 한다.

    예를 들자. 한국 사회에서도 신자유주의가 화두가 되기 이전 이미 신자유주의 문제와 별도 혹은 무관하게 심각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불안정 고용, 비정규직 문제로만 한정하더라도 여성 노동권이나 여성의 빈곤화 등에 대한 논의는 있었지만, GDP 중 농림수산업이 전체가 차지하는 부분에 육박하는 직간접적 성산업에 종사하는 150만에 달하는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150만 성산업 종사자에 대해 왜 침묵하나

    이주 노동자들의 심각한 인권 침해 등에 대한 논의는 있지만, 이들 중 심각한 이중적 착취를 당하는 여성 이주 노동자 혹은 노동자에서 성매매 여성으로 변화할 수 밖에 없는 이들에 대한 논의는 진보의 관심에서 멀다.

    사회적 공헌 등으로 자위하는 기업의 뒤에서 일상화되어 있는 성접대 문화 등에서 무한정으로 성 산업으로 들어가는 자금이 복지 분야로 전환되도록 하는 것은 남성들의 저항 정도로 볼 때 그 어느 사회 혁명 못지 않을 것이다.

    대졸 사무직 노동자들은 이러한 구조가 복지를 대신하여 불만을 잠재우는 것으로 인식하여 사회적, 계급적 연대는커녕 가혹한 노동의 보상으로 착각하고, 법인 카드로 흥청망청하고 있고, 사회 변혁의 주력인 산업 노동자들의 공간인 공단 주변 역시 수백, 수천 개의 직간접적 성매매 업소들로 가득 차 있다.

    고된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은 상대적 고소득을 보장하는 이러한 구조로 스스로 빠져 들고 있다. 노동 운동의 위기를 이야기하지만, 토대가 이러할진대 무슨 진보의 동력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전투적 노동조합의 노조원들조차 일상에 있어 이러한 구조에서 자유롭지 못함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들은 필자가 체류하고 있는 러시아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노동자의 복지와 현지 사회 환원으로 들어갈 막대한 자금을 성접대로 흥청망청 쓰고 있다. 비정규직과 저임금 노동, 사회 양극화를 해결하는 근본 해결책은 아니지만, 기업가들과 가진 자들의 공식적 성 산업 지출 자금 차단과 그 비용의 복지 환원만으로도 만들고 많은 것을 얻어 낼 수 있다.

    기업의 성접대비 사회 환수부터 시작해서 스웨덴이나 베네수엘라가 하듯 기업 이익의 실질적 사회 환원 운동을 전개한다면, 이는 기업만이 아니라 노동 대중의 삶과 사고에도 어마어마한 변화를 가져 올 것이다.

    21세기의 진보는 좀 달라져야 한다. 이제 지배자들-가진 자들-범죄 구조의 연결 고리를 끊을 진짜 힘든 혁명을 하자. 기존의 투쟁들도 중요하지만, 일 터지고 난 후의 반대 투쟁만 하지 말고 먼저 공격하고 대안을 제시하자. 진보의 상상력으로 사회 변혁을 선점하자.

    진보적 상상력으로 사회변혁을 선점

    자본주의를 쉽게 철폐하지 못 한다면, 그 자체의 횡포와 그로부터 발생된 기득권력을 생활 곳곳에서 하나하나씩 깨 나가는 것도 진보이다. 부유세, 무상 의료, 무상 교육 등 기존의 운동들을 세련화하는 것은 물론이요, 재벌들의 기업 지배 구조 개선이나 조세 평등 문제와 부동산 불평등 문제 등 더욱 구체화해야 할 사안들도 많다.

    비정규직은 대한민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OECD 국가들 중 자영업 종사자 인구 비율은 우리 나라가 최고 수준이다. 일부 전문 고소득 자영업과 대부분의 영세 자영업 간의 소득 격차는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일년에 수십만 개의 점포가 생기지만, 비슷한 숫자의 점포가 문을 닫는다. 이들은 성공해서 이동하는 것일까?

    반면, 공공적인 사회 서비스업에 고용된 대한민국 인구는 이들 국가들 중 최하위에 속한다. 더욱 공포스러운 것은 자영업과 지나치게 과다한 개인서비스업 중 가장 이익이 많이 남는 분야이며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영역이란 바로 여성을 파는 각종 성매매 업소들이라는 것이다.

    민주노동당 등 진보 진영은 이제 내용없는 선험적 선긋기나 관념적 권력 획득에 대한 논의보다 장기적으로 민중 생활의 곳곳에서 진보가 진지를 구축하고 또아리를 트는 작업을 해나가야 한다. 이것이야 말로 진보 진영이 집권한 후에도 그 정책을 밀고 나갈 수 있는 토대이다. 그야말로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더 이상 무협지를 읽는 듯한 정파 싸움에 대한 과도한 관심을 끊고, 사회주의 원론에서 허덕이지 말아야 한다. 관념적 논쟁이나 비정규직, 한미 FTA 등과 같은 정세 주도적 혹은 거시적 과제에서 배제된 사회 계급과 집단의 고통에 대해서 이제는 본격적으로 논의를 하고 즉각적으로 실천으로 옮겨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21세기 사회 혁명이다. 베네수엘라의 실험에서 취할 건 취하고, 버릴 건 버리자. 그리고 우리 실정에 맞는 21세기 한국 혁명을 쟁취하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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