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폭력의 세기, 노-공화주의, 권-인간의 조건
    2007년 08월 06일 12:2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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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계속되는 더위 속에서 일상의 고단함에 지쳐있는 국민에게, 비정규직 강제해고와 비정규직 노조에 대한 탄압 그리고 탈레반 인질사태의 장기화는 걱정을 더해주고 있다.

7월 말부터 본격적인 여름 휴가가 시작되었다. 시민들은 휴가를 통해 일상의 지침과 정치의 식상함을 잠시나마 잊고 웰빙(well-being)적 삶을 즐길 것이다. 원래 웰빙의 의미는 단순히 친환경적인 음식을 먹으며 마음의 여유와 자유를 갖는 삶만을 의미하지 않고, 공동체에 참여하며 자신의 자아와 개성을 적극 표현하고 드러내는 정치적인 삶의 멋과 여유까지를 포함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일상의 고단함과 정치의 식상함은 웰빙의 의미를 ‘잘 먹는 문제’로만 제한하고 있다.

좋은 정치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올 여름 일정도 바쁘겠지만, 민주노동당 대권후보들에게 다음의 책을 추천하고 싶다.

심상정 후보, 한나 아렌트의 『폭력의 세기』

이 책은 한나 아렌트의 저작으로, 그가 살았던 ‘폭력의 세기’에 대한 성찰이다. 레닌의 폭력혁명이라는 용어에서 출발하여 혁명의 수단으로 폭력이 정당화되는 데 익숙한 사람들에게 그리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폭력’의 의미와 ‘권력’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특히, 권력과 폭력의 차이, 다시 말해서 권력이 폭력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한 것인가를 이해하는 데 탁월하다.

아렌트는, ‘폭력’은 강제적인 힘을 이용하여 타인을 제압하여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것이지만(그런 점에서 ‘폭력’을 ‘강권’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권력’은 사람들의 공동행동과 상호적 동의/지지 속에서 형성된 힘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아렌트는 “폭력의 대립물은 결코 비폭력이 아니라 권력”이라고 말한다.

폭력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고 목적을 통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라면, 권력(power)은 폭력(violence)과 다르게 행위(action)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곳에서, 즉 사람들이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에서 발생하므로, 권력은 개인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말과 행위를 통해 함께 공통감각(common sense)을 형성할 때, 생겨나는 잠재적인 약속의 힘이라는 점에서 그 자체가 이미 정당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권력이 폭력을 사용할 때, 그 권력은 자신의 손에서 빠져나가는 권력을 폭력 수단으로 필사적으로 만회하려는 불가능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을 뿐이라는 점에서, 폭력을 사용하는 권력은 이미 권력이 아니며, 아무런 정당성도 없다고 해석할 수 있다. 심상정 후보에게 이 책을 권하는 이유는 소통이 부족한 신념이 폭력을 부를 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노회찬 후보, 모리치오 비롤리의 『공화주의』

전 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이른바 ‘신자유주의’는 ‘자유’라는 단어를 규제, 법, 정부와 대립시키면서 ‘자유’의 대변자를 자처하고 있다. 이제 법과 정부는 무능과 억압을 상징하는 것처럼 조롱받고 있는 것이 우리네 실정이다. 하지만 이탈리아 출신 정치사상가인 모리치오 비롤리(Maurizio Viroli)는 단호하게 “그러한 자유는 가짜”라고 말한다. 그는 법의 개입 없이 진정한 자유가 가능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법의 도움이 없다면 힘 센 자들은 약한 자들을 노예처럼, 종처럼 만들려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노회찬 후보에게 추천하는 이유는 민주화 이후 요구되는 새로운 민주주의와 국가상에 대한 비전 제시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특히 민주화 이후 요구되는 국민통합과 국가통합을 위해 어떠한 조건이 필요한 것인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공화주의(republicanism)는 res publica에서 나온 말이다. 비롤리(Viroli)는 res publica란 ‘인민의 일’이며, 그 인민들이란 “아무렇게나 모인 일군의 사람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와 공동의 이익을 인정하고 동의한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공동의 공적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인민들의 공적 공간을 의미하는 res publica는 지배자와 권력자의 사적 지배의 공간으로서 res privata에 대비된다.

전자가 자유, 평등 그리고 공공선을 유지하는 법치의 질서를 꾀하는 공화정의 기반이라면, 후자는 주종적 지배관계(domination) 속에서 권력의 독점과 사적인 이해관계만을 추구하는 폭군정과 독재를 만들어내게 된다. 권력의 행사자가 일인(一人)이든 소수이든 혹은 다수이든 간에 권력의 독점과 전일적 지배를 반대하는 공화주의의 정치체제는 혼합정(mixed constitution)을 나타낸다. 다양한 공동체 구성원 간의 참여와 그들 간의 견제와 균형을 통해 권력의 독점을 막는 것이 혼합정의 목표이다.

권영길 후보,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

‘제2의 로자 룩셈부르크’ 혹은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정치철학자’로 불리는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2006년도에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국내에 많이 소개되었다. 그는 히틀러와 독일국가사회주의노동당이 주도하는 전체주의 사회 건설과정에서 나타나는 유태인 학살의 한 희생양으로서 망명과 미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자신의 외톨박이적 삶과 비극적 운명을 ‘정치공동체와 정치의 재구성’과 ‘정치적 실존으로서 인간됨의 부활’을 통해 승화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이 책을 권영길 후보에게 추천하는 이유는 대통령 예비후보로서 요구되는 리더쉽을 발견하고 보완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고대 폴리스 시민들의 정치적인 삶의 모습을 재발견하고, 생생하게 되살려내 그동안 우리가 현대의 이해관계와 물질주의적 가치 그리고 대립과 갈등 속에서 상실하였던 진정으로 인간적인 삶의 방식을 복원해야 함을 일깨우고 있다.

동시에 지금까지 정치를 정치엘리트에게 맡기고 자신은 방관자적 태도로 일관해왔던 시민들에게 대오각성의 기회를 제공하며, 자신의 말과 행위를 통해 개성(individual identity)을 적극 드러낼 것을 주문하고 있다.

아렌트는 말(speech)과 행위(action)를 통해서 타인들과의 정치적 공존을 추진하면서 폴리스라는 정치적 공동체를 창설하려 했던 고대 시민들의 삶과 ‘지금-여기(now and here)’에 있는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 매우 대조적인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아렌트의 정치사상이 추구하는 근본 주제는 동등한 시민들이 말과 행위라는 정치행위를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자유롭게 의사소통하고 공통감각(common sense)을 모아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공적영역(public realm)의 창출에 관한 것이다.

모든 후보에게, 버나드 마넹의 『선거는 민주적인가』

버나드 마넹은 선거가 과연 민주적인 것인지, 또한 정당과 의회가 과연 민주적인 것인지, 그리고 민주적일 수 있을지를 근본적으로 의심하며 회의한다. 특히, 그는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사회주의 하에서도 선거가 계속되는 한 인민들 간의 실질적인 정치적 평등 대신에 새로운 지배엘리트의 교체만 계속되고 아울러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정당들이 필연적으로 소수의 엘리트들이 지배하는 과두제의 철칙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라는 비관론을 피고 있다.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는 버너드 마넹의 이같은 지적에서 우리가 과연 자유로울 수 있는지 성찰해보고 대안을 고민해보자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추첨제를 하지도 않고, 선거제도로만 하면서도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대의제 민주주의는 ‘선거로 포장된 일종의 귀족정’이다.

근본적으로 ‘가능성의 평등’과 ‘유사성의 원칙’을 갖고 있는 ‘추점제도’와 비교해 볼 때, ‘귀족주의적인 탁월성의 원칙’을 갖고 있는 ‘선거제’를 기초로 하는 대의제 민주주의는 “사회적 신분이나 생활방식, 그리고 교육에 따라 시민들과는 구분되는 소위 엘리트의 통치로 남아있다.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현실은 단지 ‘새로운 엘리트의 부상과 다른 엘리트의 퇴조’ 일뿐”이다.

그는 정당과 정당에 의한 민주주의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근대 대의제는 초기에 고대의 민주정과 공화정을 적절히 혼합한 ‘의회정치’에서 ‘탁월한 대표자’를 뽑자는 원칙이 있어 그나마 ‘최소한적’으로 민주주의 정신에 반응하였는데,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등장한 대중정당 모델에 따른 대의형태와 이것의 필연적 귀결인, 탁월한 대표자를 인기영합적이고 선거공학적인 선거기능인으로 변질시키는 ‘선거전문가 정당’의 등장이 대의제의 ‘탁월성의 원칙’마저 훼손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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