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쪽에 무지개 뜨면 강가에 소 매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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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7월 15일 09:2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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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지난 13일 광주에서 열렸던 황광우의 책 『젊음이여 오래 거기 있거라』출판 기념회에서 필자가 발표한 내용입니다. <편집자 주>

    우리 속담에 “서쪽에 무지개가 나타나면 강가에 소를 매지 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서쪽에 무지개가 나타나는 것은 동쪽에 태양이 있을 때이니까 아침나절이며, 이로부터 서쪽 먼 곳에 비가 왔다고 예측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무지개는 대개 소나기가 한 차례 지나가고 난 다음에 나타나고 우리나라에서는 바람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부니, 가랑비가 아닌 소나기가 내릴 확률이 매우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담긴 속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침 오늘도 추적추적 비가 내립니다. 멀리서 태풍이 몰려온다고도 하는군요. 이 장마가 그치고 태풍도 다녀가면 우리는 또 다시 가난한 이들을 위해 수재의연금을 모아야 할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그 사이에서도 돈벌이를 궁리할지 모릅니다.

    저는 오늘 앞서 말씀드린 속담을 통해 여러분과 다른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오늘 두 개의 무지개를 보았습니다. 그 하나는 서쪽 하늘에 걸린 무지개이고, 다른 하나는 언젠가 우리 누리 위에도 드리울 무지개입니다.

    오늘 뉴스엔 “다우 지수가 새로운 땅을 밟았다”고 나왔습니다. 4년래 최대 상승폭이랍니다. 덩달아 우리 증시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습니다. 하루 평균 2천억 원 규모의 주식형 펀드가 증시로 몰려든다고도 합니다. 해고의 칼날 앞에 목을 내놓고 있는 이랜드 비정규직 노조원들에게는 꿈같은 이야기겠지만 굴러들어오는 돈을 주체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장밋빛 무지개와 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 무지개가 빗속에 나앉은 수많은 노동자들의 눈물과 설움으로 빚어낸 무지개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정당하게 받아야 할 대가를 가로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려 만들어낸 무지개라는 것을 말이지요. 그리고 그 무지개가 걷히고 나면 또다시 많은 사람들 머리 위로 ‘돈벼락’이 ‘날벼락’이 되어 떨어질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젊어서 우리는 다들 그렇게 배웠고 IMF의 고통을 삭이며 우리는 또 몸으로 겪었습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렇게 알고 있는 우리는 내심 ‘날벼락’을 맞는 일이 있더라도 죽기 전에 한번쯤 ‘돈벼락’을 맞아보기를 꿈꿉니다. 더 많은 돈이 있으면 더 많은 좋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을 정당화합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핑계로 그 ‘좋은 일’을 할 시간은 자꾸만 늦추어질 뿐입니다.

    그 사이 로스쿨 법안이 통과되었고, 의학전문대학원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이들 대학원의 등록금이 2천만 원을 넘나들 것입니다. 그 과정을 5~6년 동안 마치려면 수억 원의 돈이 들겠지요. 한 해에 수천만 원의 돈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수년 동안 쓰기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일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밑지는 장사가 어디 있습니까? 수억 원을 들여 전문대학원을 나온 그들이 평생 얻어갈 수익은 또 얼마나 많을까요? 정부는 그 수익을 보장해 주기 위해 보건의료 분야를 돈벌이 시장으로 내동댕이치며 의료서비스를 ‘선진화’, ‘합리화’하겠다고 꼬드깁니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은 이젠 정말 옛말이 되었고, 아마 지금의 노무현 대통령은 그 마지막 용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 치열했던 80년대보다 훨씬 더 고약한 계급사회의 족쇄가 착착 우리들의 손발에 채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강가에 매인 소들처럼 말이지요.

    그 족쇄를 깨부수지 못하는 한, 홍수가 나도 차가 없어 멀리 도망가지 못해 수장당해야 했던 뉴올리언즈 흑인들의 비극이 그저 남의 나라 얘기로만 머물러 있지 않게 될 것입니다. 다우지수가 새로운 땅을 밟을 때, 바로 그 땅 위에서 수많은 흑인들이 젖은 땅을 찢으며 절규하였다는 것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서쪽 하늘의 무지개의 현란함에 도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선조들의 지혜로운 말씀처럼 서쪽에 무지개가 나타나면 강가에 소를 매지 말아야 합니다. 겉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그 무지개가 걷히고 나면 이제 곧 검은 구름이 몰려들 것이고 소나기가 쏟아져 강가에 매인 소들을 죽일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요즘 중학교 아이들이 배우는 도덕 교과서에는 옛날 동구 계림동에 있었던 경향방죽 이야기가 나옵니다. 조선 시대 중엽, 이곳 광주에 이 생원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하는군요. 어느 해 여름, 큰비로 마을 앞 개천의 둑이 터져 불어난 흙탕물에 잠기려는 개미집을 발견하고, 이 생원은 가까스로 개미 떼를 구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해, 이 생원의 집에 원인 모르게 쌀이 쌓이기 시작하더니 마당 한 구석을 가득 채웠습니다. 한편, 이웃집의 광에서는 이상하게도 쌀이 조금씩 없어지더니, 마침내 텅 비게 되었다고 하는군요. 이 일로 이생원은 관가에 잡혀가게 되었지만 개미들이 은혜에 보답한 것을 알게 된 관아에서는 이 생원을 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 이 생원은 장마가 지면 개미집에 물이 잘길 것을 염려하여 튼튼하게 방죽을 쌓아 두었는데, 이것이 이곳 광주 계림동에 있었던 ‘경향방죽’이라고 합니다.

    우리도 그 예전의 이 생원이 했던 것처럼 서쪽에 무지개가 나타나면 든든한 방죽을 쌓읍시다. 그래서 개미떼와 같은 우리의 이웃들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머지않아 큰비가 올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선택해야 합니다. 큰비를 대비해 내 곳간을 가득 채울 것인지, 아니면 쌀독의 쌀을 조금씩 덜어 방죽을 쌓을 것인지.

    우리의 생애가 어떻게 끝날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곳간을 가득 채운 돈으로 부귀를 누리고 죽을지, 아니면 어느 틈엔가 개미들이 들어와 그 모든 것들을 쓸어가 버릴지.

    알 수 없는 우리의 미래지만, 우리 이웃들의 곤궁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여전히 ‘선택’과 ‘결단’의 기회가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과거로부터, 그리고 우리의 미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면, 우리가 뜨거웠던 80년의 기억들을 단지 추억하고 있을 요량이 아니라면, 우리의 선택은 분명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새롭게 시작할 첫 출발점에 서 있습니다.

    오늘은 황광우 선배의 『젊음이여 오래 거기 있거라』의 출판을 기념해 우리가 여기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하지만 앞서 가신 윤한봉 선생님의 말씀처럼, 들불 열사들을 추억하고 기념하는 ‘기념사업회’는 필요치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떠한 행동으로도 이어지지 않는 ‘출판기념회’는 아무 쓸모가 없을 것입니다. 다가올 태풍 속에서도 어깨를 부여잡고 굳건히 서 계실 여러 선후배님들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그 어깨동무한 우리의 모습이 제가 생각한 또 하나의 무지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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