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짜 위기는 조금 있다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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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7월 09일 03:1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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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7년 항쟁 20주년을 맞아 당대비평 편집위원들이 책을 한 권 내놓았다. ‘민주화는 실패한 기획인가, 87년 이후 한국 사회에 대한 성찰’이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 책 『더 작은 민주주의를 상상한다』(웅진지식하우스)에는 두 개의 좌담과 13편의 글이 실려 있다.

    <레디앙>은 당대비평 편집위원회와 공동기획 형식으로 책 내용 가운데 일부를 나눠 싣기로 했다. 먼저 우석훈 박사의 ‘지금 한국 자본주의는 어디에 있는가’를 두 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편집자 주>

    새로운 선택은 가능한가

    87년 6월이 지나고 네 번의 정권이 들어섰다. 5년 단임의 직선제는 다른 것은 몰라도 5년 단위로 세상을 평가하기 쉽게 만들어주는 점이 있다. 노태우, 김영삼의 10년이 지나갔고, 다시 김대중, 노무현의 10년이 지났다.  

    기계적으로 본다면 박정희로부터 계속된 군사정권을 민간정권이 인수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기간이 앞의 10년이라고 할 수 있고, 그리고 드디어 민간 정권 혹은 민주화 정권이 국가 운영을 물려받은 10년이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 이상의 의미가 있을까? 현재로서는 그 이상의 의미를 이 흐름에 부여하기는 어렵다.

    먼저 내 입장을 간단하게 밝히자면, 나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만큼 노태우 정권과 김영삼 정권을 최악으로 평가하지는 않는다. 87년 9차 개정 헌법의 정신에 비추어보면, 이 두 사람도 헌법이 지명하는 호민관의 역할을 아주 못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노태우 대통령의 경우 억지로 역사를 뒤로 돌리려고 하지 않았고, 북방 외교를 통해서 지금의 평화체계의 단초를 만든 것이 사실이다. 김영삼 정권의 경우에도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닐 것 같지만 하나회 청산과 실명제 도입이라는 몇 가지 중요한 변화들을 만든 것이 사실이고, 단위 기간 동안에 가장 인기가 높았던 대통령이었다는 사실도 변하지 않는다.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애증의 관계라고 하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 같은데, 만약 그의 시절의 한국 경제에 신자유주의가 도입되었다면 그것은 ‘완화된 신자유주의’라고 불러야 할 것이고, 북한에 대한 ‘내부 식민지화 전략’이라는 또 다른 지적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북 정책이 한반도에 중요한 전기를 만들어놓은 것이 사실이다.

       
      ▲ 87년 이후 네번의 정권이 들어섰다. 군사정권 인수기간 10년과 민간정권 10년  무엇이 달라졌을까.
     

    노무현 대통령은 아직 임기가 지나지 않았는데, 그의 시절에 우리나라는 실제로 지하경제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전반기에는 ‘한국형 뉴딜’을 통해서 지역 토호들과 연관된 깡패들을, 중반기에는 ‘바다이야기’를 통해서 이보다 규모가 작은 소형 깡패들을, 그리고 임기 마지막에는 이자제한법을 폐지하면서 사채업자들의 전성시대를 맞게 된다.

    큰 흐름으로 본다면, 노태우 대통령이 ‘범죄와의 전쟁’으로 지하 경제에 대한 1차 공격을 한 이후에, 김영삼 정부에서 지하 자금들이 움직이기 아주 어렵게 만든 금융실명제로 2차 공격을 했는데, 이러한 지하 경제가 김대중 대통령 시절의 IMF 경제위기 이후로 다시 틀을 잡기 시작하다가, 노무현 정권 시절에 전성기를 만든 셈이다.

    일부 사채업자들이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와 같은 곳에서 공식적인 자문 역할을 맡게 되었다는 사실은 현재 한국에서의 지하 경제가 차지하는 위상과 역할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게 만들어준다(인터넷 신문 《대자보》 2007년 6월 15일자 참조).

    지하 경제의 흐름만으로 본다면 노무현 정권은 무지했고, 소위 민중들의 ‘경제적 삶’에 대해서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표층적 담론에서 얘기되는 공식적인 ‘효율성’의 세계에서 4년을 보낸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골프장, 바다이야기, 사채업 등은 모두 다양한 방식으로 서민들의 삶을 직접적으로 황폐하게 하는 요소들인데, 이런 식으로 방기된 문제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자, 직접적인 질문을 해보자. 이회창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이런 문제가 없었을까? 물론 피하기 어렵다.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다시 반복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현재의 경제는 어쩌면 더 나빴을 수도 있고, 하루를 살아가는 일상인들의 마음은 지금보다 더 황폐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시계를 돌려서 2002년으로 돌아가 보자. 누가 대통령이 되었든 대한민국의 운명은 암울했을까? 노무현 정권의 심장부에서는 이회창보다 자신들이 더 낫다고 자화자찬을 하는 중인데, 그 말처럼 이회창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더라도 세상이 지금보다 나았을 가능성이 없다면, 2002년에는 우리에게 아무런 선택도 사실상 없었다는 말이 아닌가.

    그렇다면 2007년, 지금 우리는 선택할 것이 새롭게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2002년의 구도가 반복되는 것일까? 그 누구를 국민들이 선택하더라도 지난 4년간의 경험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게다가 지금은 노무현 대통령의 영웅적인 활동에 의하여 ‘한미 FTA 체제’라는, 87년 체제의 9차 헌법과는 전혀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여건을 맞이한 상태가 아닌가?

    한국 자본주의는 어디에 있는가

    규모로 따지자면 우리나라는 세계 10위 정도의 규모이고, 1인당 국민소득이라는 기준으로 치면 30위 중반 어딘가에 위치하는 나라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이러한 경제 시스템은 언제 어디에서 출발했는가?

       
      ▲ 『더 작은 민주주의를 상상한다』(당대비평 편집위원회 엮음, 웅진지식하우스 발행)  
     

    한동안 조선 후기에 자본주의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소위 ‘자본주의 맹아’가 있었는가 없었는가, 하는 문제로 학계에서 논란을 벌이기도 했지만, 현실적으로 지금 그런 논쟁이 우리의 현재 모습을 찾아가는 데 엄청나게 중요한 사항은 아닐 것 같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일제시대 일본이 우리나라에 투자한 여러 가지 자본제와 산업의 기반이 한국 자본주의의 출발에 어느 정도 기여를 했던 것인가가 일본 사학자와 한국 사학자 사이에 중요한 논쟁이 되기도 했지만, 이 역시 두 나라 사이의 민족 자존심에 관한 논란이 아니라면 엄청나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지 않을 수도 있다.

    어쨌든 한국 자본주의는 1945년 해방과 함께 헌법을 만들면서 처음으로 국가로서의 틀을 가지게 되었고, 1960~70년대의 국민경제 형성기를 거치면서 그 원형을 형성했다.

    시스템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면 ‘건국의 열정’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의 에너지로 유신경제를 운용했고, 이 시절의 유신경제가 한국 경제의 원형(prototype)을 형성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다. 좋거나 싫거나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가지고 있는 국민경제는 유신경제로부터 생겨난 여러 가지 장치들과 심지어는 해악마저도 승계하면서 진화하고 있는 셈이다.

    서양 경제에서 ‘영광의 30년’은 종전이 된 1945년에서 1975년의 석유 파동까지를 의미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는 1970년대 중반에서 IMF 경제위기가 발발하기 직전인 1997년까지의 기간을 대체적으로 ‘한국 경제 영광의 30년’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10년의 격차가 있지만, 미국이나 프랑스, 독일에서의 영광의 30년과 한국 경제의 ‘영광의 30년’은 전개 과정이 대체적으로 유사한데, 특히 두 가지 점에서는 그 의미가 완전히 같다.

    1. 포디즘의 전성시대

    대량생산 대량소비 체계가 케인즈식의 선순환을 만들면서 형성된 ‘1품종 다량생산 체계’가 70년대까지 최절정에 달하면서 유럽 및 미국의 경제는 상당히 안정적인 고성장 기조를 맞게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포디즘에서 형성된 국제분업 체계에서 저가 공산품 및 석유화학 등 장치산업에 대한 세계적 공장의 역할을 맡으면서 1990년대 중반까지 전형적인 포디즘의 경제 및 사회 시스템을 형성하게 되고, 이 기간 동안 한국은 초기 도약단계를 거쳐 산업화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

    2. 분배를 통한 성장 국면 조정 : 68혁명과 87년 6월

    선진국 경제의 영광의 30년의 중간에 세계적으로 진행된 68혁명이라는 사건이 배치된다. 경제적으로는 노동자 및 저소득 계층에 대한 지원이 이 기간 동안에 증가하면서 1968년에서 1975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분배를 통한 성장’이라는 케인즈식의 경제 운용 방식의 클라이맥스가 세상에 모습을 보이게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87년 6월 이후 본격적으로 노조가 세상에 등장하게 되는 87년 7월을 맞게 되고, 이 기간 이후로 분배와 관련된 각종 지수들이 개선되면서 고성장을 맞는 1990년대 초중반, 한국 경제는 성장과 분배의 문제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특이한 경제 국면을 맞게 된다.

    선진국의 경우에는 1974년 이후 두 차례에 걸친 석유파동 기간 중에 경제가 상당한 조정을 거쳐 흔히 80년대 이후 영미권 모델로 불리는 신자유주의 모델과 유럽형 모델로 분화하게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유럽 모델에도 수많은 구분이 가능할 수 있지만, 어쨌든 우리가 서구 모델로 부르는 다양한 국민경제 모델들이 이 ‘영광의 30년’ 이후에 상당한 차이점을 보이면서 분화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IMF 이후에 전격적으로 IMF에 의하여 워싱턴 합의(Washington Consensus)라고 부를 수 있는 작은 정부, 민영화, 그리고 금융화 등의 일련의 새로운 경제모델들이 도입되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87년 6월 이후 한국 경제를 나눈다면,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1. 87년 이후 10년 -분배 강화에 의한 한국형 포디즘의 전성기
    2. 김대중 정부(IMF 경제위기 이후 5년) -완화된 신자유주의기
    3. 노무현 정부(IMF 경제위기 이후 5년~10년) -강화된 신자유주의기

    대체적으로 한국 경제에서 민중경제의 시기라고 부를 수 있는 기간이 한국 경제의 ‘영광의 30년’의 후반 10년이라고 한다면, 김대중 정부의 시기는 시민 경제의 시기, 그리고 노무현 정부의 기간은 이런 큰 흐름이 무너진 이후에 새로운 방향을 찾지 못한 혼동의 시간 혹은 어둠의 시간 정도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마지막 5년 동안에 한국 경제가 가장 좋았을 때 가졌던 몇 가지의 미덕들이 사라져버렸는데, 이 변화는 세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을 것이다.

    1. 일본식 종신고용제의 해체에 의한 숙련노동의 위기

    이 기간 동안에 우리나라의 포디즘을 이끌어왔던 숙련노동의 재생산 장치가 붕괴되면서, 비정규직이 대체적으로 800만 명에서 850만 명 정도로 급증하게 된다. 이러한 숙련노동의 위기는 탈포디즘에 적합한 다음 생산양식으로 전환되는 선진국들이 1980~90년대에 했던 이행과정에 한국이 더 이상 따라갈 수 없는 근본적인 창조 능력의 붕괴와 연결되게 된다.

    2. 중산층의 붕괴

    87년 이후 한국형 시민경제의 주축을 형성했던 중산층이 붕괴하게 되고, 이들의 붕괴를 제어할 수 있는 주택 정책 및 복지 정책 그리고 사교육 대책 등의 균형이 깨지면서 한국 경제에서 ‘주체의 재생산 장치’가 붕괴하게 된다.

    한국의 중산층 2세는 더 이상 중산층에 잔류할 수 없게 되면서 시스템에 의한 경제주체의 재생산보다는 사적 노력에 의하여 계층의 지위를 유지하려고 하지만, 이러한 승자독식 게임은 한국 경제의 ‘영광의 30년’ 동안의 역동성을 오히려 급격하게 해체하는 방식으로 작용하게 된다.

    3. 중소기업의 위기 및 창업의 지체

    한국 경제의 ‘혼돈의 시기’라고 할 수 있는 노무현 정권의 강화된 신자유주의 기간 동안에 정보통신, 유통, 방송 등 주요 공공사업은 물론 정유 및 대규모 시설산업이 대부분 3개에서 4개의 업체로 독과점구도가 완료되고, 이 과정에서 일본 도요타식의 협력적 수직화 시스템이 붕괴하면서 중소기업에 대한 심각한 위기가 발생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IMF 경제위기가 한참이던 1998년에도 기업 창업의 숫자가 도산의 숫자보다 많았는데, 2006년에는 창업 숫자가 급격하게 줄어들게 되면서 신규로 시장에 진입하는 중소기업의 숫자가 현격하게 줄어들기 시작한다.

    이를 자본주의의 역사단계에 의해서 간략하게 해석하면, 포디즘에 의해서 작동되던 국민경제가 적절하게 탈포디즘 단계로의 연착륙에 실패하고, 이러한 위기가 내부적으로 다시 숙련노동은 물론 다음 단계로 전환되기 위한 경제적 주체 형성에 실패하고, 다시금 더더욱 숙련도가 낮은 방식으로 기업들이 노동 착취를 높이는 방향으로 국민경제가 운용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과 유럽이 탈포드주의의 ‘다품종 소량생산’에 적합한 국민경제로 전환하기 위하여 노동의 질을 높이고, 공공 연구개발비 등에 대한 부담을 정부가 높였던 것과 비교한다면, 우리나라는 오히려 사교육 지출을 높였고, 국민들의 주거비 부담을 높였으며, 또한 동시에 숙련노동의 안정성을 낮추었다.

    이데올로기적인 해석과는 상관없이, 이러한 일련의 방향은 한국 경제가 가장 좋았을 때라고 표현할 수 있는 ‘영광의 30년’ 동안에 가졌던 미덕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지난 5년 동안 경제가 재편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에서 한국 경제를 바라본다면, 지금이 진짜 위기가 아니라 중산층의 해체에 따른 더 심각한 사회적 위기가 앞으로 기다리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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