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통일 대전제는 언제나 민주주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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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8월 02일 11:2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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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올라간 자유의 서울, 2007년 7월 19일 아침 우이동에는 비가 쏟아졌다. 비 탓인가? 서라벌 중학교 앞 골목은 예상과 달리 한산했다. 이제 독립 유공자로 인정도 받았는데, 수천 명이 참석하고 대통령 후보들은 거의 다 오지 않을까? 촌놈의 예상은 빗나가고 ‘몽양 여운형 선생 60주기 추모식’의 조촐함이 민망했다.

    오후에 신문로 서울역사박물관 강당에서 열린 ‘몽양추모 학술심포지움’에서 펜실베니아 대학교의 이정식 교수는 여운형은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알고 대화를 좋아하고 남에게서 배우는 것을 즐기는 열린 사람”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여운형은 ‘비한국적인 사람’이거나 ‘너무나 앞선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여운형은 대화와 타협을 통해 통일국가를 만들기 위해 마지막까지 노력했다. 신탁통치에 대해서도 신중한 태도를 취했으며 미소공동위원회에 대해 기대를 걸기도 하고 좌우합작을 추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불행하게도 홉스봄이 말하는 ‘극단의 시대’를 살았다. 이런 시대에 맞는 사람은 이승만 같이 독선적인 사람이었다.

       
      ▲ 1946년 11월 남조선노동당 결성식에서 대화하고 있는 여운형(오른쪽)과 박헌영
     

    가상 통일 조국의 아버지 여운형은 사회민주주의자

    이승만의 입장에서 그는 부담스러웠다. 자주 인용되는 우익 경향의 잡지 <선구> 1945년 12월 호에 발표된 여론조사 – 아마 요즘처럼 발달한 과학적 방법으로 한 여론조사는 아니었겠지만 – 에서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 지도자”로 여운형 33%, 이승만 21%, 김구 17%, 박헌영 15%, 김일성 8% 등 순이었다고 한다.

    여론조사가 신뢰하기 곤란하다면 당시에 좌우를 아우르고 모든 독립운동 세력과 건국 역량을 포괄하여 새로운 통일 정부를 세우고 독립 국가를 만든다면 중도 좌파를 중심으로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이외 무슨 다른 방법이 있었겠는가를 생각해보라. 여론 조사 결과는 그런 민중의 현명한 판단의 일단일 뿐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만약 미소공동위원회가 성공하여 남북한에 걸쳐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민주적 선거를 실시했다면 여운형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는 가상의, 미래의, 꿈속의 통일 조국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좌우 대립과 분단을 넘어선 곳에 우뚝 서있다.

    우익들은 4.19 혁명으로 쫓겨난 독재자 이승만을 존경할 수 없으니 김구 선생을 존경한다고 말한다. 좌파들은 김일성을 존경하다가 실망하고 박헌영에, 혹은 이현상이나 이재유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나 엄연히 남한의 국부(國父)는 이승만이다. 북한의 국부는 김일성이다. 그러나 그들은 통일 조국의 국부일 수는 없다.

    평화 통일의 대전제는 언제나 민주주의였다

    공산당 또는 조선로동당의 관점에서 보면 여운형은 기회주의자였지만 조봉암은 배신자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공통점이 있었으니 “선거를 하자”는 주의였다. 민주주의자로서 신념이 남달랐고 민중에 대한 믿음이 깊었다. 좌든 우든 선거로서 민중이 선택하면 될 일이라는 생각이었다. 그 점에서 그들은 철저한 민주주의자였다.

    여운형은 1945년 10월 1일 신문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인공’을 붉다고 보는데?”라는 질문에 답하여 말했다.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오늘날 민주주의의 조선을 건설하는데 대체 공산주의자를 배제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 다 같이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면 그만이 아니냐. 많고 적은 것은 결국 인민투표로 결정할 것이다.”

    여운형은 선거를 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선거를 하면 승리할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선거를 해서 대중의 심판을 받을 기회를 갖지 못했다. 대신에 조봉암은 부지런히 선거에 참여했다. 국회의원 선거에 두 번, 대통령 선거에 두 번이나 출마했다.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참여, 인천에서 당선되면서 새출발할 수 있었다.

    조봉암은 공산당을 탈당한 후에 여운형과 함께 일을 하진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조봉암을 여운형 노선의 계승자라고 볼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선거를 하자”는 주의였고 민주주의를 정치의 대전제로 했으며 대중에게 직접 호소하는 정치를 한 점이다. 그를 죽음으로 내몬 평화통일론도 결국 전쟁하지 말고 선거하자는 주장이다.

    이제 남한의 준비는 거의 끝나가고 있다

    조봉암은 내가 태어난 1954년에 쓴 책 <우리의 당면 과업>에서 “‘런던 공원’에서 하루도 쉬는 일이 없이 ‘푸로파간다’를 계속하고 있는 영국의 공산당은 선거전에서 하등의 구속과 제제를 받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의회의 한 자리조차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주목할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전쟁 직후 당시에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였지만 이제는 아니다. 남한은 1987년 6월 시민혁명 이후의 민주화로 평화 통일의 준비가 많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공산당을 비롯한 모든 정치세력들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할 날이 멀지 않았다. 1997년 이후 중도 좌파 정치의 부활도 이루어졌다.

    7월 21일, 나도 회원인 ‘사회민주주의를 위한 자율과 연대’가 총회를 열어 <민주노동당 사회민주주의자 선언>을 채택, “통일된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정관매진했던 여운형의 정신과 토지개혁을 주도하고 대한민국이란 나라를 긍정하고 그 속에서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조봉암의 노선을” 잇는다고 선언했다.

    김대중의 햇볕정책이 대단한 진보적인 정책인 양 되어 있는 웃기지 않는 현실도 바뀌고 있다. 정형근이 앞장서서 한나라당의 대북정책을 바꿈은 진작 예견되었던 바다. 자본가 계급의 주류의 이해관계를 정확하게 대변하지 않는 보수 정당이 집권을 할 수 있겠는가? 이회창이 집권을 못한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평화 통일의 준비는 북한도 서둘러야 한다

    이제 북한의 준비가 문제다. 법륜 스님이 이끄는 북한 지원단체 ‘좋은 벗들’이 전하는 북한 소식들은 심각하다. 북한의 민주화는 요원한 일로 보인다. 인민의 입장에서 사물을 바라보면 북한의 현재 상황은 민주주의의 절대적 결핍 바로 그것이다. 식량 부족과 아사자 발생도 궁극적으로는 민주주의의 결핍으로부터 온 것이다.

    아마티아 센이 저서 <자유로서의 발전>에 쓰기를 “기근은 민주주의 체제 속에서는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비록 독재 국가보다 더 가난한 나라들이라 할지라도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기근은 없었다고 한다. 80년대 초반, 수단과 에티오피아가 극심한 기근을 겪은 반면 보츠와나와 짐바브웨는 전혀 기근을 겪지 않았다.

    그 당시 식량의 생산의 감소는 수단과 에티오피아보다 보츠와나와 짐바브웨가 더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원인에 대해 말하기를 “독재 정권은 야당의 부재와 언론 통제로 기근에 대하여 어떠한 정치적 비판도 받지 않는다. 즉 정치적 면죄부를 받아 기근의 원인을 자연 재해나 다른 나라의 배신행위 등으로 돌리기 쉽다.”

    ‘좋은 벗들’이 발간하는 <오늘의 북한소식>은 최근 다시 아사자가 발생하고 있다고 전한다. “지난 6월말부터 전국 각 도, 시, 군 등에서 아사자가 발생하고 있다. 함경남북도의 경우 시, 군마다 하루 평균 10명 안팎의 사람들이 기아로 죽어가고 있다” 전전 세대 공산주의자들은 민주주의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지 못했다.

       
      ▲ 7월 31일, 조봉암 48주기를 맞이하여 민주노동
    당 당원 모임, ‘사회민주주의를 위한 자율과 연대’
    회원들이 선생의 묘소에 바친 꽃바구니.

    조봉암을 찾아가는 데 15년이나 걸렸다

    조봉암은 1946년 6월 23일 각 신문에 ‘공산당과 그 지도 아래 있는 모든 정치 활동을 부인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공산주의와의 결별을 선언한다.

    그는 성명에서 “우리는 노동계급의 독재나 자본가 계급의 전제를 반대한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그는 공산당과 완전히 결별하게 된다. 그는 공산당의 배신자가 된 것이다.

    정치가는 ‘배신’을 정확하게 잘 해야만 한다는 걸 알기까지 조봉암을 찾지 못했다. 나는 2007년 7월 21일, 난생 처음으로 망우리 공동묘지를 찾았다. 그리고 조봉암의 묘 앞에 고개를 숙여 용서를 빌었다. 나보다 46년 앞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반대한 사람. 정치 사상적 아버지 같은 분을 이제야 찾아 인사드린 것이다.

    ‘사회민주주의를 위한 자율과 연대’ 회원 다섯 사람과 함께 7월 31일 아침 6시 망우리 묘소에서 가진 조촐한 추모식에서 나는 추모사를 낭독했다. “선생님은 좌고우면하지 않았으며, 용기 있게 행동했으며 외로움을 인내하셨습니다.” 용기 없는 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부인해 놓고도 조봉암 선생을 찾는데 15년이나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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