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거보다 아예 추첨이 민주적이다?
        2007년 07월 23일 01:2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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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가오는 17대 대선을 맞이하는 민주노동당의 모습이 뜨겁다. 명실상부한 민주노동당의 대선 후보가 되기 위해서는 당내 경선을 치러야 한다. 지금 권영길, 심상정, 노회찬 대선 예비후보자들이 당내 경선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각자 자신들의 특장점을 온몸으로, 열정으로 쏟아내며, 당원들과 국민들과 호흡하며 불꽃 튀는 선거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

    그들의 말과 행동, 손짓, 눈빛, 표정, 호흡 그리고 그들이 쏟아내는 스토리텔링, 레토릭, 열정을 보고 듣고 있노라면 고대 아테네의 아고라와 법정에서의 연설과 토론이 생각이 나기도 하고, 아테네에 쳐들어오는 외부의 적을 맞아 자신을 희생하면서 공화국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구하는 전쟁의 영웅이 되겠다고 다짐하거나 출사표를 던지는 장군을 보는 것 같다.

    고대에서의 생과 사의 전쟁터는 전형적인 정치의 무대였으며, 장군은 훌륭한 정치가였으며, 그들이 영웅인 이유는 살아왔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전쟁에서 죽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권영길, 심상정, 노회찬 중에서 누구를 찍어야 하나? 많은 고민을 했다. 권영길은 아버지 같은 분이다. 심상정은 큰 누님 같은 분이다. 노회찬은 어린 조카들을 걱정하는 막내 삼촌 같은 분이다. 이 세 분 중에서 한 분만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 가혹하다.

    이런 분들이 혼신으로 경주하고 있는 선거운동 분위기에 비해, 과연 선거는 민주적인가? 정당은 과두제를 피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좀 황당하기도 하고 생뚱맞은 것 같기도 하고, 선거 분위기를 깨는 것 같아 죄송스럽기까지 하다.

    솔직히 이 세 분들의 불꽃 튀는 경쟁을 보면서, 순진한 발상이지는 모르겠지만, 한 사람을 선택함으로써, 빚어지는 두 분에 대한 미안함과 서운함 그리고 불편함 때문에, 그리고 그 동안의 당내 경선이 대체로 특정 정파의 이해관계와 담합에 의해 결정된 것처럼, 이번에도 사실상 정파과두제가 평당원의 민주주의를 왜곡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선거로 뽑지 말고 추첨제로 뽑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세 분 말고 대선 후보로 나가고 싶은 모든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세 분이 워낙 탁월하니 나가기가 두려운 사람들에게도 덜 부담스럽게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개방하고, 사전에 일정한 자격심사를 받도록 하고, 자격심사를 받아 추려진 범위 내에서 추첨제로 뽑으면 어떨까?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더 나아가 대통령을 포함한 웬만한 공무원도 그렇게 추첨제로 뽑으면 어떨까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이미 깨우쳤겠지만, ‘탁월성의 원리’에 입각하여 탁월한 대표자를 뽑는 선거란 것이 ‘유사성의 원칙’과 ‘가능성의 평등’을 추구하는 추첨제보다 덜 민주적이고, 불평등하다는 생각, 그리고 선거를 기초로 한 정당 민주주의와 대의제 정부의 구성이 필연적으로 관료제를 부르고, 더 나아가 소수의 엘리트에 의해 지배되는 과두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 이른바, ‘과두제의 철칙’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선거가 ‘민주정’이 아니라 아닌 ‘귀족정’이고, 현대 대의제 민주주의는 선거로 포장된 귀족정이라는 주장은 고대부터 계속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 몽테스키외, 루소 모두 선거는 본질적으로 귀족적이라고 말했고, 그들은 귀족주의적 결과는 선거가 사용되는 환경과 조건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라, 선거 그 자체의 속성에 기인한 것이라고 믿었다. 특히, 몽테스키외는 “추첨에 의한 선발은 민주정의 특징이요, 선거에 의한 선발은 귀족정의 특징이다”고 말했다.

    『선거는 과연 민주적인가』(곽준혁 역, 후마니타스)의 저자 버나드 마넹에 의하면, 고대 아테네가 직접민주주의라고 부르는데, 그 직접민주주의와 현대 대의제 민주주의를 구분하는 그 핵심은 모든 시민이 권력에 참여하였는가에 여부에 있지 않고, 추첨제를 실시하였는가 여부라고 보고 있다.

    그에 의하면, 아테네에서도 정책과 공직자의 선임을 선거 제도로 뽑을 때도 있었지만, 민주정이라고 부르는 그 핵심에는 추첨제가 있는데, 추첨제는 모든 시민들이 권력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의 평등’이 있고, 통치자와 피치자가 일치한다는 ‘유사성의 원리’가 있다고 보았고, 로마공화정에서 지배적으로 유행한 관리 선출 방식인 선거제도는 대표자가 피치자보다 덕과 능력 및 재산이 우월해야 한다는 ‘탁월성의 원리’에 입각했다고 보았다.

    버나드 마넹에 의하면, 추첨제를 하지도 않고, 선거제도로만 하면서도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대의제 민주주의는 ‘선거로 포장된 일종의 귀족정’이고, 대의제적 정당민주주의가 대표자들을 피대표자인 대중들과 유사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공헌한 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가능성의 평등’과 ‘유사성의 원칙’을 갖고 있는 ‘추점제도’와 비교해 볼 때, ‘귀족주의적인 탁월성의 원칙’을 갖고 있는 ‘선거제’를 기초로 하기 때문에, “사회적 신분이나 생활방식, 그리고 교육에 따라 시민들과는 구분되는 소위 엘리트의 통치로 남아있다.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현실은 단지 ‘새로운 엘리트의 부상과 다른 엘리트의 퇴조’ 일뿐”이라고 하였다.

    그는 정당과 정당에 의한 민주주의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근대 대의제가 초기에 고대의 민주정과 공화정을 적절히 혼합한 ‘의회정치’에서 ‘탁월한 대표자’를 뽑자는 원칙이 있어 그나마 ‘최소한적’으로 민주주의 정신에 반응하였는데,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등장한 대중정당 모델에 따른 대의형태와 이것의 필연적 귀결인, 탁월한 대표자를 인기영합적이고 선거공학적인 선거기능인으로 변질시키는 ‘선거전문가 정당’의 등장이 대의제의 ‘탁월성의 원칙’마저 훼손했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대중정당의 가장 극명한 문제점으로 가장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정당일 것 같은 정당에서도 예외 없이 소수의 엘리트가 다수를 지배하는 경향을 말하는 ‘과두제의 철칙’(Iron Law of Oligarchy)이 관철된다고 주장하였고, 그 대표적인 사례로 미헬스(Michels, 1962)가 자신의 책 『정당사회학 : 근대 민주주의의 과두적 경향에 관한 연구』(김학이 역, 한길사)에서 밝힌 실증분석을 예로 들었다.

    버나드 마넹은 미헬스의 ‘독일 사민주의 정당 분석’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미헬스(Michels, 1962)는 정당의 지도자와 대의원들이 노동계급이라는 배경을 가질 수는 있지만, 실제에 있어서 그들은 노동자라기보다는 쁘띠 부르주아와 같은 생활을 한다고 지적했다. 미헬스는 노동계급 정당의 지도자들과 대의원들이 일단 그러한 권력의 자리에 도달하기만 하면 달라질 뿐만 아니라, 그들이 애초부터 달랐다고 주장했다.

    미헬스에 따르면, 정당은 (노동계급 중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들에게 그 사회계급 내에서 상승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가장 유능하고 박식한 노동자를 등용한다. 자본주의 초기에는 이러한 더 똑똑하고, 더 야망에 찬 노동자들이 소기업자가 되었던 반면 지금은 정당의 관료가 된다. 따라서 노동계급정당으로부터 뚜렷이 구별되는 ‘탈노동자화’된 엘리트들이 지배했다.

    이러한 엘리트들은 특별한 자질과 재능, 이른바 행동주의와 조직 기술에 근거해서 권력의 자리에 올랐다. 결국 대중정당이 대의정부를 지배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의정부의 엘리트주의적 성격은 사라지지 않으며, 오히려 새로운 유형의 엘리트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정당엘리트인 대표자의 두드러진 특징은 행동주의와 조직기술에 있다. 투표자는 이제 더 이상 대표자의 자질을 판단하고 투표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당(정파)인가를 보고 당의 조직과 행동에 익숙한 정당대변자를 자신의 대표자로 선출한다. 그리하여 투표란 유권자가 정당이 내세운 자신의 후보에 대해 동의하고 인준해주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정당민주주의는 활동가와 정당관료의 통치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볼 때, ‘탁월성의 원칙’을 강조하는 선거제도가, ‘가능성의 평등’과 ‘유사성의 원칙’을 갖고 있는 ‘추첨제도’와 비교해 볼 때, 좌파든 우파든,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간에 근본적으로 선거제도가 계속되는 한 ‘새로운 엘리트의 부상과 다른 엘리트의 퇴조’만을 반복할 것이라는 버나드 마넹의 지적 그리고 모든 조직은 ‘과두제의 철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미헬스의 지적으로부터 민주노동당이나 초록정당은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지? 이를 넘어설 수 있는 대안은 있는지? 궁금하다.

    필자는 그동안 풀뿌리민주주의자(이른바 직접민주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왜 지방선거 때만 되면, 지방선거에 필사적으로 나가려고 하는지 그 이유를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지만, 속시원하게 대답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

    직접민주주의자들이 왜 지방의회라는 대의제에 참가하려는 것일까? 지방의회라는 대의제를 활용하여 풀뿌리민주주의가 활성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풀뿌리를 내세워 지방의원이 되고 싶은 것인지? 아리송하다. 초록은 필자의 질문에 대답해줬으면 좋겠다.

    필자의 생각은 소박하다. 좌파든, 우파든,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간에 추첨제도가 선거제도를 대체할 수 없다면(대체할 수 있다면 대환영이다), 솔직하게 대의제민주주의에 충실하거나 이를 보완하는 데 충실해야 한다고 본다.

    그 핵심은 미국의 건국자들이 연방주의를 도입해 중앙과 지방을 분리하고, 중앙권력을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를 분리하고, 의회를 상원과 하원 양원제로, 수직적으로 수평적으로 분리해서 독재권력이 나오지 않도록 견제와 균형을 찾는 방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또한 특정 정파와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공공선을 추구할 수 있는 탁월한 대표자라도 제대로 뽑아 덜 귀족정이 되도록, 덜 관료제와 과두정이 되지 않도록 토의민주주의와 공화민주주의를 활성화하는 혼합정을 실시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적어도 풀뿌리민주주의자들의 바램대로 적어도 지방차원에서 추첨제도가 실시될 수 있도록 하는 차별화된 전략과 방법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 22일 정오, 여의도공원에서 녹색정치선언식을 마치고 자전거 등으로 연설회가 열리는 대방동 여성회관까지 이동한 당원들. ⓒ 민주노동당
     

    초록은 민주노동당을 넘어설 수 있는가?

    계급적 토양을 넘어 초록적 토양이 아직은(?) 덜 만개된 한국에서 초록(녹색)정당을 출범시키겠다는 초록정치연대의 고군분투도 대단하고 놀랍다. 정말 용감하다는 생각이 든다.

    서구의 경우 투표 행태와 정당 형성이 자본과 노동의 사회적 균열을 반영하는 계급적 대중정당에서 후기산업사회의 탈물질주의 및 신사회운동을 반영하여 녹색정당이 출현하였으나, 한국의 경우는 1970년대 산업화를 시작하여 1990년대에 후기산업사회가 도래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을 대변하는 노동정당은 30년, 녹색정당은 10년이나 지체되어 2004년 17대 총선 이후에 민주노동당이, 2007년에 초록정당이 정치적인 명함을 내밀 수가 있었다.

    이렇게 지체된 이유는 아마도 남북분단에 따른 극우-보수정권의 등장, 좌익-좌파-진보세력 탄압 및 억압(법제도, 정치현실), 우익 독점에 의한 산업 자본주의의 발전, 레드콤플렉스(red complex)가 존재하는 가운데, 민주화의 전개가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좌-우익 대결, 계급균열이 정치적으로 억압(suppressed)된 가운데, 지역주의적 대결이 가장 핵심적인 균열 구조로 등장하고, 3김이 이것을 정치공학적으로 이용하고 유지함으로써, 3김이 정치적으로 퇴장한 지난 2002년 대선 이후에나 민주노동당과 초록정치연대가 정치적 빛을 볼 수가 있었다.

    이같이 지체된 이유로, 노동영역을 넘어 ‘포괄적 진보영역’(생태, 소수자, 인권, 평화, 여성)을 담아야 하는 민주노동당의 존재와 그것의 존재적 기반은, 탈근적 정치담론을 전문적으로 담아야 하는 초록정당의 출현에 또는 초록을 차별화하는 데, 불리한 환경 또는 위협요소(?)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정당정치가 서구의 경우처럼, 계급균열에 기초한 정당정치를 가져오지 못하고 이를 대신한 지역주의 균열이 판치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더욱이 후기 산업사회적 특징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민주노동당이 순진하게, 시대착오적인 단계론적 접근으로 노동과 계급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민주노동당은 노동을 넘어 녹색을 비롯한 포괄적 진보영역을 주장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이 생존을 위해 거버넌스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서구의 계급적 대중정당들이 녹색정당이 출현한 것에 충격을 받아, 생존 차원으로 녹색정당의 가치와 아젠다를 순식간에 흡수하여, 녹색의 이미지를 포섭하여 결과적으로, 녹색정당의 정치적 진출을 어렵게 하였듯이, 민주노동당도 그렇게 할 가능성이 크다.

    또한 민주노동당의 지배적 이념인 사회주의가 이념형에서 생활 속에 내려와 소통하거나 아니면 수정 정정 되거나 또는 반증되는 ‘생활형’이 되지 못함으로써, 자신의 올바름만을 믿는 종교집단이나 네오콘집단이 하는 것처럼, 천국의 세계만을 배회하거나, 아니면 이념으로 현실을 내려누르려고 일방주의적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초록정당의 녹색주의(생태주의 이념)도 생활형이 아니라 이념형으로만 존재한다면, 민주노동당의 수준과 다를 바 없다고 본다.

    특히, 민주노동당 내 일부 정파들은 이념적 가치와 신념이 너무 강한 나머지, 미국식 민주주를 전 세계에 급진적 방식으로 확산시켜보겠다는 미국의 이상주의자들인 네오콘처럼,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적극적인 외교를 하지 않고 일방주의적으로 활동한다(아이러니하게도 외교를 더 열심히 하는 쪽은 미국의 현실주의자들이다). 마찬가지로 초록주의자들은 초록의 가치와 신념만을 가지고 네오콘처럼 행동할 가능성도 크다.

    이상의 논의를 정리해 볼 때, 초록은 포괄적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과의 경쟁에서 생존할 수 있겠는가? 더더욱 녹색주의(생태주의)적 이념형에서 시궁창 같은 현실 영역으로 내려와 생활형으로 소통할 수 있겠는가? 초록은 필자와 같이 이상주의자들에게 지친 사람들을 구원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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