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머리카락 꾸민다고 그 속까지 꾸며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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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7월 14일 10:5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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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그리 두껍지 않은 소설책 표지에는 “타인의 삶을 훔쳐 불멸의 생을 엮는 도둑의 이야기”라는 카피 문구가 실려 있다. 이같은 카피에 익히 속아왔던 터라 큰 기대는 결코 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나로 하여금 이 책을 사고, 읽고 또 글을 쓰게 한다. 작가라는 존재, 글을 쓰는 존재는 내 작은 도서관의 영원한 화두이기 때문이다.

       
     
     

    우선 도둑. 소설에 등장하는 ‘도둑’은 타인과 시선을 마추침으로써 타인의 내면에 깃든 기억을 훔치는 도둑을 말한다. 그 도둑의 이름은 로즈. 해설에 따르면, 영어로 Lose는 잃다, 상실하다의 의미 상실 등을 의미한다. “로즈, 하나의 시선. 그것은 그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었다.”(p.7)

    타인의 기억을 훔치는 행위가 도적질이 되는 것은 그가 타인의 동의를 얻지 않는 것은 물론 기억을 뺏긴 당사자는 그 기억이 삭제됨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현실을 맞게 되기 때문이다. 가령 소설의 주인공인 디안과 조라는 아주 막역한 친구인데, 도둑은 조라에게서 디안과의 우정에 대한 기억을 뺏음으로서 조라는 더 이상 디안을 친구로 인식할 수 없게 된다는 식이다. 도둑은 곧 "정신적인 식인종!“(p.192)이다.

    다음 그가 “지나가는 도둑”인 까닭. 그는 마구잡이식 약탈자이다. 로즈에게는 시간과 공간, 인간과 사물, 소리와 빛 등 그 모든 게 약탈의 대상이다. 그래서 그는 결코 머물지 않고 늘 배회하며, 모든 것을 지나간다.

    다음 도둑의 최종 목적. 로즈는 왜 이같은 기억의 약탈 행위를 벌이는 것일까?

    “난 가장 완전하고 완벽한 책을 쓰고 싶은 거야. 단순한 종이와 잉크에서 벗어나 내가 만들어 놓은 배경 속에서 인물을 보고, 느끼고, 듣고, 만지고 싶은 거라고. 독자들의 마음속으로 감동이 스며들어 그들 자신의 기억처럼 느껴지기를 원하는 거야.

    난 어떤 것 하나라도 빠뜨리는 걸 원하지 않아.…중략…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건……일종의……삶 그 자체의 기록이야.”(p.210~211)

    곧 타인으로부터 뺏은 기억과 상황과 심리를 빠짐없이 기록함으로써 하나의 거대한 세계를 이루고자 하는 의도인 셈이다. 로즈는 그것을 “난 극사실주의 작가야, 조금 야망이 큰.”(p.211)이라고 표현한다.

    이쯤해서 요약해보면, “작가는 타인을 훔치는 도둑이다”라는 하나의 명제를 이끌어낼 수 있으리라. 그런데 이 명제, 참으로 낯익지 아니한가! 현실과 인물을 관찰하고 그것을 자신의 내면에서 숙성시켜 표현하는 존재가 곧 작가라는 명제에서 특정한 한 측면을 두드러지게 부각시키고 있는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사실 『지나가는 도둑을 쳐다보지 마세요』는 하나의 기본적인 아이디어에 기반하고 있는 소품 혹은 연극으로 치면 소극장용 연극 그 이상을 넘지 않는다. 등장인물의 수도 지극히 제한되어 있고 사건과 시공간 역시 마찬가지다. 다분히 심리적인 묘사 쪽에 치중하는 것 역시 그렇다.

    물론 철학적이고도 인식론적인 제스처를 취하는 부분도 있다. 작가는 로즈의 반대편에 디안이라는 주인공이자 화자를 등장시키고 있는데, 작가는 이 디안으로 하여금 자신을 데카르트주의자라고 말하게끔 한다.

    “오래 전부터 나는 일에서나 일상 생활에서 매 순간, 어떤 상황에서나 마음속으로 데카르트 철학을 신봉하는 합리주의자였다. 따라서 지금까지 생각이나 행동을 하는 데 있어 평행을 유지해 왔다. 균형 잡히고, 논리적이며, 합리적인 상호관계를 지켜온 것이다.”(p.95)

    작가는 이같은 디안의 ‘자아선언’을 기본으로 삼아 로즈와 디안의 대립과 서로에의 매혹이, 데카르트적인 세계와 그렇지 않은 세계의 대립과 혼융과 다를 바 없다라고 말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 시도는 근본적으로 모순적이고도 자가당착적인 결과를 낳을 뿐이다.

    왜냐하면 로즈는 스스로를 “난 극사실주의 작가야”라고, 곧 일상적인 이성의 눈과는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고 기록한다라고 말하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그의 기록은 그저 사실의 풍부한 기록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세상을 다르게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좀 더 디테일하게 본다는 차이 정도다.

    조금 다르게 말하면 고지식한 데카르트와 조금 융통성이 있는 데카르트의 차이. 그 차이에는 철학은 없고 그저 철학에 대한 포즈만 있을 뿐이다.

    포즈라는 말이 나와서 그런데 『지나가는 도둑을 쳐다보지 마세요』는 많이 꾸민 소설책이다.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일러스트레이션이 그렇고 또 그 일러스트레이션의 부분들로 짐작되는 그림들로 다시금 본문의 일정 부분을 장식하고 있는 것이 그렇다.

    그러나, 작가의 철학 못지않게 ‘편집의 철학’ 역시 포즈만 남아 ‘편집의 빈곤’만을 드러낼 뿐이다. 조금 부티를 풍기는 미용실에 가면 『마리 클레르』라는 라이센스 잡지를 간혹 볼 수 있다. 이 소설은 “프랑스 『마리 클레르』가 선택한 최고의 소설”이다. 미용실과 소설, 딱 그 맞춤이다. 머리카락을 꾸미면서 그 속까지 꾸밀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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