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는 끝나고 사회과학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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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7월 12일 09:0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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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항쟁 20주년을 맞아 당대비평 편집위원들이 책을 한 권 내놓았다. ‘민주화는 실패한 기획인가, 87년 이후 한국 사회에 대한 성찰’이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 책 『더 작은 민주주의를 상상한다』(웅진지식하우스)은 두 개의 좌담과 13편의 글이 실려 있다.

<레디앙>은 당대비평 편집위원회와 공동기획 형식으로 책 내용 가운데 일부를 나눠 싣는다. 이 글의 필자인 소설가 방현석은 자신을 ‘그’로 객관화시키면서 기억해낸다. 필자는 전두환 정권 시절인 85년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지기 위해’ 인천으로 가서 14년 동안 현장 활동을 했다. <편집자 주>

선명한, 그러나 불완전한

   
  ▲ 방현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20년, 벌써 그렇게 되었다. 아득하다. 기억의 정확성을 신뢰하기 어려울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7년은 그에게 지워지지 않는 페이지로 남아 있다.

이상한 일이다. 10여 년 전의 어느 한 해, 심지어는 바로 몇 년 전의 일도 까마득한데 그보다 세월의 두께가 훨씬 두터운 87년은 어떻게 생생한 기억으로 남은 것일까. 그는 집히는 대로 머릿속에서 숫자를 뽑아본다. 93, 95, 98, 2003…… 이해에 내게 무슨 일이 있었지? 그의 머리에 퍼뜩 떠오르는 것이 없다. 일 분의 기억도 남기지 못하는 하루가 있는 것처럼 하루의 기억도 남기지 못하는 한 해도 있다.

그의 인생에서 치열했던 해는 87년 말고도 여럿 있다. 그런데 87년만 유난히 또렷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그중에서 ‘기억의 연대감’을 빼놓을 수는 없다. 그 말고도 그 연도를 기억하는 이들이 그의 주변에 많다는 뜻이다.

기억은 그것을 함께 하는 사람과 더불어 살아 있는 것이다. 세월이 바래서 역사가 되는 것이 아니고 기억이 쌓여서 역사가 된다. 더불어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기억은 추억으로 희미해지고, 결국 사멸한다.

87년은 세월과 함께 그들의 뇌리 속에서 차츰 잊혀져온 것이 아니라, 서로 같으면서도 다른 기억의 도움을 받아 그들의 뇌리 속에서 그 형상을 강화해온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에 위험이 있다. 기억의 상호보완, 공적 기억과 사적 기억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사실이 편집되고 혼재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기억과 타인의 기억이 뒤섞이고, 어떤 부분은 지워지고 어떤 부분은 과장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그가 선명하게 기억한다고 여기는 것들도 사실은 몹시 불완전한 개인적인 추억의 편린들에 불과한지 모른다.

무엇이 그들을 87년에 이르게 했을까

87년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아마 부끄러움과 모욕감이 교차하는 그 어느 지점에서 87년은 시작되었을 것이다. 적어도 그에게는, 그렇게 6월 항쟁이 시작되었다. 80년 봄.

찬란했던 서울의 그 봄날, 그는 대학교 1학년생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과 함께 유신체제가 막을 내린 서울의 대학가는 들뜬 희망으로 술렁거렸다. 잔디밭에서는 거의 매일같이 집회가 열렸고, 학생식당에서는 철야농성이 이어졌다. 게시판에는 긴급조치 위반으로 학교를 떠났다가 돌아온 복학생들의 단식 기간을 알리는 숫자가 덧셈을 계속했다.

그와 함께 입학한 동기들의 다수에게 이러한 캠퍼스의 풍경은 혼란으로 다가왔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그들 세대에게 박정희와 대통령은 분리되어 사용될 수 없는 단어였다. 그가 태어난 1961년에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는 그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대통령이었다.

그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각하였던 박정희 이외에 그 어떤 대통령도 그들은 모셔본 적이 없었다. 꿈에서조차도. 내가 만약 대통령이라면, 내가 만약 대통령이 된다면, 하는 가정법은 반역이고 불경이었다. 대통령은 오로지 박정희여야만 했다.

링컨 대통령에 대한 책은 불온한 것이었고, 링컨 찬양강연을 하는 김동길은 반체제 인사였다. 그런 그들 세대에게 선배들이 불러주는 심수봉의 노래는 몹시 당황스럽고 낯설었다. ‘유신하면 생각나는 그때 그 ○○……’

고등학교 시절 사르트르와 함석헌에 매료되었던 그는 다른 동기들보다 조금 조숙했던 편이었다. 1학년 과대표로 뽑힌 그는 복학생협의회 회장이었던 송기원의 칭찬에 한껏 고무되어 있었다. 대학 재학 중에 시와 소설이 신춘문예에 동시 당선하여 등단하고, 유신반대 시위로 제적당한 송기원은 그들 학과에서 신화적인 존재였다. 그들 학과 학생들, 그중에서도 1학년들이 가장 열성적으로 시위에 앞장선 요인 중에서 송기원이라는 존재를 빼기는 곤란하다.

그 와중에도 그들은 학교 연못가에서 시화전을 열었다. 어찌되었건 문학을 해보겠다고 실기 시험을 통해 16.7대 1의 경쟁을 뚫고 대학에 들어온 문학도였다. 시위의 분위기와는 거리가 먼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그들의 시는 회화과 학생들에 의해 그림이 되어 내걸렸다.

송기원의 시를 그린 그림은 그의 차지가 되었다. 「그대 언 살이 터져 시가 빛날 때」였던가. 집회와 시위가 끝나면 술집으로 몰려가 문학을 떠들고, 밤이 깊어지면 철야농성이 벌어지고 있는 학생식당에 올라가 잠을 청했다.

봄은 길지 않았다. 영등포와 여의도를 거쳐 광화문 진출을 시도하다 서울역에서 회군한 이틀 뒤, 문무대 입소 훈련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등학교에 이어 대학교에서도 교련 수업은 없어지지 않았다. 1학년은 성남에 있는 문무대로 불리는 학생군사학교에서 일주일간 병영훈련을 받아야 했다. 일찍부터 학원병영화 정책의 산물이라며 대부분의 대학이 문무대 입소 거부를 선언했고, 그들의 대학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막상 입소일이 닥쳐왔을 때 그들은 거부 입장을 철회했다. 그해 첫 번째 입소 교육 대상이었던 서울대가 입장을 바꾸어 ‘국가안보를 걱정하는 국민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군부가 악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입소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무슨 장사라고 서울대도 응한 입소 훈련을 거부하겠는가. 1학년 과대표협의회에서 입소 훈련을 받아들이기로 했고, 입장 변경을 밝히는 성명서는 그가 섰다. 서울대에서 발표한 것과 비슷한 내용이었는데,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가 임박했다는 풍문이 나돌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입장이 추가되었다.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로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에 문무대에서 즉시 퇴소하겠다는 요지였다. 문무대 입소 훈련은 교련 교육의 연장이고, 교련 교육은 학교 교육의 연장이라는 정부의 논리에 따른다면 휴교령이 내려져 학교 교육이 중단될 경우 교련 교육도 중단되는 것이고, 교련 교육이 중단되면 문무대 교육도 중단되어야 마땅하다, 는.

그들이 문무대에 입소한 날은 그해 5월 16일이었다. 문무대에서 두 번째 아침이 밝아오기 전에 그는 중대장의 호출을 받았다. 중대장은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휴교령이 내려졌다, 세상이 완전히 달라졌다며 자중하라고 충고했다. 중대장들로부터 호출을 받은 과대표는 그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중하지 않았다.

그들은 ‘귀순용사’의 강연이 끝나기를 기다려 단상을 점거하고 미리 준비한 성명서를 발표한 다음 연병장으로 몰려나가 시위를 벌이며 퇴소를 요구했다. 점심을 거른 채 농성하고 있던 연병장에 계엄군이 투입되었다. 착검을 한 채 삼 면을 포위하고 조여드는 공수부대원들에게 쫓겨 학생들이 내무반으로 달아났지만, 달아날 수 없는 사람들이 몇 있었다.

단상에서 성명서를 발표하고 ‘결사투쟁’을 다짐하며 시위를 주도한 과대표들이었다. 마지막까지 연병장에 누워 버틴 것은 단상에서 그 성명서를 발표하고 ‘결사투쟁’을 선창한 공대의 과대표와 그 성명서를 작성한 그였다.

얼굴을 검게 칠한 계엄군과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두려움은 풍선처럼 부풀었다. 도망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내무반으로 몰려 들어간 친구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성명서를 쓴 것을 후회하고 후회했다. 다시는 감당할 수 없는 글을 쓰지 않으리라.

그러나 모든 후회는 항상 한걸음 늦게 찾아오게 마련이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눈을 감고 완전히 벌렁 누웠을 때 같은 과 친구들이 달려와 그의 팔 다리를 집어들었다. 놔라, 놔. 여기서 죽을 거야. 그렇게 외쳤지만 속으로는 얼마나 다행스러워했던가.

주동자로 지목된 과대표들은 보안사의 조사를 받았다. 계엄 포고령을 위반한 첫 사건이 신성한 군대 연병장에서 벌어졌다며 보안사의 수사관은 수시로 권총을 뽑아들고 그들의 머리를 겨누었다. 노(老)철학자인 총장이 달려와 위관급 장교에게 선처를 호소하는 장면을 지켜보며 그들은 울지 않을 수 없었다. 훈련병이었던 그들은 어느새 포로의 신세가 되어 있었다.

구겨진 자존심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광주의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모이기로 했던 영등포에 나가지 않았다. 구겨진 자존심은 걸레가 되었다. 그는 그해 봄 그가 집필했던 성명서들의 어떤 구절도 책임지지 못했다.

그들의 우상이던 송기원은 ‘김대중으로부터 문교부의 간부자리를 약속받고 내란음모에 가담한 일당’의 한 명으로 신문 1면에 등장했다. 입학 실기 시험에서 시를 썼던 그는 골방에 처박혀 깔작깔작 시를 쓰다 갈기갈기 찢어버리곤 했다. 무엇을 어떻게 쓴다 해도 그건 비겁이고 기만이었다.

2학기와 함께 학교가 문을 열었다. 주류와 비주류로 양분되어 있던 그들 학과에 새로운 세력이 등장했다. 주류는 문학을 신처럼 받들며 줄기차게 술을 마시는 집단으로 말 그대로 주류(酒流)이자 주류(主流)였다. 반면에 술집을 멀리하고 도서관을 오가거나 문학 이외의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진 부류는 비주류(非酒流)이자 비주류(非主流)였다. 이 두 부류 사이에 ‘언더’라는 신흥세력이 빠르게 팽창하면서 3자 정립의 시대가 열렸다.

80년의 패배는 새로운 저항을 모색하게 했다. 새롭게 등장한 군부 정권은 박정희만 사라지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라고 기대했던 그들이 얼마나 순진했는지를 똑똑히 일깨워주었다. 단순히 한 명의 권력자가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역학관계가 권력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규정한다는 소박한 사실에 대한 재인식, 광주학살을 통해 권력을 획득한 철저한 악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저항 세력도 철저하게 조직화되어야 한다는 현실적 필요성이 저항운동의 양상을 변화시켰다.

낭만주의의 시대가 끝나고 사회과학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저항 세력을 조직화하는 핵심적인 과정이 학습이었고, 그 학습은 ‘언더’로 불리는 지하서클이 주도했다. 사회과학 이론이 곧 힘이고 조직이었다. 이론의 목록이 빠르게 바뀌었고, 금기의 이론들이 숨 가쁘게 소개되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그것은 대결하는 두 진영의 급격한 세력 재편의 과정이었다. 저쪽은 개발독재로 요약되는 박정희에서 신군부로 재편되었고, 여기에 맞서는 이쪽은 재야로 불리는 명망가들에서 학습되고 조직된 청년학생들로 재편되었다.

전두환 장군의 신군부는 대공분실과 보안사라는 이름을 대중들의 뇌리에 은밀히 각인시키며 상대를 제압하려고 했고, 저항세력은 급진적 이론으로 무장하며 대학가에서 세력을 확장했다.

박정희를 제거하고 지배 진영이 세력 재편을 이룬 배경은 70년대에 점증된 민중의 불만을 제어하기에는 긴급조치라는 칼날마저 무디어진 유신체제의 시스템이 한계에 봉착한 측면도 있지만,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관리자인 미국의 장기적 전략에도 장애를 초래할 만큼 유신체제가 낙후되고 경직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회주의 진영과의 경쟁이 정점에 이르렀던 70년대를 거치면서, 세계자본은 자기 확장의 위기를 자본과 시장의 세계적 통합을 통해 돌파하기로 방향을 설정했다. 그러한 세계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지구적으로 시장을 단일화하고 자본이 제약 없이 이동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야 했고, 그러한 경제적 시스템의 구축에 장애가 되는 전근대적 정치체제는 해체의 대상이 되었다. 박정희의 유신체제가 그 대상에서 벗어날 리 없었다.

신군부로 재편된 지배세력은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훨씬 유연한 일부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재편된 지배세력에서 유신체제에 저항한 민주주의 블록이 완전하게 배제됨으로 인해서 국내의 정치적 불만은 더욱 고조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무력을 동원한 재편과정의 인위성은 저항세력에게 강력한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정통성을 완전히 결여한 전두환 정권의 출현 과정은 급진적 이론과 변혁세력을 확산시킨 일등공신이었다. 광주학살을 통해 정권을 획득한 그들의 존재 자체가 모든 형태의 이론과 저항 행위를 정당화시켰다. 그들이 국민에게 허용한 것은 복종과 굴욕뿐이었다. 저항하지 못한다고 해서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국민들은 저항세력의 상대적 급진성을 용인하는 방법으로 억압세력을 응징했다. 그 용인에는 저항 행위만이 아니라, 이론과 논리까지 포함되었다.

대학가마다 문을 열기 시작한 사회과학 서점은 변혁 이론의 보급기지였다. 그가 다니던 학교 앞에도 사회과학 서점이 등장했고, 그곳에서는 정식 출판물뿐만 아니라 복사본 원서와 팸플릿을 유통시켰다. 그는 학교 앞 사회과학 서점의 서가에 꽂힌 책의 위치를 거의 외울 정도였다.

백두산 천지를 그린 판화를 밑그림으로 삼은 포장지로 표지를 가린 책을 들고 다니는 사람은 기습시위의 현장에서 마주치게 마련이었다. 어지간한 사회과학 서적은 출간되기만 하면 광고 한 번 없이 수천 부가 팔렸다. 판금된다는 소문이 나돌면 내용 여부를 떠나 ‘확보’ 차원에서 사두려는 경쟁이 벌어졌다.

그의 세대가 맹렬하게 이론적 금기를 넘어서며 공포 정치에 도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광주에 대한 부채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광주의 죽음을 외면하고 살아남은 자라는 부끄러움이 그들의 내면을 지배했다. 광주시민을 학살하고 권력을 장악한 무리를 정부로 모시고 살며 모욕감을 느끼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시대를 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휴교령이 끝나고 캠퍼스로 돌아온 대학생들은 자신의 가슴에 붙어 있던 학교 배지를 떼어내기 시작했다. 한 학기가 지났을 때 대학 배지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대학생은 더 이상 자랑이 될 수 없었다.

광주에 대한 부채감, 80년의 무력한 패배에 대한 비판적 성찰에서 시작된 학습 경쟁은 텍스트에서 현실로 확장되었다.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리며 무권리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는 노동자들의 희생 위에 이 사회가, 자신이 서 있다는 자각이 대학사회에 확산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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