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희는 한국의 나폴레옹이다
    12월 19일 구체제는 부활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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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7월 25일 12:1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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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념: 진보와 보수의 이분법을 넘어서

    ‘87년 체제’를 경유하면서 명확해진 것이 남한과 북한은 하나의 민족이기 이전에 서로 다른 국가이고 사회라는 점이다. 그러나 진보적 지식인들은 우리 사회를 남한이라는 개념을 그 범주로 하고 뉴 라이트 계열의 지식인들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범주로 하여 현실의 문제들을 진단하고 미래의 비전을 제시한다.

    이 둘을 가르는 기준은 바로 이념이다. 물론 이념이 현실을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수단이 아니라 당위적 목표가 될 때, 인간은 그 사고의 감옥에 갇히는 죄인으로 전락한다. 진보와 보수의 이분법은 프랑스 혁명 이래로 역사와 사회를 독해하는 오래된 문법이었다.

    1989년 현실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는 그 문법의 해체, 이념 시대의 종말을 의미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는 현실사회주의의 종말과 함께 하나의 이념에 의거해서 사회 전체를 디자인할 수 있다고 믿는 혁명의 거대 담론이 종말을 고하는 탈근대가 도래했지만, 한국사에서는 80년대 말, 6월 항쟁을 통해 혁명의 거대 담론이 헤게모니를 잡는 근대의 정점에 도달해 있었다.

    세계사적 상황과 다른 한국의 정치 지형

    ‘87년 체제’는 사회, 정치, 문화 각 분야에서 헤게모니가 보수에서 진보, 우파에서 좌파로 이행됐던 시기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한국에서 진보의 가치를 좌파가 전유했던 시대다. 하지만 세계사적 상황은 좌파와 우파라는 이념적 코드로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시대를 넘어섰다.

    사회주의를 경험한 옛 동구권 국가들에서 시장경제 옹호자는 진보파로, 공산주의자들은 보수파로 분류되었다. 이데올로기가 기준이 아니라 구체제의 개혁인가 옹호인가로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방식이 일반화됐다. 한편 유럽에서는 보수와 진보는 이데올로기 개념이 아니라 현실 개념으로 이해하는 탈이데올로기 시대를 맞이했다.

    그러나 이 같은 세계사적 상황과는 다르게 한국의 정치지형도는 여전히 이데올로기적이다. 특히 진보와 보수에 대한 한국적 분류법의 특이성은 민족주의자를 유럽 사회처럼 우파 보수주의자로 보지 않고, 좌파이면서 동시에 진보주의자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민족통일을 지향하는 사람들, 북한체제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서 좌파로 분류되곤 한다.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은 한국만의 오래된 운동적 이념의 대립이지만, 이는 하나의 진보적 운동세력으로 서로를 노골적으로 적대화하지 않았고, 엄밀히 구분되지 않았다. 탈민족주의를 이야기하는 시대가 왔어도, 실제로 한국 사회 내부에서 이에 대한 명확한 입장의 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편으로 계급 갈등 또한 기존의 이데올로기로 설명할 수 없는 시대가 도래했다. 한국의 민주화 20년은 그 새롭게 등장하는 갈등을 바탕으로 진행되었다. 고전적 근대사회에서 계급 갈등은 인류가 직면한 최대의 사회적 문제였다.

    마르크스는 자본가와 노동자 계급의 적대적 모순은 자본주의가 망하고 사회주의가 도래하지 않는다면 결코 해소될 수 없다고 보았다. 하지만 오늘날 사회국가는 복지정책을 통해 계급 갈등을 하나의 사회적 리스크`risk로 치유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때문에 영국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U. Beck은 계급 사회였던 고전적 근대가 저물고, 리스크 사회인 새로운 근대가 도래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전 세계 인류여, 단결하라"

    이를테면 계급 사회의 문제인 빈곤은 위계적이지만, 리스크 사회의 문제인 황사는 민주적이다. 물론 지구온난화의 경우에도 계급적 양극화와 결부되어 있는 문제이다. 온실가스를 대량으로 내뿜으면서도 그 악영향을 극복할 능력을 가진 부자 국가가 있는 반면, 온실가스를 별로 배출하지 않지만 온난화의 피해를 감내해야 할 빈곤 국가들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지구촌이라는 하나의 운명공동체에 살고 있는 한, 이 같은 양극화의 평준화도 시간문제다.

    리스크 사회에서 인류는 경제적 문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강하게 한다”는 니체의 말은 리스크 사회에서는 더 이상 유효할 수 없다. 인류를 강한 힘의 존재로 만들었던 자연에 대한 권력의지가 이제는 인류 전체를 파멸에 이르게 할 수 있다.

    우리는 이제 남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 되는, 서로 윈-윈`win-`win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모색해야 한다. 예를 들어 지구온난화라는 리스크는 좌우의 이념적 대립을 넘어 전지구적 녹색연대를 요청한다. 마르크스가 리스크 사회에 산다면 이렇게 선언할 것이다. “인류는 지구온난화에 떨고 있다. 지구온난화를 통해 빈자는 물론 부자도 모든 것을 잃을 것이다. 전 세계 인류여 단결하라”고.

       
     
     

    ‘포스트 87년 체제’를 위하여

    대한민국이 이룩한 가장 빛나는 업적인 민주화와 근대화는 4·19와 5·16이라는 두 사건을 계기로 해서 성취됐다. 4·19가 한국 민주화 운동의 기점이 됐던 진보혁명이라면, 5·16은 조국 근대화를 구호로 해서 대중을 강압적으로 동원하는 독재 권력을 성립시켰던 보수혁명이다.

    이후 대한민국 역사는 이 두 혁명이 목표로 했던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성장의 지지세력 사이의 헤게모니 투쟁으로 전개됐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4·19가 없었다면 5·16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므로 4·19는 5·16의 어머니다. 학생들이 4·19혁명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박정희 대통령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의 관계와 유사하다. 프랑스혁명이 발발하지 않았다면 코르시카의 ‘촌놈’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4.19와 5.16의 헤게모니 투쟁사

    프랑스혁명의 자식인 나폴레옹이, 혁명이 건설한 공화국을 해체하고 스스로 황제가 됐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럼에도 프랑스인들은 나폴레옹을 프랑스를 영광스럽게 만든 위인으로 숭배한다. 그는 프랑스혁명의 반항아로 태어났지만, 법 앞에 평등, 종교적 관용, 출생이 아닌 능력에 따른 출세와 같은 근대적 사회개혁을 완성했다.

    한국의 나폴레옹은 박정희다. 나폴레옹이 프랑스혁명을 배반했듯이, 박정희는 4·19혁명이 성취한 민주정부를 전복하고 대통령이 되었다. 전자가 프랑스의 근대적 개혁을 완수했다면, 후자는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냈다.

    5·16의 빛나는 업적 이면에는 4·19가 이끌어낸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독재의 긴 그림자가 있었다. 1987년 6월 항쟁은 5·16에 대한 4·19의 역전극이다. 성장의 그늘 속에서도 민주화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라서 꽃을 피웠다.

    하지만 역사는 반복한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오늘날 5·16의 유산을 짊어지겠다는 후계자들이 등장했다. 지금 한나라당에서는 그들 사이의 권력투쟁이 한창이다.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와 박정희 성장신화의 계승자인 이명박 가운데 누가 적자가 되든 2007년 대선을 4·19에 대한 5·16의 재역전을 목표로 해서 치르고자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대항마는 4·19의 계승자가 돼야 하는가?

    지금 많은 사람들이 ‘87년 체제’의 극복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왜 굳이 ‘극복’을 말하는가? 한국의 6월 항쟁은 프랑스혁명처럼 구체제를 종식시키고 민중에게 지도자를 선택할 수 있는 권력을 부여했다. 그 이후 민주주의는 계속되어, 마침내 6월 항쟁의 주역인 386세대가 권력의 정점에 서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정점 이후에 나타나는 것은 위기다. 구체제의 유령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박정희 신드롬’이 일어나고 그 후계자들이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다. 프랑스 혁명에 피로해진 민중이 나폴레옹을 황제로 추대하고 급기야는 왕정복고가 일어났듯이 대한민국 역사에서 구체제는 부활할 것인가? 2007년 대선은 대한민국이 어디로 가는지를 가늠해보는 하나의 시험대다.

    6월 항쟁과 68혁명

    프랑스혁명사의 교황이라 불렸던 프랑수와 퓌레(F. Furet)는 1989년 “프랑스혁명은 끝났다”는 선언을 했다. 1789년 이래의 프랑스 역사가 혁명 과정에서 생겨난 좌파와 우파의 정치투쟁으로 점철됐다면, 1989년 현실사회주의 몰락으로 지난 200년 동안의 프랑스의 이데올로기 싸움이 마침내 종결됐다는 것이 그 선언의 의미다.

    그 이전 프랑스 혁명의 전통적 해석은 프랑스혁명을 러시아혁명의 전사, 곧 사회주의 혁명의 전단계인 부르주아 혁명으로 역사적 자리매김을 했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진보진영은 6월 항쟁과 ‘87년 체제’가 이뤄낸 성과보다는 그것이 완성하지 못한 과제가 무엇인지를 놓고 논쟁을 벌이고 있다.

    1989년 현실사회주의를 무너뜨리는 동구권의 민중혁명을 하버마스는 ‘만회(挽回)혁명’이라고 이름 붙였다. 즉 1989년 동구권 혁명은 200년 전의 프랑스혁명을 이제야 실현했다는 의미이다. 곧 이것은 1917년 러시아혁명과 1789년 프랑스혁명의 역사적 인과관계를 뒤바꾼다. 프랑스혁명이 러시아혁명의 전사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라는 것이다.

    이 같은 역사 수정주의적 시각은 현재의 결과로 과거의 역사적 의미를 규정한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건국을 역사적 불행으로 인식했던 시각에서 역사적 행운으로 재인식하는 역사적 해석으로 이행되는 것을 보면서, 역사로서 6월 항쟁과 ‘87년 체제’의 극복을 말하기 전에 먼저 그것들이 성취한 것들에 대해 의미부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한국의 87년 6월 항쟁은 유럽의 68혁명과 비견된다. 유럽의 68혁명은 후기산업사회에서 발생한 문화혁명의 특징을 띤 반면, 6월 항쟁은 산업사회의 모순을 척결하기 위한 사회 정치적 혁명이었다. 그리고 87년 체제를 거치면서 이러한 세계사와 한국사의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이 해소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또한 87년 체제는 일제 식민지권력이 심어놓은 ‘규율 권력’을 철폐하는 성과를 이뤄내기도 했다. 『생활 속의 식민지주의』에서 한국과 일본의 학자들이 비교 연구한 결과를 보면, 한국인들이 ‘우리 안의 식민지주의’를 청산한 것은 6월 항쟁 이후의 일이다.

    우리 안의 식민지주의를 청산한 6월 항쟁

    패망과 함께 일본에서는 총동원 체제에 입각한 ‘신체 규율’이 거의 사라졌지만, 한국에서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오히려 1970년대 유신체제는 국민교육헌장·징병제·교련·체력장·국민체조 등 1940년대 총동원체제의 유산을 독재체제를 유지시키는 규율권력으로 내면화하는 국민교육을 실시했다.

    정근식의 연구에 따르면, 이러한 규율권력의 해체는 1987년 6월 항쟁 이후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87년 체제’는 비록 체제의 측면에서는 완전한 정치적 민주주의를 이루지 못했지만, 생활세계의 측면에서는 서구의 68혁명처럼 ‘일상적 파시즘’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문화혁명의 중요한 계기를 형성했다.

    이런 점에서 노무현 정부가 성취한 가장 큰 업적이 한국을 탈권위주의 사회로 이행시켰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일상적 삶의 민주화에 기여했다. 하지만 권위주의의 유혹은 끝나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박정희 향수로 표상되는 권력에 대한 욕구가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역설을 ‘대중독재’로 설명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현상은 정치와 문화, 곧 우리 삶의 하드웨어인 제도와 소프트웨어인 의식의 변화가 겪어야 하는 시간차의 문제로 여겨진다. 때문에 정치적 제도를 더 민주화시키는 것도 과제임이 틀림없지만, 제도적 민주화보다도 뒤쳐진 정치의식의 민주화를 성취하는 것이 더 중요한 과제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대한민국 대통령의 전형을 박정희로 생각하면서 민주화 시대를 살고 있다. 이것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고민해야 하는 우리 사회의 시간차가 낳은 현상이다. 이는 마치 엄한 아버지에게서 교육받고 자란 세대가 아버지가 되어 그 자식들에게는 자기가 경험했던 아버지로서의 권위를 행사하지 못했을 때 느끼는 향수에 불과한가.

    대한민국 대통령의 전형을 박정희로 생각하며 민주화시대를 살다

    민주화의 시대의 가족공동체의 아버지는 기껏해야 하나나 둘밖에 없는 귀한 자식을 위하는 탈권위적인 모습이다. 그런 점에서 ‘87년 체제’의 결말은 좋든 싫든 노무현 정부다. 하지만 노 대통령이 추구했던 개혁에 대한 평가는 아직 이르지만, 현재로서는 실패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실패한 이유는 대통령 권력의 탈권위화가 카리스마의 상실을 초래한 것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파스칼은 “권력은 인간이 갈망하는 것을 소유한 데서 나온다”고 말했다. 지금의 시대에는 국민의 대다수가 갈망하는 것을 충족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지도자가 될 수 있고, 그 갈망을 충족한 국민은 더 이상 추종자가 아니라 역시 권력을 소유하는 지도자로 성숙한다.

    이 같은 지도자와 추종자의 권력의 변증법을 추동하는 것이 ‘변혁적 리더십(transforming leadership)’이다. 2002년 ‘국민이 대통령이다’는 선거 구호를 말할 때의 노무현 후보는 ‘변혁적 리더십’을 추구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5년이 지난 지금 국민은 과연 대통령이 됐는가? 지금 2007년 대선을 앞두고 한국 사회는 다시 과거의 정치판으로 회귀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런 시점에 6월 항쟁을 생각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역사는 위기의 순간에서 드라마를 연출하는 저력을 갖고 있다. 우리 현대사의 위대한 힘의 원천은 6월 항쟁이다. 6월 항쟁은 끝났지만, 한 번 배운 수영은 죽을 때까지 잊지 않듯이, 항쟁의 경험은 여전히 우리의 저력으로 잠재해 있다. 따라서 6월 항쟁이 성립시킨 ‘87년 체제’가 종식된 이후에도 역사의 진화는 진행 중이다.

    역사의 반복과 인간의 의무

    임상수 감독이 황석영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오래된 정원>을 봤다. 작가 스스로가 ‘80년대에 바치는 진혼곡’이라고 칭했던 이 작품은 386세대의 삶과 사랑 그리고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인류학자 말리노브스키의 말대로, 인간에 관한 모든 이야기는 “그들은 태어나서 사랑하다, 죽었다”로 요약할 수 있다.

    영화를 보면서 80년대 한국 사회에서 강한 자는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죽었으며, 비겁한 자들만이 살아남았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5월의 광주를 체험한 세대에게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죽음의 수용소인 아우슈비츠 생존자들처럼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죄의식을 가져야 할 일이었다. 생존해 있는 사람들은 죽은 자들에게 속죄하는 자세로 살아야 했다.

    하지만 그들이 죽은 자들을 대신해서 훈장을 받고, 그 훈장으로 출세를 했다면 이중의 죄를 지은 셈이다. 그때 산화한 이들과 남아 있는 이들 사이의 사회적 위치만큼 세상은 변했다. 영화 속에서 위장 취업하며 노동운동을 벌였던 여학생은 분신하여 이 세상에 없고, 그 애인이었던 청년은 잘 나가는 인권변호사가 되어 선거에 출마했다. 아마 그는 출세해서 국회의원쯤은 됐을 것이다.

    "죽은 자를 대신해 훈장받고 출세했다면 이중의 죄 지은 것"

    2007년은 87년 6월 항쟁이 일어난 지 20년이 되는 해다. 살아남은 386세대는 이제 불혹의 나이가 됐다. 불혹의 나이에 영화를 보면서 20년 전으로 되돌아가서 그 시대를 다시 산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를 반성해본다. 광주의 그 일을 당하고서도 전두환 정권을 용서할 수 있는가?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아야 하지 않은가.

    시간이 약이라 했던가? 한나라당의 대표적 386 정치인 원희룡 최고의원이 2007년 정초에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세배를 갔다. 그는 처음에는 “보수와 진보 양쪽에서 쏟아질 비난이 전혀 두렵지 않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의 기적과 동서화합을 위해서라면 이것보다 더한 일도 감내할 수 있다”는 당당한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그를 비난하는 네티즌의 접속이 폭주하여 홈페이지가 다운되는 사태가 발생하자 하루 만에 사과 성명을 발표하는 해프닝을 연출했다. 이것이 오늘날 살아남은 자들의 자화상은 아닌가?

    영화 속에서 출옥하여 17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 주인공 오현우에게 어머니는 말한다. “역사에 대해 겸손했어야 했다”고. 80년대 민중항쟁, 더 정확하게는 80년 5월의 광주는 지금 우리에게 무엇인가? <오래된 정원>은 그 시대를 잊고 사는 우리에게 그때 그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사랑하다 죽었는지를 증언한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면, 그들이 어떻게 살다가 죽었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살아남은 자의 의무다.

    ‘오래된 정원’이란 언제나 현실에는 없는 말, 유토피아로 존재한다. 20년이 지난 오늘 지난 세월을 뒤돌아보면, 도피 중이었던 오현우가 사랑하는 이를 만나 꿈같은 시간을 보냈던 갈뫼가 아니라 개인적 행복보다는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신념을 선택했던 젊은이들의 시대, 80년대 대한민국이 바로 ‘오래된 정원’이 아닐까.

    20년 전 문익환 목사는 이한열 열사 장례식을 위해 시청 거리에 모인 백만의 시민들 앞에서 산화한 열사들의 이름을 하나씩 목 놓아 부르는 조사를 했다. 그때 그 장면을 생각하면 지금도 머리카락이 솟구치고 온몸에 전율이 인다.

    1980년대는 그랬다. 지금 우리에게 그때의 ‘오래된 정원’은 역사에 대해 오만했던 시절이 아니라 다시 현실로 되찾아야 할 ‘오래된 미래’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화 세대의 변신과 분열을 결과로 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여전히 추구해야 할 ‘오래된 미래’로서 ‘6월 항쟁’의 역사적 의미를 풀어야 한다.

    영화 <오래된 정원>의 마지막 장면에서 마침내 오현우는 딸 은결을 만난다. 은결은 오늘의 젊은 세대처럼 쿨하게 아버지를 대한다. 과연 오현우는 딸에게 그 격정의 세월과 한 많은 인생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과거의 삶을 현재를 사는 사람들에게 소통시켜야 하는 것이 역사가의 임무다.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역사는 반복한다. 시인 김광규는 그 역사를 1960년 4·19가 일어난 지 18년이 지난 시간에서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로 노래했다. 그 노래가 87년 6월 항쟁이 일어난 지 20년 후 다시 우리의 노래가 됐다. 이것이 인간의 역사일까, 아니면 그게 인생인가(C’est la vie).

    4. 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 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우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김광규,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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