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민족주의는 진보적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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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7월 11일 02:2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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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화의 시대를 맞이하여 제주는 드디어 본토로부터 독립하여 탐라국으로 돌아간 것인가? 제주특별자치도 출범 1주년을 맞이한 제주에서 아직 큰 변화를 느낄 수는 없었다. “좀더 기다려 봐야지요.” 택시 기사 한 분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시외버스들은 특별자치도 출범 1주년 축하 펼침막을 배에 걸친 채 달리고 있었다.

    국제 자유도시가 되고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더 많은 자치권을 부여받은 제주특별자치도, 이제 도지사는 대통령이 되고 도의원들은 국회의원이 되어 모든 걸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된 것인가? 모든 언론은 제주특별자치도특별법 개정안이 7월 3일 국회를 통과하여 특별법 시행 1년 만에 자율권을 대폭 강화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세계화의 바람이 가장 먼저 부는 제주에서 혹시 세계시민의 긍지를 느껴보고자 했던 기대는 무너졌다. 아직은 모든 것이 미래형이었다. 흔히 말하는 세계화, 지방화, 정보화의 시대 흐름 속에서 국경은 희미해지고 국가의 역할은 축소되고 지방정부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는 바로 그 변화를 아직은 몸으로 느낄 수 없었다.

    세계화와 미국화는 같은가?

       
      ▲ 탐라종도의 대야수포  (국립민속박물관소장)  
     

    제주특별자치도 출범 1주년 기념 학술세미나에서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윤성식 교수는 이야기하였다. “제주특별자치도의 성공은 무엇보다도 교육과 의료 부문의 자치에 달려 있다.” 그래서 교육부와 보건복지부는 제주자치도가 새로운 교육제도나 의료제도를 도입하더라도 전혀 상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윤성식 교수는 덧붙였다. “해외에 천문학적인 조기 유학비용을 사용하는 우리나라가 이중 일부만을 제주에서 사용하여도 한국 경제에 큰 보탬이 될 것이다. ····미국 유명 병원에는 한국인 환자를 위한 통역이 있을 정도로 한국은 고급의료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최근 급증하였다. 제주가 세계적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게 되면….”

    그는 정부가 제주에서 추진하고자 하는 세계화는 미국화라는 사실을 실토하고 말았다. 미국의 교육자본과 의료자본이 자유롭게 돈벌이를 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것이다. 그나마 존재하는 우리나라의 교육과 의료의 공공성을 무력화시킬 미국화를 제주에서 먼저 실험하고, 제주를 미국식 제도의 도입 창구로 삼겠다는 것이다.

    과연 지방 언론들은 미국의 한 의료법인이 제주도에 10억 달러를 투자해서 큰 병원을 지으려고 한다고 보도했다. 본토와 마찬가지로 제주에서도 세계화는 미국화로 축소 왜곡되고 있었다. 홍콩 식의 1국 2체제의 장점을 강조하며 제주를 미국화의 전진 기지로 삼으려고 한다. 그러니 미군 기지가 들어오려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새로운 보편주의의 시대는 오고 있는가?

    사실 세계사에서 민족주의의 시대는 극히 짧았다. 흔히 중세는 보편주의의 시대라고 하지만 고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근대라는 짧은 기간 국민국가의 시대가 유럽사를 장식하고 유럽의 지배에 저항하는 식민지 종속국의 민족주의가 등장했다. 그러므로 긴 인류 역사의 흐름에서 민족주의는 오히려 예외적 현상이다.

    베트남의 승려나 조선의 선비나 마찬가지로 한자로 시를 짓고 유럽의 모든 나라의 지식인들이 공통적으로 라틴어로 편지를 교환했다. 마키아벨리의 시대에 베네치아 사람이 있었지, 이탈리아 사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세계화는 비정상적인 상태로부터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고 민족주의의 퇴조는 대세다.

    그래서 세계화를 반대하기보다는 대안 세계화를 말하는 것이 옳다. 자본의 세계화에 맞선 노동의 세계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맞선 신사회주의적 세계화를 말해야 한다. 이 시대에는 개별 국가적 사고로부터 벗어나야만 진정한 진보가 가능하다. 신자유주의자가 주도하는 세계화를 반대한다고 민족주의로 후퇴할 필요는 없다.

    2006년 통계로 신혼 부부 10쌍 중 1쌍이 국제결혼이며 특히 농어촌에서는 41%가 국제결혼이며 경남(52.6%), 경북(50.2%)에서는 절반을 넘어선 시대에 구태의연한 민족주의, 인종주의가 가한가? 우리는 아직 식민지 경험의 정신적 외상을 극복하지 못하여 민족적 자존심을 세우기 급급하고 빈곤국에 대한 원조에는 인색하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진보적인가?

    민족주의가 진보적인 건 매우 예외적인 경우뿐이 아닐까? 민족주의가 진보의 편일 수 있는 건 식민지에서뿐이 아닐까? 윤동주의 시만큼이나 윤동주의 민족주의도 아름답다. 한용운의 민족주의도 아름답다. 그러나 그들은 식민지의 청년이고 승려였다. 그들의 민족주의는 오히려 ‘하늘이 내린’ 대일본제국을 반대하는 보편주의였다.

    전 세계 식민지 종속국 민중들과 연대하여 제국주의와 파시즘에 맞서 싸우던 시절의 저항하는 민족주의는 보편 지향이었고 진보였다. 그러나 이제 우리나라는 식민지가 아니다. 동남아 민중들의 눈에 우리나라는 새로운 제국주의 나라이며, 자기 나라 노동자 농민을 착취하거나 수탈하고 있다. 한국 민족주의는 진보일 수 없다.

    대한민국의 민족주의는 잘못하면 광포한 대외 팽창주의로 변질될 수도 있다. 독도는 우리 땅이 아니라 갈매기들의 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진정한 진보다. 그런데 우리는 예사로 ‘대마도는 우리 땅’을 외치고 ‘만주는 우리 땅’을 외치고 연변에 가서는 공공연하게 간도를 우리 영토로 주장하니 중국의 동북공정을 자초하고 있다.

    만주의 고토를 회복하자는 ‘다물’은 이미 영향력 있는 구호가 되었는데, 연해주에 황무지를 돈으로 사고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을 다시 데려와서 농장을 만들자는 움직임은 장기적으로 만주와 연해주에 대한 영토확장의 꿈을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물질적 토대를 확보한 한국 부르주아 민족주의는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 제주의 신재생에너지, 풍력발전기와 태양광발전기 (사진=녹색연합)
     

    아름다운 제주는 사회생태적 유토피아가 되어야 한다.

    제주만큼이나 많은 문학 작품들의 배경이 된 섬나라 아일랜드에는 유럽 국가들 중에서 예외적으로 진보정당이 없다. 아일랜드는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하고 북아일랜드 문제를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20세기 내내 민족주의의 과잉 상태에 있었다. 최장집 교수가 말하는 대로 과도한 민족주의는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했던 것이다.

    그래서 제주에서 노동자 계급과 진보정당은 민족주의가 아닌 대안 세계화의 담론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야 한다. ‘시대착오적이고 퇴행적인’ 민족주의가 아니라 울리히 벡이 말하는 세계시민적 사회민주주의 대안으로 맞서야 한다. 민족에 대한 강조 때문에 계급 계층 간의 사회경제적 갈등이 묻히도록 해서는 안 된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세계화는 긍정하면서 신자유주의는 거부한다. 그는 좌파가 개별 국가적 관점에서 벗어나야 함을 강조한다. 이상 기후 현상으로 인해 세계 모든 국민과 인종이 모두를 위험하게 만드는 미래를 공동으로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세계시민적 관점, 사해동포적 관점의 기후정책을 좌파는 내놓아야 한다.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아름다운 제주는 과연 대안 세계화의 실험실이 될 수 있을까? 울리히 벡이 말하는 ‘사회생태적 유토피아’ 혹은 ‘세계시민적 사회민주주의’가 제주에서 실현될 수 있을까? 제주 신·재생에너지연구기지를 방문하고, 해변에서 돌아가고 있는 풍력 발전기들을 보고, 전우홍을 만나서 희망을 보았다.

    정직한 사람들, 전우홍과 윤한봉

    전우홍은 6년이나 멸사봉공한 김효상에 이어 민주노동당 제주도당 위원장을 맡을 사람이다. 정직한 크리스챤이고 농민인 그는 임기를 마치면 분회장에 출마하겠다고 약속했다. 지난 지방 선거 당시 제주에서 민주노동당은 20% 이상의 지지를 얻었다. ‘사회생태적 유토피아’에 닿아 있는 그의 비전이 20%의 지지를 받고 있다.

    국립제주박물관의 친절한 공무원 박찬순 씨는 아름다운 제주의 풍광의 이면에 흐르는 민중의 고단한 삶의 역사를 이야기해주었다. 울산시당 노동국장 김성규와 나는 제주 일주버스를 타고 거의 대부분의 마을을 지나갔다. 그나마 지난 몇 년 동안 돼지 가격이 높고 감귤 값도 크게 나쁘지 않아 제주 농촌이 유지되었다고 한다.

    제주로 떠나기 전에 윤한봉 선배의 장례식에 갔다. 그는 마지막 남은, 윤동주처럼 아름다운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항상 미국 망명 생활 중에 만난 여러 인종의 사람들을 ‘형제들’이라고 불렀다. 그는 1981년 4월 29일 밤, 마산항에서 화물선 표범호를 타고 밀항했다. 그러나 그는 내가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정직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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