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방제도와 양원제를 도입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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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7월 09일 08:4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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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4일 경남 마산에서 열린 민주노동당 대선 예비 후보 정책토론에서는 남북 통일방안을 놓고 대립선이 그어졌는데, 노회찬 후보의 ‘코리아연합’ 구상에 대한 권영길, 심상정 후보의 비판과 그에 대한 노 후보의 반론이 그것이다.

쟁점의 저변에는 연합, 연방, 단일 국가에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간의 권력 관계에 대한 상이한 인식이 있다. 보다 풍부한 토론을 위해 미국과 한국 및 독일의 역사적 경험을 되살리는 것도 좋을 거라 생각된다.

현재의 ‘강력한 패권 행정부’로 대표되는 미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 : USA)이 1789년에 탄생되기 전에, 미국의 모습은 현재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미국의 시작은, 중앙집권적인 절대군주제 또는 입헌군주제 체제를 혐오하고 분권적 자치를 열망하였던, 독자적인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를 가진 북미 13개 국가(state : ‘주’가 아닌 ‘국가’)들이 서로 모여 어떻게 하면, 영국의 식민지 지배에 반기를 들고, 독립할 수 있나 하는 정도였다.

이들은 1776년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1777년 ‘북미 13개 독립국가연합체 구성을 위한 동맹 헌법’을 제정하여 1781년 모든 나라가 비준하고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동맹 헌법’하에서 탄생된 ‘독립국가 연합정부’ 즉, 연합회의(행정부가 아닌 의회)는 독립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만큼 중앙집권적이지도 강력하지도 위계적이지도 못했으며, 독립 이후 내부 반란을 효과적으로 진압하지 못할 만큼, 무능함과 허약함을 보여주었다.

이에 위기 타개책으로 새로운 정부 구성을 위한 헌법 제정의 목소리가 높아져 1787년 헌법제정회의가 필라델피아에서 3개월 간 소집되었다. 당시 ‘새로운 정부-새로운 헌법’을 놓고 치열한 논쟁이 있었는데, 크게 세 가지 안이 있었다.

첫째, 새로운 정부는 필연적으로 영국의 절대군주제와 같은 중앙집권적인 독재국가로 귀결되기 때문에 13개 국가들이 독립적 자유를 갖는 현행 ‘독립국가연합체제’를 유지하자는 안(제퍼슨 안), 둘째는 현행보다 강력한 정부를 만들기 위해서는 하나의 중앙집권적인 단일국가 하에 13개 국가를 종속시켜야 한다는 안(해밀턴 안), 셋째는 현행보다는 강력하지만 완전한 중앙집권적인 단일국가는 아닌, 부분적으로 국가이면서 부분적으로 연방인 ‘새로운 연방체제’안 (매디슨 안)이다.

당시 제임스 매디슨을 중심으로 한 연방주의자들의 연방제 안이 다수를 점할 수 있었던 것은, 독재국가를 두려워했던 첫째 안과 중앙집권적인 둘째 안이 서로 극렬하게 대립하여 타협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연방제안의 최종 타협점은 결국 양원제 체제의 입법부 구성으로 귀결되었는데, 왜냐하면 입법부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가 현행 헌법보다 강력하면서도 중앙집권적이지 않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간의 권력관계를 보장해주었기 때문이다.

단원제인가 아니면 양원제인가, 양원제를 인구 비례로 할 것인가, 아니면 국가별로 동등하게 할 것인가를 놓고, 이른바 버지니아 안과 뉴저지 안이 격렬한 논쟁을 일으켜 타협되지 않았으나, 결국 코네티컷 대표들이 제안한 타협안이 제시되어 합의될 수 있었다.

코네티컷 대타협 안이란 상원은 뉴저지 안의 내용대로 각 나라가 동일하게 2인씩 선출하고 하원은 버지니아 안 내용대로 각 나라가 인구비례 대표로 주민(州民)이 선거한다는 것이다. 전자는 작은 나라가 만족하고 후자는 큰 나라가 만족하게 되어 모든 나라가 다같이 만족하게 되어 헌법 제정의 위기를 넘기고 연방체제 연방제에 합의하게 되었다.

미국의 연방주의 제도는 결국 핵심적으로 양원제로 귀결되었다. 양원제를 채택한 국가들이 그렇게 한 이유와 정치적 배경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핵심 중의 하나는 다양한 생각과 이익, 선호들을 단순히 집성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하는 토의민주주의적 또는 공화민주주의적 원리 때문이다.

특히,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독립혁명 이후 건국을 완수하기 위한 헌법 제정과 비준 과정에서 오랜 시간동안 토론과 설득, 타협과 합의를 통해 신뢰를 쌓아가면서 성공적으로 양원제도를 채택하였고, 그것의 결과는 미국의 헌정체제를 200년 이상 안정시켰다.

뿐만 아니라 소수파의 거부권을 상징하는 상원에서의 ‘필리버스터’의 역할, ‘상하원 합동위원회’ 역할에서 드러나고 있듯이, 미국의 의회정치체제는 ‘다수제 모델’이 아니라 토의와 합의에 기초한 ‘합의제 모델’로 정착되었다. 이런 점에서도, 미국의 양원제도는 미국 정치의 거버넌스에 많은 긍정성을 주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는 미국과 같은 식민지 상황이었으나, 독립을 자주적인 힘으로 맞이하지 못함으로써, 건국을 위한 과정에서, 특히 양원제 채택의 과정에서도 미국의 경우와는 매우 달랐다.

한국의 상황은 미소냉전과 좌우이념의 극단적인 갈등 때문에, 다양한 행위 주체들이 더 진지한 토의와 설득, 타협과 합의가 더욱 필요했으며, 이것을 시스템적으로 보안해 줄 양원제도가 더욱 절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제1공화국이 4.19 시민혁명에 의해서 무너진 다음에 제2공화국에서 채택되었다.

그러나 제2공화국의 양원제도는 만 13개월 만에 박정희 쿠데타에 의해 폐기되는 등 제도 정착에 실패하였으며, 이것은 결국 잦은 헌법 개정 등 한국정치의 거버넌스에 많은 약점을 제공해 주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경우 2공화국을 제외한 모든 공화국에서는 모두 단원제를 실시해왔다는 점에서 양원제가 생소하지만, 제헌 헌법의 초안이 되었던 유진오 안에서 양원제가 있었고, 이승만 세력이 장기 집권을 위한 목표로 한 제1차 발췌 개헌안에도, 제2차 사사오입 개헌안에도 양원제가 있었다는 측면에서 결코 생소하지 않다.

이승만 세력은 자신들이 추진한 1, 2차 개헌안에 ‘민의원의 임기는 4년으로 하고, 참의원의 임기는 6년으로 하되, 3년마다 2분의 1을 개선한다’고 하였으나, 끝내 1공화국에서 참의원이 구성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실질적이고 실제적인 양원제의 채택과 운영 시기는 1960년 4.19 시민혁명 뒤에 새롭게 등장한 제2공화국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미국과 한국은 영국과 일본의 식민지라는 악조건 상황 속에서, 자주적인 독립과 함께 새로운 공화국 건설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는 면에서 유사성이 있다.

미국의 경우는 영국과의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13개 국가들이 보다 바람직한 건국의 방향을 합의하기 위해 다양한 세력들이 참가하는 가운데, 논쟁과 토론, 설득을 통해 연방주의 헌법과 그 핵심으로 하는 양원제도를 탄생시키는 데 성공하였지만, 한국의 경우는 미국의 경우와 다르게, 패권적 미국과 소련의 이데올로기적 영향력 하에서 다양한 세력이 참여할 수 없는 가운데, 양원제도를 합의하여 정착시켜내는 데 실패하였다.

미국의 건국 과정에서 연방제도와 양원제가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는 점, 그리고 한국에서의 양원제의 실패의 경험은 우리 사회의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이상의 과제인 국민 통합 그리고 남북한의 국가 통합을 준비해야 한다는 점에서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토의민주주의에 입각한 국회 운영과 남북한이 함께 하는 양원제 국회 운영의 거버넌스가 먼 미래가 아닌 7공화국의 현재 시점에서 디자인될 필요가 있다. 특히 한국에서의 양원제 부활과 연방주의 채택도 논의해야 한다.

연방주의는 그동안 수도권과 영남권 중심의 중앙집권적인 근대화 개발논리에서 소외된 각 지역이 균등하게 발전할 수 있도록 입법권과 재정권 및 자치권이 실질적으로 이양될 수 있는 ‘획기적인 지방분권’과 ‘주민자치’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생각이 결코 이상이 아니라는 것은 동서독의 통일과정에서, 서독의 정착된 연방주의와 양원제가 통일 비용과 통일 갈등을 줄이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경험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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