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게 아저씨가 노회찬밖에 없다네요"
By
    2007년 07월 25일 03:14 오후

Print Friendly

제가 정치, 좌파, 진보라는 것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된 때는 2002년, 고1 때부터였습니다. 그 시절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사람들과의, 몇 년에 걸친 교류를 통해서 현재의 제가 형성되었지요. 그런 사람들 중의 한 명으로 제 곁에는 L형이 있습니다.

그 형은 당시 성대에서 노사모를 하고 있었는데, 더러운 꼴(?)을 많이 봐서 저보고 이번 대선까지만 노무현 지지하고 2003년부터 민주노동당에 입당한다고 그러더군요. 그 시절에 한창 트로츠키 자서전을 읽고 트로츠키에 빠져 있었던 때였지만, 현실 정치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그런가보다 했습니다.

2002년 대선 토론회 보고 권영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때 알았던 사회당 당원 분(세이클럽 별명이 ‘어둔녀애인’이었는데, 지금 어디서 뭐하시는지)과도 비교해봤을 때 그 형 말이 더 끌렸어요. 왠지.

그리고 12월이 되어 대선후보 토론회를 봤습니다. 권영길 후보를 봤습니다. 그때 저는 결정했죠. 아, 부모님한테 노무현 말고 권영길을 찍으라고 해야겠다, 라고. 그 말을 했더니 L형이 화를 내더군요. 지금은 노무현 찍어야 된다고.(물론 지금은, 그런 기억이 L형의 트라우마 중 하나로 알고 있습니다만.)

저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 당시에 ‘선도적 군축’은 좀 에러 아니야… 정도의 생각만 가졌습니다. 남과 북의 단순 군사력 비교가 문제가 아니라, 미국과 중국, 일본, 러시아 등의 국제관계의 관점에서 선도적 군축이 적실성이 있는지에 대해서 좀 회의적이었죠.

아빠 엄마도 제 말 듣고 몇 번 딱 보더니 “그래, 권영길 찍어야지.”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게 시작이었습니다. 저희 집이 민주노동당 표밭이 된 건. 이후로 지금까지 우리 집은 꾸준히 민주노동당에 투표했습니다.

2003년이 되었습니다. 그때 노무현은 이라크 파병을 천명했고, 저는 반전 시위에 나갔지요. 어떻게 당원이 되는 줄 몰랐었는데, 대전역에서 드디어 당원이 되었습니다. 2003년 4월의 일입니다. L형이 3만4천번대이고, 저도 곧 당원증을 받았습니다.

교장 아저씨, 노회찬

당원번호 36628번이 괜히 뿌듯했습니다. 매주 반전시위에 나가면서, 매번 대전역에서 발언 신청도 해서 제가 생각하는 반미와 반전을 외쳤습니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싫어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 학교 공부 이외의 다른 것들을 엄청 팠습니다. 그 와중에 진중권, 홍세화, 박노자 등의 책도 보게 됐습니다. 그리고 L형이랑 놀다가 ‘진보누리’란 곳도 알게 되었지요. 그 곳에서 전 진중권의 글을 보고 반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전 ‘진빠’가 되었지요. 그의 책을 모조리 사기 시작했고, 그 버릇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2003년, 민주노동당 제 1회 청소년 정치캠프에 관한 홍보를 봤습니다. 얼른 신청했지요. 안 될까봐 조마조마했는데, 나중에 보니 그렇게 조마조마할 필요가 전혀 없었더군요.;

그것이 노회찬 후보와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당시의 노회찬 사무총장, 아니 그때는 그 분을 잘 몰라서 우리끼리는 그냥 “교장 아저씨”로 불렀습니다. 딴 건 몰라도, 우리에게 일부러 맞추려고 하는 게 아니라, 너무 소탈해서 자연스럽게 우리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그런 모습이, 참 맘에 들더군요. 첫날 밤, 캠프에서 권영길 후보를 난생 처음 실제로(!) 보는 쾌거를 이뤘습니다.

그리고, 3박 4일간의 일정에서 우리 “교장 선생님”, 아니 “교장 아저씨”는 우리가 서로 노느라고 늦게 잔 것들, 다소 일정이 늦어지는 것도 이해해주고, 오히려 우리의 피곤함을 생각해 ‘교장 인사말’을 짧게 해주는 센스! 친구들끼리 “아 노회찬 완전 센스쟁이다~” 이랬죠.

그가 강연한 왜 민주노동당인가, 청소년 인권, 일상에서의 평등, 평등 명절 등에서 우리는 이해 못할 내용이 없었고, 받아들이기도 쉬웠습니다. 일단 재미있었으니까요. 자신의 <매일노동뉴스> 이메일 주소를 알려주면서, 캠프 끝나고 따로 메일을 넣어주면 사은품을 주겠다고 해서 받아 적었는데, 불행히도 못 보냈습니다.

고 3때 다시 노회찬을 만나다

대표와 사무총장, 대표와 교장의 비교를 해보면서, 그때 처음으로 권영길보다 노회찬이란 사람에 대한 호감이 싹텄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치캠프 행사의 대부분이, 우리 청소년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진행되게 해줬던 것이 정말 고마웠죠. 그로 인해 우린 많은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으니까.

어쨌든 이것이 저에겐 권영길과 노회찬을 첫 번째로 만난 사건이었습니다. 그 당시엔 정기 구독했던(2004년 하반기부터 절독 했지만) <진보정치>(민주노동당 기관지-편집자)에 청소년 정치캠프 후기를 참가  당원자격으로 써내면서, 지면관계상(;;) 못 썼지만, 쓰고 싶었던 내용 중의 하나는 ‘진중권과 친구들’과 함께, ‘노회찬과 친구들’이었습니다.

2003년, 많은 일이 일어났던 그 해는 가고, 저는 고3이 되었습니다. 내가 ‘노회찬 아저씨’와 재회한 것은 그때였습니다. 03년에 봤던 그 입담을, TV를 통해 다시 본 것입니다. 우리 부모님은 그렇게 말 쉽고 재미있게 하는 사람, 그러면서도 후련하게 해주는 사람 오랜만에 본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제 생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4월 15일, 마침내 김종필을 역사의 뒤안길로 몰아내고 국회의원이 된 노회찬 아저씨. 기쁜 마음에 <이론과 실천>(민주노동당에서 발행하는 월간지-편집자)에 투고를 하면서, 그 제목을 “두려워하지 않은 이들에게 행복을, 두려워 한 이들에게 희망을”이라고 하면서, 2004년 현재, 행복과 희망을 주고 있는 사람은 단연 김종필을 물러나게 하고 지금의 민주노동당 승리를 이끌어 낸 노회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노회찬과 다른 사람들의 근본적인 차이

세월은 흘러, 재수를 하고, 다시 대학에 들어오면서 노회찬 의원을 만날 기회가 많아졌습니다. 황우석 사태나, 한나라당 쏠림 현상에 절망하던 저에게 노회찬 의원이 06년에 제가 다니던 경희대에 와서 강의했던 내용, 그리고 대학생 진보캠프에서 강의한 “우리 국민들은 꾸준히 진보정당을 원하고 있다. 다만 제대로 된 대변자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절망이 아니라 반성을 해야 한다. 우리의 혁신이 필요하다.”라고 했을 때, 정말 마음으로부터의 동의를 했습니다. 그 이후 다시 노회찬 의원의 활동을 지켜보면서, 저는 이전에 그에게 품었던 호감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당의 다른 분들과 어떤 근본적인 차이를 느꼈습니다.

차이는 바로 ‘내용’입니다. 당에서는 ‘혁신, 혁신’ 하지만, 실제로 무엇을 혁신해야 할지, 그 내용을 모르는 사람이 태반입니다. 하지만 노회찬은 알고 있었습니다.

“두렵지 않게, 쉽게, 실현가능한 것부터”

과 학생회 총무라서 중간고사 간식 때문에 빵과 커피를 카드 주문하려다가, 세일 중인데 카드로 결제하면 수수료 때문에 밑져서 안 된다고 하시던 가게 주인 아저씨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카드 수수료 인하 문제로 노회찬 의원과 민주노동당이 나왔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우리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그 사람밖에 없다고, 나 다음에 그 사람 나오면 찍을 거라고, 그러시더군요. 어느새 노회찬은 영세 상인들의 희망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네 엄마 아빠가 운영하거나, 들락날락하시는 곳이 바로 그런 영세 상인들의 작업장입니다. 한미FTA니 평택이니, 한반도 평화, 물론 중요합니다만, 솔직히 일상에 바쁜 생활인들이 심각하게 여기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에 발 벗고 나서서 ‘데모질’만 해대는 민주노동당은 두려움의 대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행복해지려면 두려워하질 말아야 하는데, 문제는, 사람들이 우릴 두려워하니까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가 없다는 데 있습니다. 일단 희망을 준 다음, 그들이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을 때만이, 우린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한미FTA와 평택, 한반도 평화를 위한 미국과의, 자본과의 싸움에서 승산이 있습니다.

당과 민중 사이의 동시통역사 노회찬

물론, 그가 희망만 주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행복을 위해 열심히 싸우고 있습니다. 그는 삼성과 거대자본에 싸우고 있으며, 한반도 평화를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노회찬 선본 사무실에 가보니, 거기엔 도라산역에서 우리 학교 사람들과 찍은 대형사진이 걸려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볼 수 있는 아는 얼굴들과 도라산 역, 노회찬을 보고 그의 ‘코리아 연합’구상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검찰의 소환에 맞서 “나도 소환하라”며 1인 시위에 참여하면서, 다시 노회찬에 대한 지지를 다잡을 수 있었습니다. 저 앞의 그 큰 대검찰청도 쥐락펴락하는 그 자본의 힘에, 노회찬만큼 당당하게 싸울 수 있는 사람도 드물 것이라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삼성과 싸우는 것, 미국과 싸우는 것, 노동자 농민을 억압하는 자본에 싸우는 것은 노회찬이 아니라 다른 후보님들도 그 못지않게 훌륭하게 수행하고 계시다는 것, 그리고 그러실 수 있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진심을 전하는 ‘방법’은, 노회찬을 따라올 사람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후보님들과, 당의 다른 동지들이 싸울 때, 그 싸움이 자신들만을 위한 게 아니라, 그들과 전체 민중의 행복을 위한 것임을, 간명하게 통역해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통역의 기술에 있어서, 노회찬 후보는 그 어느 분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동시통역사’입니다.

동시통역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순차통역 내지는 번역을 하려 합니다. 하지만, 민중들은 늘어지면 답답해합니다. -_-;  왜, 있잖습니까. “설명이 필요한 공약은 공약이 아니다.”라는 말. 우린 민중들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대화를 해야 합니다. 다른 후보님들과 달리, 민주노동당과 민중의 동시통역이 가능한 통역 실력은 오로지 노회찬 후보만이 가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행복을 위해 싸우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행복 이전에 희망을 줄 수 있는 것. 그런 능력을 갖추는 것. 그것이 민주노동당이 해야 할 진정한 “혁신”입니다.

우리는 행복을 맡고, 희망은 노회찬에게 맡깁시다. 그리고 그가 민중들에게 준 희망을, 우리가 행복으로 바꿔나갑시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