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통 무가로 재현한 신자유주의 잔혹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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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7월 28일 12:2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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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석영의 신작 장편소설 『바리데기』는 몇 가지를 깊게 고민케 만드는 소설이다. 읽고, 그 읽었다는 사실만으로 그 수명이 다하는 혹은 소비되는 여타의 소설과는 다르다는 말이다.

       
     

    여담이지만, 나는 한국소설 특히 젊은 작가들이 못마땅하다. 그들은 대개가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과 신기한 이야기들을 내세운다. 개인에게 개인적인 것은 우주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 우주는 때로는 얼마나 하찮은가! 아마 그들을 다 그러모아야만 그때 비로소 우리 시대의 풍경을 어렴풋하게나마 그려볼 수 있으리라.

    그들은 그렇게 저 사실주의 풍속화의 대가인 발작Balzac 소설의 한 페이지를 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난쟁이들에 불과하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안타까운 것은 그럼에도 그들은 마치 프루스트Proust가 자신들의 아비인 것처럼 행세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발작의 이상한 난쟁이 사생아들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황석영은 단연 두드러진다. 황석영은 그 자체로, 좋으나 싫으나, 하나의 문학 풍경이다. 황석영은 이번 작품을 이미 발표된 『손님』 『심청, 연꽃의 길』(이 작품은 최근 개정판이 나왔다)의 연장선상에 놓인 “우리네 형식과 서사에 현재의 세계가 마주친 현실을 담아낸 작업”(p.295)이라고 말한다. “과연 어떻게?”라는 질문이 독후감의 첫 번째 몫이다.

    소설 『바리데기』는 크게 민중적 연희 양식의 한 틀로 분류되는 무가를 차용한다. 그 무가의 형식은 이곳과 저곳, 이승과 저승, 원한과 해원, 단절과 연속, 현실과 환상 등의 절대적 대립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그 넘나드는 것 자체를 자신의 고유한 형식으로 삼는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소설 『바리데기』는 그 같은 무가의 안과 밖을 적극적으로 차용한다. 황석영은 소설의 주인공으로 무가의 대표적 인물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바리데기를 직접적으로 호명한다.

    바리데기는 죽은 부모를 살리기 위해 지옥으로 가서 생명수를 찾아온 인물. 죽은 자를 천도하는 능력을 지녔고 그래서 자연스레 무당의 원형인 동시에 소통의 상징, 고통의 치유사로 의미된다. 소설의 주인공 ‘바리’는 그 바리데기의 거의 완전한 현대판 버전인 셈이다.

    작가는 북한의 기근과 중국으로의 탈출 이윽고는 영국 불법체류에 이르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통해 현대판 지옥도를 그녀의 몸과 마음에 새긴다. 동시에 그 같은 지옥도의 삶이 비단 북한과 북한의 한 민중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 민중 보편의 삶이라는 것 또한 각인시키고자 한다.

    21세기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주의 세계화에 따른 이슬람과의 극한 대립,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디아스포라(이산 혹은 이주)의 문제가 자연스레 중첩되고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 바리는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이곳과 저곳, 삶과 죽음 등을 넘나들며 소통한다.

    이때의 소통은 바리 자신을 치유하는 것은 물론 세상의 온갖 아픔들을 겨냥하는 소통이다. 그리고 그 소통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픈 모든 자를 치유할 수 있는 생명수를 얻고자 하는 함이다.

    다음, 그런 의도에 따른 소설의 완성도 혹은 재미는 어떻게 느껴야만 하는 것일까? 어떤 의미에서 소설 『바리데기』에는 ‘드라마’가 없다. 작가가 상상 속에서 의도적으로 꾸며낸 곧 가식적인 허구가 소설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실제로 벌어진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여러 사건들의 연쇄가 압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건의 연쇄 자체도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참으로 벅찬 지경이다. 동포의 굶주림을 지켜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어느덧 국경과 인종이 없어지고, 고통 받는 모든 삶이 하나의 삶 속으로 수렴되는 그 풍경은 아마도 한국문학이 가닿은 문학적 풍경 가운데 가장 큰 풍경 중의 하나라고 말해도 큰 무리는 없으리라.

    그러나 아쉬움이 어디 없으리오. 좀 지나친 상상이 될 수도 있겠지만, 만약 『바리데기』 2권이 나온다면 그 둘째 권에 담길 사건들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만 같다. 그 점과 연관시켜 생각해보자면, 작가 역시 또 다른 의미에서 바리데기가 될 수는 없는 것일까?

    작가와 작가의 사건과는 다르게 독자들은 나름대로 작품을 상상하고 싶어한다. 그것은 독자의 몫이자 당연한 권리이다. 『바리데기』에서 차용된 무가의 형식이 일련의 사건들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는 반면 오로지 그 일관성만을 쫓도록 강요하는 족쇄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한마디로 독자들 스스로 뛰어놀 공간이 없다는 것이다.

    영화로 치자면 소설 『바리데기』는 딮포커스deep focus가 아니라 소프트포커스soft focus다. 딮포커스가 렌즈 안에 담긴 현실을 그대로 투영해준다면 소프트포커스는 렌즈의 주인이 담고자 하는 시각 정보만을 걸러서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딮포커스는 열린 체계이고 열린 눈이다. 바리데기와 바리가 모든 갈등과 대립을 넘어서고자 분투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 그 자체도 하나의 스펙타클이지만 독자들이 그 과정에 참여하는 것 역시 그 못지않은 스펙타클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일련의 사건들에 내용과 형식면에서 세계사적인 맥락을 부여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는 충분히 달성됐지만, 독자들은 작품이 지속되는 동안 내내 오로지 작가의 의도에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작가와 독자, 작품과 독자라는 이 원초적 이항대립을 넘어서는 바리데기로서의 작가의 분투를 보고 싶다는 것이다.

    대리만족으로서의 카타르시스라는 일반적 소설의 정의하고는 또 다른 형식의 카타르시스를 기대하고 싶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황석영이 던진 질문이자 또한 우리가 독자로서 답할 질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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