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앞의 파시즘과 소제국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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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7월 10일 09:1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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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7년 항쟁 20주년을 맞아 당대비평 편집위원들이 책을 한 권 내놓았다. ‘민주화는 실패한 기획인가, 87년 이후 한국 사회에 대한 성찰’이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 책 『더 작은 민주주의를 상상한다』(웅진지식하우스)은 두 개의 좌담과 13편의 글이 실려 있다. <레디앙>은 당대비평 편집위원회와 공동기획 형식으로 책 내용 가운데 일부를 나눠 싣는다. <편집자 주>

    무엇이 한국 경제를 기다리고 있는가 : 파시즘과 소제국주의

       
     ▲ 우석훈 성공회대 외래교수
     

    여러 가지 측면에서 우리나라의 제반 상황은 20세기 초반 1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독일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이 제국주의로 향하던 상황의 구조와 닮아 있다.

    한국형 포디즘은 선진국과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매개로 일종의 ‘제국주의 하청’으로서 기능하던 순간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다른 방식의 경제성장 양식을 찾아내지 못한 한국은 그전의 수출주도형 경제구조를 그대로 가지고 오면서 해외 시장과 해외 자원에 대한 의존도를 더욱 높여온 구조로, 지난 10년 동안 파국만을 겨우 피하면서 버텨온 경제라고 할 수 있다.

    대외무역 의존도가 90% 이상인 현 상태에서 한국 경제가 내부적인 균형 패턴을 찾지 못한다면, 소제국주의(petit imp.)로 전환하지 못한다면 자생적으로는 새로운 해법을 찾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물론 여전히 미국과의 특수 관계를 통해서 경제 시스템을 운용하는 한국 경제가 한미 FTA의 특수 관계를 통해서 다른 개도국은 물론 지역 국가에 대해서 적대적이며 공격적인 무역관계로 주변관계를 재편하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이라크 파병으로부터 시작된 한국 경제의 소제국주의로의 전환은 그러나 스스로는 제국주의 국가로는 기능하기 어렵다는 한계점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 여기에 한국 경제의 딜레마가 존재하는 셈이다.

    밖으로 나가기는 어렵고, 그렇다고 스위스나 덴마크가 그랬던 것처럼 내생적 발전모델을 찾을 만큼의 내부 민주화 전환을 이행하지 못한 상태에서 한국 사회는 밖으로는 소제국주의로의 전환을 끊임없이 모색하면서 내부적으로는 파시즘으로 자연스럽게 전환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흐름은 누군가의 기획이 없더라도 자본주의의 스스로의 위기 탈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변화이다. 외부에서 위기 탈출을 위한 90년대의 3저 국면이나 한국에게 유리한 국제분업과 같은 특수 상황들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한국 자본주의는 자연스럽게 파시즘을 통해서 소제국주의로 전환되는 것이 당연하다.

    이런 힘은 일본 경제나 중국 경제도 마찬가지이다. 세 나라 모두 외국 시장을 중심으로 자국 경제를 구축하고, 에너지는 물론 자원을 외부 시스템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국민경제의 내부축적 양식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자연스럽게 세 나라는 마치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가 20세기 초반에 경쟁적인 해외 시장 점유에 의하여 제국주의로 전환되며, 내부적으로는 파시즘 체계로 자연스럽게 전환된 것과 마찬가지로 점점 더 민족 개념이 강화되고, 국제 무역이라는 양식을 통해서 패권적 경제운용에 가까워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힘이다.

    물론 이런 과정에서 ‘완전 경쟁’과 ‘균형 성장’이라는, 서구 자본주의가 내부적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장치들이 한국에서는 전혀 작동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독과점의 강화와 내부적 불균형의 심화에 의해서 끊임없이 내부적 위기가 강화될 수밖에 없다.

    이런 일련의 흐름으로 본다면 노무현 정권의 시기는 1차 세계대전 전후로 독일 사민당이 민족주의의 강화에 따라 ‘독일 민족 우선’을 외치면서 급격하게 보수화되면서 군부와 손을 잡던 시절에 발생했던 수많은 사회경제적 변화와 대단히 흡사하다.

    토목공사를 중심으로 국민경제를 재건하고자 했던 ‘한국형 뉴딜’은 결국 골프장 300여 개를 만들겠다는 희대의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이를 통해서 건설산업은 정권 초기에 스스로 말하던 ‘연착륙’의 기회를 놓쳤으며, 사회적으로는 이와 연계된 지방 토호들이 중남미형 토호로 전환될 수 있는 기회를 주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강화된 건설경제는 다시 수도권에서 부동산 폭등을 통해서 수도권 집중의 심화 및 지방경제의 붕괴의 형태로 전환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중산층이 붕괴되었음은 물론이고, 포디즘 시절의 대규모 작업장 위주로 구성된 경제정책들은 실제 지역의 중소기업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고, 국민경제는 더더욱 빠른 속도로 내부의 역동성을 잃게 되었다.

    ‘개혁’으로 시작했던 노무현 정부가 결국 한미 FTA로 귀결되며, 출범 시기에 내걸었던 몇 가지 희망사항과 전혀 상관없는 혼돈의 4년 반을 보내며 현 상황에 도달하게 된 것은 어쩌면 경제적으로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이 상황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소제국주의와 파시즘이라고 할 수 있다.

    좋은 점도 있다. 자연스럽게 외부 식민지를 갈망하는 한국 자본주의가 일종의 ‘내부 식민지’라고 할 수 있는 북한 경제를 새로운 탈출구로 생각하며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대북 경제협력을 적극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이러한 일련의 변화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긍정적인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자연스럽게 한국 자본주의는 자원과 시장으로서 북한을 갈망하고 있는 중이라는 진단이 이상하지는 않을 것 같다.

    이 시스템이 계속해서 유지될 수 있을까? 위기는 생각보다 빠를 것이다. 한국 경제는 숙련 노동의 붕괴 속에서 창조력을 잃고 지난 5년 동안 거의 공전했던 셈이다. 경제가 외부로 향하려는 에너지가 그 어느 때보다 강해진 지금, 사회적으로 파시즘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강하나, 결정적으로 금융화라는 세계 경제의 흐름에 적절한 대비책을 만들지 못한 것이 현재로서는 이러한 일련의 흐름 앞에 서 있는 가장 큰 위기 요소이다.

    제2의 IMF와 같은 외환 위기의 형태로 등장할 것인가, 아니면 일본의 헤이세이 공황과 같은 거품공황의 형태로 나올 것인가에 대해서는 몇 가지 기술적인 논쟁이 기다리고 있기는 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소제국주의로의 전환을 희망하는 한국 자본주의의 전환이 그렇게 희망적이지는 않다는 점이다.

    이 파국적인 위기를 한국 자본주의가 넘어서서, 노무현 대통령이나 혹은 이명박 후보가 희망하던 그런 장기적 고성장 국면으로 전환될 수 있을까? 매우 어려울 것이다. 이미 내부적으로는 수많은 불균형이 누적되어 일본이나 혹은 말레이시아 같은 정상적인 FTA 협상이 불가능할 정도로 이미 한국은 불균형한 경제로 폭발 직전이고, 사회 역시 파시즘의 전조에 해당하는 극우파 사회로 바짝 다가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 파국을 피하기 위한 고민들

    한때 한국은 가장 영향력 있고 단결력 높은 노동단체를 가지고 있는 나라로 알려져 있기도 했고, 아시아에서 가장 앞선 시민단체들을 보유한 나라로 알려져 있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이 모든 것들이 마치 ‘압축성장’이 가지고 있는 비애처럼 허망한 한때의 꿈에 불과하다.

    중산층의 강화를 통하여 민중 노선이 실제로 필요 없는 사회로 전환하겠다는 노태우 대통령 시절의 ‘보통 사람들의 꿈’이나,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자신감으로 한국 시민사회의 발전을 희망적으로 바라보았던 김대중 대통령 시절의 꿈들도 지금은 소제국주의와 파시즘을 열망하는 사회적 구조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피하기 어려운 거품 붕괴의 금융위기 앞에서는 그야말로 일장춘몽에 불과해 보인다.

    자본주의의 역사에서는 자본 측을 대변하고자 하는 우파와 그러한 자본으로부터 소외되는 계층들을 대변하고자 하는 좌파라는 두 가지 축에 의해서 사회적 논의가 진행된다는 것은 비교적 상식적인 일이다. 일본에서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거나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경우에 우리나라의 언론들은 그들을 ‘극우파’라고 부른다. 그리고 프랑스의 새로운 정부에 대해서 ‘우파 정부’라고 자연스럽게 부른다.

    그러나 이러한 상식적인 명명이 우리나라에 적용될 때에는 갑자기 ‘보수’와 ‘진보’라는, 거의 아무런 의미 없는 이상한 명명으로 바뀐다. 도대체 세상에 어느 새로운 정부가 진보 아닌 정부가 있는가? 게다가 ‘개혁 세력’이라니… 가장 강화된 극우파 정권이라도 자신들이 정부의 통치권을 갖는 순간 이전 단계에 대해서 개혁을 하지 않는 정부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런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이상한 명명으로 한국 자본주의가 어떠한 역사적 과정을 거치고 있고, 우리가 어떠한 단계 혹은 양상에 있는지 고민해보지 않았던 지난 10년간, 소위 87년 체계는 그 시스템을 구성했던 사람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소제국주의에 훨씬 더 가까워져 있고, 사회는 극우파들의 파시즘 사회에 더 가까워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동안 우리는 아주 상식적인 눈으로 우리 사회를 돌아보려는 노력이 거의 없이 ‘한국은 다르다’라는 이상한 명제 위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상한 ‘박정희 신화’로 한국 자본주의의 기이한 힘을 주술적으로 믿고 있던 우파들처럼 좌파들도 ‘우리의 민주주의 역사는 다르다’라고 신비주의에 빠져서 민주주의 놀음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한국에 시민사회는 존재한 적이 없었고, 시민이라는 이름으로 90년대에 세웠던 가치는 한국 자본주의의 이상한 진화와 퇴행적 변화를 조금도 막지도 제어하지도 못했다. 시민사회가 있든 없든, 혹은 시민적 가치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있든 없든, 한국 자본주의는 탈포디즘이라는 국제적 흐름 속에서 결국은 중간에 파멸하고 말 소제국주의로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는 셈이다.

    솔직히 우리를 돌아보자. 그동안의 노동운동은 기형적이었고, 새로운 흐름을 만들 것이라고 기대를 모았던 환경운동은 이제 ‘왕당파’들의 권력놀이의 다툼만 보여줄 뿐 아무것도 아니다. 생태운동은 다를까? 신비주의에 쌓여 객관적 변화를 보지 않으려고 했던 것은 이들도 마찬가지이고, 이미 상층부가 권력화 되어버린 여성운동의 경우도 이러한 일련의 흐름에서 크게 자유롭지 않을 것 같다.

    모든 자본주의는 내버려두면 끊임없는 증식을 위해서 기형적으로 변하고, 내부에서 참을 수 없는 불균형이 심화되게 마련이다. 미국 자본주의의 짧은 100년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스탠더드오일사와 AT&T사 해체와 같이 독과점을 막기 위한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고, 분식회계의 증거가 밝혀진 엔론사가 바로 파산해버릴 정도로 최소한의 자본주의로서 도덕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 내부에서 끊임없이 저항하는 세력들이 존재했던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게다가 미국을 ‘제국’이라고 부르는 저개발국가들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유색인종과 여성 그리고 청년들이 노동시장에서 소위 ‘핸디캡’을 겪지 않도록 끊임없이 제도를 만들면서 불평등을 줄여나가기 위한 흉내라도 내온 것이 미국 자본주의이다.

    우리나라에 비해 그렇게 오랫동안 자본주의를 운용했음에도 지역 토호가 전격적으로 등장하지 않은 것은 미국 자본주의가 아직도 내부 건전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에 비하면 한국 자본주의는 IMF 10년 이후의 짧은 과정을 거치면서 급격하게 부패했고, 그러한 부패는 민중단체나 시민단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거대한 부패구조 앞에서 좌파나 우파, 그 누구도 자유롭지 않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부딪치고 있는 이 경제의 현실이 무엇인가? 외부적으로는 언제 경제위기가 폭발할까 주요 경제단체들이 전전긍긍하며 두려움에 떨고 있고, 내부적으로는 은행에서 대출받을 수 있는 소위 ‘공식적 경제’에 들어올 수 없어 지하경제의 영역 언저리에서 사채업자들과 거래해야 하는 비공식 영역의 국민들이 수백만 명이다.

    말로는 진보 세력과 보수 세력의 싸움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한국 민주주의의 끊임없는 전진’으로 포장되는 지난 10년간은 한국 자본주의가 극심한 구조적 불균형을 심화시키며 소제국주의로 한 발 더 나아간 과정, 그 이상이 아니다.

    그야말로 노무현 정권과 함께 민주주의 놀음으로 4년을 보내는 동안에 한국 자본주의는 더욱더 기형적이고 기이한 시스템으로 전환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폭력적이고 폭압적인 상황이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위기는 사라졌고, 영원한 번영을 인류에게 약속한 것일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와 비슷하게는 중남미의 여러 국가에서부터 멀게는 유럽과 미국의 선진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부 모순이 폭발하지 않도록 수많은 사회적 힘이 이를 제어하면서 각 국가별로 다른 방식으로 자본주의를 운용하고 있는 셈이다.

    현 상황에서 한국의 우파들은 부패했지만, 부패한 것은 한국의 좌파들도 마찬가지다. 소위 자신을 ‘진보’라고 부르면서 민주주의 놀음을 하는 동안에 정작 87년의 정신은 물론 시민의 가치도 시민단체 내에서 실종된 지 오래이다.

    정말로 현 상황에서 한국 자본주의가 당면한 파국을 피하고, 다음 단계로의 진화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이 이상한 권력다툼 속에서 우파와 좌파의 상층부들이 만끽하는 ‘제도적 권력’을 해체하고, 그것이 서민이 되었든 민중이 되었든, 한국 경제에서 가장 하층부를 형성하는 대부분의 국민들의 생존권이라도 보장하는 일이다.

    민중의 생존권을 보장하지 못하던 모든 자본주의는 빠른 시간 동안에 파시즘으로 전환되었으며,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변화는 이러한 거대하고 무서운 전환의 전조일 뿐이다.

    자본주의의 역동성이 만들어내는 질문에 대답하기에 한국의 우파나 좌파나 현재로서는 너무 무능하지 않은가? 파국을 피하기 위한 고민들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지금 절실하게 필요해 보인다. 87년 군부독재 하에서 어쩔 수 없이 사용했던 ‘진보’라는 이름을 21세기 소제국주의로 전환하려고 하는 한국 자본주의에서도 여전히 사용하는 이 상황은 퇴행적이다.

    이것은 진정한 질문을 가리고 있다. 지금 민중들은 공식경제의 영역에서 지하경제로 내몰리고, 중산층은 급속도로 해체되며 기층 민중의 수준으로 내려가고 있다. 이 시스템이 파시즘으로 바뀌지 않는다고 하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은가? 파국을 막기 위한 노력이 시급히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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