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학법, 왜 허무하게 무너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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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7월 11일 11:2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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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많고 탈도 많던 사립학교법이 지난 7월 3일 재개정되었다. 보수언론들은 "열린우리당이 한나라당의 양보를 얻어냈다"고 보도했지만 내용을 보면 그렇지 않다.

재개정안은 2004년 12월, 2005년 8월, 그리고 2006년 2월 세차례에 걸쳐 재개정을 위해 제출되었던 한나라당안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한국사학법인연합회 등이 환영논평에서 밝혔듯이 "사학인들이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안이기도 하다.

그간 개정안을 둘러싼 신문지상에서의 논점은 줄곧 ‘개방이사제’였지만, 정작 더 중요한 재개정 사항은 임시이사의 임기를 3년으로 제한한 것이나 이사장 친족의 학교장 임명을 가능하게 허용한 것 등이다. 개방이사제의 껍데기만 고수한 열린우리당은 초심의 지조도, 개혁의 정당성도, 여당의 헤게모니도 모두 잃은 것으로 보인다.

국민의 뜻 외면한 사학법 재개정

2005년 사학법 개정 당시만 해도 "정부입법보다는 내용이 선명한 의원입법을 통해 사학을 투명하게 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던 열린우리당이 국민의 지지도가 70.2%에 달했던 법안을 왜 다시 개정하게 된 것일까? 아마도 열린우리당의 당내 분열이라든가 종교계의 강력한 반발과 같은 이유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법안에도 당내 반대는 있고, 개정된 법안에 대한 반대와 항의는 늘 있게 마련이다. 그러니 사학법이 근 1년 반 동안 진통을 치르다가 마침내 재개정된 것에 대해서는 보다 구조적으로 이유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간의 사학법 개정 과정을 찬찬이 들여다보면 비교적 ‘구조적’인 이유가 몇가지 나온다.

독재정권이 추진한 공공성의 딜레마

모두 알고 있듯이, 이승만정권의 사학부흥책에 힘입어 우후죽순처럼 커나가던 사학에 대한 최초의 법은 1963년 박정희정권에 의해서 제정됐다. 박정권이 사립학교법을 제정한 것은 ‘부패사학 정리와 사학의 공공성 제고’라는 사회적 대의를 실현하는 동시에 법적 규제를 통해 사학을 길들이려는 의도에서였다.

이렇게 사학법이 공공성과 정권의 정당성 제고를 뒤섞은 상태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이후 사학법에서의 공공성은 정권의 개입과 결합되는 특징을 갖게 된다. 가장 ‘민주적’인 사학법이 전두환정권의 소위 ‘국보위법’일 수 있었던 것은 사학법 출현기부터 왜곡된 공공성 개념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정권의 정당성이 미약할수록 정권은 사학에 대한 개입을 통해 사학통제와 국민적 정당성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고자 했고, 사립학교법의 공공성은 높아졌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공공성은 국가권력의 개입과 같은 것으로 해석됐다.

국가권력과 사학법인의 허울싸움

마찬가지로 ‘사학 자율성’을 가장 강조한 법은 1999년 김대중정권기에 개정된 사학법이었다. 공공성이 관치로 간주되어왔기 때문에 민주화는 자연스럽게 ‘관치로부터의 해방과 사적 주도성의 강화’로 좁게 해석되었고, 사회의 민주화 바람은 오히려 사학법의 공공성을 심각하게 후퇴시킬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셈이었다.

지금까지 38차례나 이루어졌던 사학법 개정이 뚜렷한 역사적 진화의 방향성 없이 이사회의 권한 강화와 약화 사이를 오락가락했던 것은, 사학법 개정의 실질적 힘이 ‘공공성을 빙자한 국가권력’과 ‘자율성을 빙자한 사학법인의 이익’ 간의 대립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대립 구도는 2000년을 기점으로 해서 깨지게 된다. 정권과 사학의 2분 구도에 ‘시민’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1990년, 그리고 이어지는 1999년 사학법 개정을 통해 사학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게 되자, 사학분규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왔고, 시민단체들은 2000년 ‘사립학교법 개정을 위한 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를 결성하여 사학법 개정운동을 펼친다. 87년 이후 민주화의 성과에 기반한 ‘시민의 힘’이 사학법에 개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시민참여와 사학법 개정의 국면

국본은 사학법 개정을 위해 2002년까지 1인시위, 공청회, 비리백서 발간 등의 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이런 시민의 힘에 기대어 정리된 안이 당시 새천년민주당의 개정안이었다. 열린우리당이 2004년 당시 대부분 초선이던 9명의 의원으로 사학법개정안을 제출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전의 국본의 운동과 민주당의 개정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2005년 사학법 개정에는 2000년과 같은 시민의 힘이 개입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열린우리당은 국본이 진행한 개정운동의 파장 위에서 "정부입법보다 선명한" 의원입법을 선택했고, 법사위를 거치지 않은 채 국회의장 직권상정에 의해 표결로 법안을 처리했다. 몇몇 의원들은 다소 무리한 절차로 진행되더라도 법안이 통과되고 나면 "역사적인 차원의 개혁"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반대진영 반발에 무기력한 개혁세력

그러나 한나라당과 사학관련 집단의 거센 반발이 시작되자 통일된 당론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열린우리당은 법안통과 후 두달도 되지 않아 재개정의 뜻을 비쳤고, 재개정의 가능성을 감지한 사학법인 진영의 행동수위는 곧바로 높아졌다.

2006년 2월 8일, 2000년 국본의 후신으로 267개의 시민단체가 연대한 ‘사립학교 개혁을 위한 국민운동본부’가 발족했지만 전교조가 NEIS와 교사평가제에 대한 대응과정에서 역량을 소진하고, 사학법개정의 과정에서 대학노조와 교수노조 간에 분열이 진행된 상태에서 개정반대 진영에 ‘맞불’을 놓을 만한 역량을 결집할 수는 없었다. 민주당이 시민운동의 등을 딛고 올라서려다 실패한 바로 그 자리에 위태롭게 올라선 열린우리당은 2007년 자체 분열 속에서 굴러떨어지고만 셈이다.

시민운동이라는 버팀목이 없는 상태에서, 집권당의 개혁성과 차원에서 진행된 법개정이 사학의 조직된 저항 앞에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2005년 사학법에 따른 사학의 정관개정이 90% 가량 진행된 상황에서, 또다시 ‘직권상정에 의한 재개정안 통과’가 이루어진 것이다.

시민의 힘으로 공공성과 자율성 찾아야

우리나라의 사립학교는 중학교의 22.9%, 고등학교의 45.1%, 전문대의 90.5%, 대학의 82%를 차지하고 있는만큼, 사립학교의 질이 교육의 질 전반을 결정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사립학교의 성패는 우리 아이들의, 학부모의, 국가적 삶의 질과 직결되어 있는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사학법이 제정된 지 45년여가 흐른 지금도 여전히 사학법은 정권과 사학의 줄다리기 위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줄을 끊고 사학의 중심을 학습자로 돌려놓을 때에야 사학법 개정의 지루한 논의는 종결될 수 있을 것이다.

‘학습자의 시각’ 위에서 공공성과 자율성이 원래적 의미를 찾도록 하는 일, 국가권력과 사학의 이익에서 독립하여 교육이 살아날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하는 일, 그 미완의 과제는 87년 이후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시민의 몫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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