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공공체제론 환영하나 비판할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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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7월 27일 08:5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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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로그

    심상정 후보의 “사회공공체제론” 발표를 환영합니다. 현 시기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는 것은 훗날의 심화 혹은 반성을 위해 필수적인 일입니다. 또한 책임감을 소중히 여겨야 할 정치가의 당연한 의무이기도 합니다.

    다만 좀 더 성찰적으로 접근해야 할 주제들이 선언적으로 담겨 있어서 걱정스럽습니다. 무엇보다도 사회공공체제를 추진할 정치적 힘의 형성에 대해서는 쉽게 간과하고 있는 것이 큰 결함입니다.

    민주주의

    “심후보가 발표한 사회공공체제는 사회주의를 지향하고, 사회주의의 지속가능성’을 검증하는 이행기체제로서의 위상을 가지며, 시장의 이윤극대화를 극복하고 사회적 연대를 추구하는 목표를 갖는다.” – 심상정 홈페이지에서

    “현실”이든 “현존”이든 혹은 “역사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간에 그 사회주의는 권위주의, 감시체제, 위계질서 등으로 민주주의의 숨통을 죄었고 자유를 가두었습니다. 소련에서 열대 쿠바까지 모두가 예외 없이 권위주의적인 정치체제를 구축했습니다. 사회민주주의도 국가에 대한 과도한 믿음에 기반하여 “개인의 자유”에 일정한 제약을 가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제가 국가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차이에 대해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사회민주주의가 이룬 성취에 대해 폄하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는 이미 자신이 내건 모두 목표를 이루었으며 더 이상의 성취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게다가 바야흐로 진행되고 있는 세계화 속에서 민족국가를 단위로 하는 이 모델 자체가 커다란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제가 강조하려는 것은 국가사회주의든 사회민주주의든 양자의 정치에는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바로 기존 사회주의 사상에 내장된 근본적인 문제가 드러난 것입니다.

    정치사상을 근본적으로 사회경제적 계급구조를 반영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한 특정 계급을 대변한다는 다양한 정치적 견해의 차이가 무시되며 그 결과 특정 시기의 패권적인 정파가 다른 정파들의 견해를 “타 계급의 사상”이라고 낙인 찍고 그들을 배제하는 것에서부터 숙청 혹은 처형하는 것까지 다양한 억압행위를 저지를 가능성이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그 같은 일은 우리가 사회주의 역사에서 수없이 봐 온 일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이른바 신 사회운동의 주요 주제인 여성주의, 녹색정치는 계급과 관계를 맺고 있지만 계급으로 환원되지 않는 고유의 정치적 공간이 존재하며 그 같은 가치를 좌파 진영이 수용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분명히 하지 않고 있는 것도 문제입니다.

    여성주의와 녹색정치를 좌파가 수용한다는 것은 계급중심의 사고방식을 교정하는 것을 의미하며 노동자계급 내에 뿌리 박혀 있는 남성우월주의적 권위주의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며 녹색정치를 수용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성장과 분배의 현재 시스템이 자연착취를 기반으로 한다는 문제의식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그 동안 노동자계급이 환경파괴의 공범으로 존재해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성주의의 경우엔 이민노동자는 물론이고 “새터민”이라 불리는 탈북 동포를 비롯한 여러 사회집단들, 이른바 불평등한 계급구조로 환원되지 않는 고유한 사회문화적 차이를 갖고 있는 사회집단에 대해 좌파의 대응이 얼마나 폭넓고 다양해져야 하는 지를 근본적으로 문제 제기하는 것입니다.

    또한 녹색정치의 경우엔 하나의 독자적인 정치사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것으로서 자본주의는 물론이고 산업주의 자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생산과 분배의 선 순환이라는 문제의식에 갇혀 있는 심상정 후보의 사회공공체제와는 근본적인 긴장을 유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성주의와 녹색정치의 가치를 받아 안겠다고 천명하는 것은 쉬울 지 모르지만 그것이 기존 좌파의 문제의식에 던지는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구체적인 정치프로그램으로 발전시키지 못한다면 일방적인 선언으로만 그칠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엔 당 외곽에 존재하는 다양한 시민사회 운동진영과의 연대라는 진보진영의 당면과제를 제대로 실현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한국좌파의 반민주주의

    우리는 결국 민주주의 내에서 자유와 평등이 동시에 확장되는 사회를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은 ‘시장을 통한 자유의 확장’을 주장하는 데 이 같은 주장은 실제로는 다수 시민들의 실질적 자유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시민들은 자원과 기회의 부족으로 인해 자유를 제대로 누리지 못합니다.

    이 같은 역설에서 좌파는 자유를 자유주의에서 구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 좌파들은 너무도 손쉽게 국가의 개입을 통한 평등의 확대를 역설하는 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가의 제한 없는 개입이 권위주의적 체제를 낳거나 시민생활 전반에 대한 국가통제의 확장을 가져왔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합니다.

    이 주제는 결코 단순하지 않으며 선언적으로 제시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현재 상황을 개혁해가는 기나긴 과정의 방향을 설정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주 성찰적인 질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국처럼 이른바 자유주의 세력들이 정치사상의 자유조차도 성취해내지 못한 나라에서 한국 좌파는 독재정권과 맞서 싸울 때는 자유주의 세력과 함께 지금은 홀로 시민생활의 자유를 확장하는 싸움을 지속적으로 벌여왔으며 앞으로도 벌여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내부의 억압입니다. 시민적 기본권을 확대하는 싸움에 늘 앞장섰던 한국 좌파는 정작 내부에서 여러 정치적 견해들이 공존할 수 있는 규칙(타협과 합의의 절차)을 만드는 데 늘 서툴렀습니다. 그 결과 한국 좌파의 역사는 오만한 다수파의 대동단결 이데올로기와 소심한 소수파의 끊임없는 자기 분열로 얼룩졌습니다.

    ‘강한 민주노동당론’ 비판

    위의 문제의식에 비추어 볼 때 심상정 후보가 제시한 민주노동당 혁신 방안인 ‘강한 민주노동당론’에서 강조하고 있는 민주집중제는 마땅히 폐기되어야 할 것입니다.

    민주집중제란 다양한 견해를 모아 이른바 사상통일을 이루고 행동통일을 이룬다는 발상에서 비롯된 것인데 단일한 적이 존재하지 않는 현재의 상황에 적절하지 않을 뿐더러 그 같은 조직운영 원리가 늘 패권적인 정파의 전횡에 눈 감는 일로 귀결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고려해야 합니다.

    게다가 민주노동당은 당내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해 있는 게 현실입니다. 그러니 마땅히 당에 민주적 활력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당면과제일 것입니다. 여기서 고려해야 할 것은 직접민주주의는 종종 권위주의적 지도자와 결탁해서 정치적 견해에 기반한 다양한 결사의 자유를 방해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당원들의 민주적 참여를 북돋는다는 취지에 한해서 직접민주주의 형태를 도입해야 합니다. 이와 더불어 지금의 경직된 형태의 대의제 민주주의는 유연한 형태의 대의제 민주주의로 대체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토론과 합의의 과정을 아주 중시하는 공적 발언과 책임의 문화를 뿌리내리게 해야 할 것입니다. 타 정파를 관용하거나 수용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인정하고 존중하는 차원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위와 같은 일은 그 어떤 한국의 정치세력도 추진한 적이 없는 사례입니다. 개혁당의 시도가 생활정치에 기반한 직접민주주의의 형태를 띄었지만 결국 몇몇 정치적 과두에 의해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봐야 할 것이고 민주노동당의 당원들의 “민심”이 이른바 시대착오적인 자주파-평등파의 정파 구조에 의해 왜곡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지금 민주노동당에 필요한 것은 단기 혹은 중기적으로 당원 직접 민주주의를 더욱 강화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강한 민주노동당론”에서 강조하는 “민주집중제”는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그것이 당원들의 당 지도부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합니까? 아니면 당지도부의 힘을 강화하는 것을 의미합니까?

    그리고 당 혁신 안의 이름으로 내건 수식어인 “강한”이라는 표현이 실망한 당원들에게 힘을 북돋아줄 것인지 아니면 민주노동당의 권위주의적 문화를 더욱 강화해서 실망한 당원들의 탈당을 부추길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오히려 “혁신민주노동당론”이 심상정 후보가 제시하고 있는 구체적인 내용을 더욱 잘 표현한다고 생각합니다.

    “지혜로운 국가”를 향하여

    사회공공체제에 정치적 대안이 공백으로 남아 있는 것은 그 자체로도 문제지만 사회공공체제에 담겨 있는 경제적 대안에 대한 신뢰를 깎아 내리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한국좌파가 박정희시대가 보여주었던 국가의 무절제한 개입의 시대로 회귀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과 다른 국가개입의 방향은 무엇입니까? 공적 부문의 “사회화”는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 한 “국유화”를 의미할 것인데
    그것은 국가사회주의든 사회민주주의든 하나의 혁명공식이었는데 그것이 현시기 혹은 최소한 단기적으로 적절한가는 따져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에릭 홉스봄은 21세기를 맞은 좌파의 미래에 대해서 발언하는 자리에서 레닌의 말을 인용하면서 국유화가 그 자체로는 사회주의적 개혁이 아니라는 점을 새삼 강조합니다. 국가사회주의 국가에서 생산수단의 국가소유는 생산수단의 실질적 민중통제를 통한 사회화를 의미하긴 보다는 거대한 공공부문을 통제하는 정치적 집단의 권력 및 경제적 자원의 원천으로 종종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들 국가부문의 악명 높은 비효율성은 실제로 서민들에게 안정된 공공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본래의 의도를 배반하곤 했습니다. 게다가 국영기업 혹은 공사화한 기업들의 노동자들이 특권층으로 변질되는 사례가 비일비재했습니다.

    한국의 민영화한 국가 통제 기업들이 기업경영기법의 도입으로 효율성이 개선되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외국에 거주했던 사람으로서 한국에 방문할 때 마다 갈수록 줄어드는 공중전화시설과 전혀 서비스가 개선되지 않은 공중전화에 대해 큰 불만을 갖고 있고 그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공공서비스 부문의 기업들의 공공성이 제고되어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문제는 한국을 방문하는 많은 외국인들과 동포들을 위해서 통화품질이 향상된 새로운 공중전화를 전략적으로 배치하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민영화한 통신회사 사장의 무능력에 대한 문제제기로도 해소될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크게 신뢰가 가지는 않지만 이 같은 일을 내부의 노동조합이 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며 공공 서비스의 소비자 운동과 노동조합이 결합하는 것도 좋은 방식일 것입니다. 노동조합 운동의 혁신이 필요한 대목입니다.

    또한 민영화와 관련해서 중요한 쟁점 가운데 하나를 검토해야 합니다. 즉 한국 정부 재정이 갖는 고유한 한계는 물론이고 북한과의 관계에서 더욱 많은 재정적 자원을 투여해야 하는 현재의 사정을 고려해야 합니다.

    또한 세금을 신설하는 것으로 사회복지를 위한 국가재정을 확보하는 데는 중대한 장애물이 산적해 있습니다. 이것은 정규직 노동자들로부터 지지를 얻지 못할 확률이 높은 데다가 세금 신설이 분배효과를 개선하는 측면은 있지만 실제로 구조개혁을 추동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민영화한 기업들을 사들이는 것이 기회비용을 고려한다면 과연 바람직한 일인지 깊이 재고해봐야 합니다. 또한 위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깔고 국가 재정의 확충을 통해 사회 복지 서비스의 강화를 위해 국가통제기업들의 도그마 없는 민영화를 추진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국가규제철폐” 문제는 “시장의 확대”가 아닌 “시민적 자유의 확대”로 갈 수는 없는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이건 담론투쟁의 문제이기도 하며 동시에 경제적 정책수단이 제한된 현실적 상황에서 정치적 상상력으로 풀어야 할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우리는 국가가 지혜롭게 변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자유와 평등의 폭과 깊이를 넓혀 가는 지혜로운 한국”이 우리의 슬로건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시장 또한 “자유와 평등의 확대”에 기여하도록 재구성되어야 하겠지요.

    한반도 전체를 고려하는 정치

    저는 결국 국가가 갖는 정치적 힘은 축소될 수 밖에 없고 국가관료제도 훨씬 유연하게 변할 수 밖에 없으며 국영기업 혹은 공사 기업들도 보다 혁신적이고 유연한 형태로 변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럴 때 정치의 힘을 어디서 보충할 수 있을까요? 그것을 남미는 남미국가공동체의 추진과 같은 지역블록 전략이라는 정치적 외교적 힘으로 이를 보충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지역블록을 추진할 파트너가 과연 존재할까요? 북경의 패권과 동경의 야심을 제어할 힘을 한국이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저는 남한과 북한의 정치 경제 군사 및 생태적 협력을 통해 한반도를 “모두에게 열린 섬”으로 만드는 전략을 추진하는 게 보다 현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선 첫째로 한국 좌파 주도로 남북관계 개선을 주도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민족자주/외세개입이라는 주술적 구호에 갇히지 않은 탈 민족주의적 남북관계 개선을 의미합니다. 요컨대 정치적으로 볼 때 남한 주도의 정치적 심리적 대북 압박의 모든 요소를 제거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경제적 지원의 장벽들을 제거하고 외교적으로 북한에 대한 적대시 정책에 맞서 싸우기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남북 통일에 대한 섣부른 환상을 부추기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북한 국민들을 이등시민으로 만들고 북한 여성노동자들이 사회의 최하층으로 편입되고 북한의 생태계가 파괴되는 것을 우리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북한이 남한을 추종해서는 안 되며 스스로의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해야 할 것입니다.

    이 같은 합의는 남한의 변화를 필수적으로 수반하며 그 같은 남한의 변화를 대북 외교력으로 전환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는 ‘통일’이 아닙니다. 한반도에서 두 개의 국가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며 한반도의 2국가 공동체가 여러 협력을 통해 국제적 정치력과 외교력을 갖추는 데 협력해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같은 선도적인 문제의식은 한반도의 양국의 공동외교에 정치적 힘을 부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같은 방식으로 남한이라는 국가의 힘을 보충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중장기적 한반도 평화 전략에 힘을 합칠 수 있는 모든 국가들의 지원을 끌어내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에필로그

    요컨대 저는 좌파가 사회주의의 역사에 대한 깊은 성찰을 바탕으로 민주주의자로 거듭나야 하며 그리고 세계화를 비롯한 현대 사회의 심원한 변화를 받아들이고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현대주의자로 변신해야 하고 한반도 전체를 고려하는 한국적 좌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도그마의 시대는 갔습니다. 게다가 그 도그마를 평양, 모스크바, 파리, 스톡홀름 그리고 최근에는 베네수엘라의 까라까스에서 빌려오던 “열등감”도 이젠 버려야 합니다.

    우리를 뿌듯하게 해 주었던 혁명 공식들이 스스로 붕괴하는 것을 우리는 수 차례 목격해왔습니다. 마르크스의 격언처럼 모든 굳어진 것들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굳게 믿었던 수많은 실천계획들이 끝내는 우리의 목적을 배신해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럴 때 일수록 우리의 외눈이 외면하고자 했던 것들에 대해 눈길을 주어야 하며 그러면서도 가장 현실적인 수단을 선택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합니다. 그것이 동끼호떼의 저 거창하고 무모한 이념으로 세상을 재단하지 않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얻게 될 숱한 시행착오들이 세상에 바꾸는 데 훨씬 더 많은 통찰력을 제공할 것입니다.

    멕시코 시티에서
    심상정을 지지하는 민주노동당 평당원(라틴 아메리카 전문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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