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부 잘한다고 반장되나, 잼없는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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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7월 09일 08:3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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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한때 돈 좀 만졌다. 과외로. "얘는 공부를 싫어하기 때문에 공부를 못하는 건가? 아님 공부를 못해서 공부를 싫어하는 건가?" – 대학시절 과외 알바로 공부 못하는 놈을 가르치다 문득 든 의문이었다.

    지금의 나한테 묻는다면 나는 "공부를 못하기 때문에 공부를 싫어하는 것"이라고 대답하겠다. 공부를 좋아하게 만드는 방법? 그딴 건 없는 것 같다. 공부가 아무리 재밌어 봤자, 나가서 노는 재미보다는 못하다.

    나의 과외 성공 스토리

    애들이 바보가 아니다. 공부 못하는 애 입장에서는 (자기 머리로)백날 공부해 봤자 성적 안 오를 게 뻔한데 뭣하러 놀지도 못하면서 아까운 시간을 (그 재미 없는)공부하느라 보내겠느냔 말이다. 다만, 공부하는 데서 스스로 비전을 찾을 수 있게 되면 공부하는 게 쓸데 없는 일이 아닌 해볼 만한 일이 되는 거지.

    과외할 때 초기에는 ‘성적을 올리기 위해 어떻게 하면 공부에 재미를 느낄 수 있게 해줄까?’를 고민했지만. 그 이후부터는 ‘어떻게든 한 번만 성적을 올린 다음, 성적이 올랐다는 사실을 어떻게 하면 팍팍 느끼게 해줄까?’를 고민했다.

    성적을 조금이라도 올려논 담에 "아니~이런 천재가 숨어 있었다니!"하며 깜짝 놀라는 척 해주고. 몇 가지 작업을 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사실 가르칠 게 별로 없어진다. 숙제를 왕창 내주면 공부는 알아서 해오고, 과외 시간에는 모르는 거 몇 문제만 풀어주면 된다.

    나머지 시간엔 만화를 보거나, 잠을 자거나. 그 이후로 성적이 더 오르면 벽에다 커다란 그래프를 붙여놓고 가파르게 올라가는 성적을 보여주며 "넌 원래 이렇게 대단한 놈이었어"라고 얘기해주면 된다. (그럼 맨 처음에 성적은 어떻게 올리냐고? 그건 영업 비밀이라 말해줄 수가 없다~ 혹여라도 미용실 망하면 백화점 문화센터 다니면서 ‘레게머리의 성적 쑥쑥 올리는 비법’ 강의라도 해야 먹고 살거 아닌가~ ㅋ)

    좋아하기 때문에 좋아하는 이유가 생긴다

    한참 야구얘기 하다가 생뚱맞게도 과외 얘기를 꺼낸 건,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 이다.

    응원 야구팀 고르는 것만 해도 그렇다~ 좋아할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좋아하는 게 아니라. 좋아하기 때문에 좋아할 이유가 생기는 게 정답인 것 같다.

    25년간 쌓아온 나와 LG 트윈스(구 MBC청룡)의 역사를 되짚어 봐도 그렇다. 동업자 의식은 어디로 외출보냈는지 동료 선수의 발을 거는 선수 – 결국 발에 걸린 선수는 큰 부상을 당해 1년 넘게 야구를 쉬어야만 했다. 약체 팀을 준우승까지 보낸 김성근 감독을 그 해 바로 짜르는 구단.

    구단의 사주를 받았는지 어땠는지 한참 잘하고 있는 시즌 중에 ‘김성근 감독을 짜르자’는 둥의 플래카드를 구장에 내거는 정체불명의 팬들. 간판 선수 팔아먹고 데려오는 선수들은 모조리 뻘타였던 – 이순철 감독 체제에서 보내야 했던 암흑의 3년. 팀의 간판 타자는 나쁜 공에도 손을 대는 배드볼 히터.

    잠깐 사이에도 정말 팀이 싫었던 이유를 이렇게도 많이 쏟아 낼 수 있고, 그 사이에 응원팀을 한두 번쯤은 바꿔도 이상할 게 없는 데도. 나는 응원팀을 안 바꿨다. 싫어할 이유가 천년 만년 쌓여봤자, 내 어찌 연고 구단과의 의리를 저버리느냔 말이다.

    지지 정당 고르기와 응원팀 고르기

    지지 정당 고르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다.

    대부분의 골수 야구팬들은 아무 이유 없이 연고팀이란 이유하나 만으로 응원팀을 고른다
    – 대부분의 xx당 빠들은 아무 이유없이 연고정당이란 이유하나 만으로 지지정당을 고른다.

    야구에 뜨뜻미지근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특별히 응원하는 팀은 없으나 그때그때 이슈에 따라 관심갖는 팀을 바꾼다.-정치에 뜨뜻미지근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특별히 지지하는 정당은 없으나 그때그때 이슈에 따라 관심갖는 정당을 바꾼다.

    일부 골수 야구팬들은 어떤 이유 때문엔가 연고팀이 아닌 팀을 응원팀으로 고른다.
    – 일부 xx당 빠들은 어떤 이유 때문엔가 연고 정당이 아닌 정당을 지지 정당으로 고른다.

    뭐가 다른가?

    한나라당이 백날 차떼기를 하고, 성추행을 하고, 술먹고 황태포로 경비아저씨 머리를 때리고, 술자리에서 컵을 던지고 해봤자, 이미 연고 정당과의 의리로 충만한 양반들에게는 그쯤이야 ‘사회생활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한 두번은 생기는 일’로 보이는 거란 말이다. 1백 일 동안 1백 가지 싫어할 이유를 만들어 제시해 봤자 눈도 꿈쩍 안 하는 게 바로 연고팀에 대한 사랑이다.

    민주노동당이 천년만년 지지율 10%대에서 만족하고 말 정당도 아니고,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지 않는다는 전제에서)당이 크려면 이런 두터운 연고팬들을 상당수 흡수해야 지지율 30~40%의 수권 정당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거 아닌가.

    1. 좋은 정책을 만들면 다른 팀 연고팬을 흡수할 수 있을까?

    연고팀에 대한 사랑이란 게 연고팀의 성적이랑은 별 관계가 없다. 삼성 라이온즈나 현대 유니콘즈나 다들 성적이 좋은 구단이지만 되려 관중수는 미미하거나, 감소하고 있는 형편이다.

    당에 대한 선호 역시도 그 당의 정책이랑은 별 관계가 없는 듯하다.극단적으로 얘기하자면 개판을 치거나, 아예 정책이 없어도 충분히 집권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농담 아니다.

    국가보안법 땜에 감옥 간 사람보다 안 간 사람이 많으니, 한나라당이 국가보안법에 찬성을 하든 반대를 하든 한나라당 지지자들의 사랑이 변치 않는 걸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허나, 사학법과 관련해서 한나라당이 되도 않는 난장을 까고 있는데, 여전히 한나라당을 사랑해주는 이 사람들의 정체는 과연 뭐란 말인가? 초등학교만 나왔나? 아님, 중고등학교를 미국에서 나왔나? 이들의 사랑은 성적은 개판을 치는데도 오히려 팀에 대한 애정이 깊어지는 롯데 팬들의 사랑과도 비슷하다.

    허나 민주노동당의 상황은 어떠한가? 프로야구 최고 비인기 구단 현대 유니콘즈를 보는 것 같다. 성적은 좋지만 마땅한 연고지도 없어 ‘현대 유목민즈’라는 비아냥을 듣는 무색무취의 팀. 지금 민주노동당의 색깔을 딱 그거다. 모범생처럼 항상 국회 회의에 출석하고, 좋은 정책 내려 노력하고, 쌈질 안하려 들고. 허나, 공부만 잘한다고 반장 되는 건 아니지 않는가?

    2. 그럼 비결은?

    비인기 구단 현대 유니콘즈 / 민주노동당에는 없고, 인기 구단 롯데 자이언츠에 있는 것은 좋은 성적이 아니라 – 스토리이다.

    1) 최동원 스토리

    전설의 에이스 최동원. 네모난 금테 안경에 건방져 보이는 얼굴 –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에 나오는 악역 마동탁이 최동원을 모델로 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역시나, 행적도 그의 고집 세 보이는 얼굴과 비슷하니, 홈런을 맞으면 다음 타석에서도 같은 코스, 같은 구질의 똑같은 공을 ‘니가 진짜 실력이 있으면 쳐봐라’하며 던져대는 선수가 그이며, 그라운드 밖에서는 연봉 30만원 차이 때문에 구단과 계약을 안하고 시즌 개막 후에도 몇 달을 버티고, 80년대 말 선수협의회를 차리겠다고 하다 결국 팀에서 쫓겨나 선수 말년을 타지에서 쓸쓸히 마감해야만 했던 그다.

    그러나, 그는 84년 약체로 지목된 소속팀을 결승전인 한국시리즈로 이끌었으며 7게임 중 팀이 거둔 4승을 모두 그의 팔로 일구어냈다. 한마디로 난세의 영웅. 고집 때문에 시대와 불화했던 것까지 전형적인 영웅담이다.

    이 처럼 피가 끓는 그를 팬들 역시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으니, 이른바 프로 야구사에 길이 남을 ‘87년(88년?)롯데 팬 봉기사태’의 원인이 되고만다.

    최동원이, 30만원 차이 때문에 시즌 개막 후에도 출전을 안하고 버티던 와중에 안그래도 약체인 롯데는 연패의 늪으로 빠져들고 만다. 팬들의 분노는 폭발 직전. 어김없이 경기에 지고 난 어느 날 구장을 빠져나오던 팬들 중 어느 누군가가 ‘최동원’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휘발유에 불이 붙은 것처럼 구장을 빠져나오던 팬들이 하나 둘씩 ‘최동원’을 연호하더니 결국 팬들 모두가 ‘최동원’을 연호하게 됐다.

    ‘감독을 불러 청문회를 하자’ ‘아니다. 선수단 버스를 뒤집자’ 성난 팬들이 집에는 안가고 그 자리에서 난상 토론을 한 끝에 도달한 결론은 ‘최동원네 집에 찾아가서 재계약을 요구하자’였다.

    수만 명의 팬들이, 그대로 시위대로 변신해서 ‘최동원’을 연호하며 부산시내를 가로질러 최동원의 집으로 향했다. 최동원의 집을 둘러싸고, 팬들 대표가 최동원의 아버지와 면담을 한 끝에 최동원 아버지가 나와 ‘빠른 시일내에 팀과 재계약을 하겠다’라고 약속을 한 후에야 시위대는 해산을 했다.

       
      ▲ 염종석 선수의 수술한 어깨와 팔꿈치
     

    2) 염종석 스토리

    92년 혜성처럼 등장해서 약체팀을 결승전 격이 포스트 시즌으로 이끌고, 결승전에서도 엄청난 혹사 속에 눈부신 호투를 보여준 19살의 염종석. 결국 걸레가 되어버린 그의 어깨와 팔꿈치. 그 이후의 재기.

    3) 박정태 스토리

    2루 슬라이딩을 하다가 단순한 발목 골절이 아니라, 뼈가 으서러지면서 조각이 나고 그 조각이 눌러지는 복합 골절을 당한 박정태. 선수 생활은커녕 정상적으로 살기도 힘들다는 진단이 나왔다. 이후 5번의 수술, 1년 가까운 병상 생활.그러나 박정태는 정확히 2년만에 그라운드로 돌아왔다. 눈빛이 완전히 달라진 채로.

    정상 생활도 힘들다던 그가 2년 만에 돌아와서 오히려 나은 실력을 보여주자 한 기자가 그에게 이유를 물었다. “1년 동안 병상에 누워서 하루도 쉬지 않고 마음 속으로 가상의 투수의 공을 받아 치는 생각을 했다” 복귀후 눈빛이 달라진데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다른 팀 팬이었지만, 당시 타격에서 보여준 박정태의 눈빛은 역대 그 어떤 선수 보다 강렬했다. 상대를 녹여버릴 것만 같은 레이저 눈빛. 한 번이라도 그의 플레이를 본 사람이라면 절대 잊지 못할 눈빛이다.

    4) 호세 스토리

    부산에 가면 ‘호세’란 상호가 많다고 한다. 호세 한의원, 호세 부동산, 호세 호프. 그 앞 최동원, 염종석, 박정태 그 누구도 못 누려본 호사를 누리고 있는 주인공은 바로 도미니카 출신의 외국인 선수 호세. 실력도 출중했지만, 성질 역시 출중했다.

    상대팀 관중들이 던진 물병에 고추를 맞고는 화가 나서 배트를 관중석에 던지고 퇴장당한 일. 팀 동료가 상대 투수가 던진 빈볼에 맞자 뛰어나가 상대 투수 얼굴에 강펀치를 날린 일. 그는 정말 화내야 할 때 화낼 줄 아는 선수였다. 다른 팀 팬 입장이지만, 상대방의 깐돌이 같은 행동을 즉시즉시 응징하는 호세의 행동은 정말로 후련했다.

    게다가 그는 얼마나 거만한가? 때린 타구가 크다 싶으면 아예 뛰지도 않고 배트를 던져놓고는 공이 담장이 넘어간 걸 확인하고 나서야 다이아몬드를 돌기 시작했다. ‘모범생’ 이승엽이 홈런을 백 개 때리더라도 그가 소속된 삼성의 경기에 관심이 없던 내가 호세가 결승 홈런을 날릴 때마다 열광하고, 또 그의 퇴출에 가슴 아파 했던 차이는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 호세를 응원하는 플랑카드
     

    5) 그외에도 불운을 몰고다니는 남자 박동희, 비운의 황태자 윤학길, 데드볼 왕 공필성….

    다른 팀 팬인 내가 생각해도 이리 떠오르는 스토리가 많다.

    자, 민주노동당에는 이런 톡 쏘는 스토리가 있나? 지지자의 피를 끓게 하고, 무관심자로 하여금 관심을 갖게 하는 그런 스토리. 내가 아는 한 민주노동당에는 이런 스토리가 없다.

    ‘독재정권의 탄압을 뚫고 만들어낸’? 이미 DJ, 386 등등이 톨톨 털어먹어 더 이상 감동을 주지 못한다. ‘노동자 서민을 위한’이란 레토릭은 또 어떤가? ‘꿈과 희망을 어린이에게’라는 초창기 프로야구 캐치프레이즈 만큼이나 심심하기 짝이 없다. 좋은 얘기다. 근데, 그래서 어쩌자구?

    대선 후보로 나선 세 후보 역시 심심한 감을 지울 수가 없다. 구태여 비유를 하자면 현대 유니콘즈 이숭용같다고나 할까? 매년 좋은 성적 거두고 있고, 자기 관리 잘해서 오랫동안 선수생활 하고 있지만 열성 야구팬을 자처하는 나조차도 막상 그 선수에 대해서는 할 얘기가 없다.

    스토리 없는 민노 대선 주자들

    안타깝게도 세 후보 역시 그렇다. 전부 진보 진영에서 고생 많이 하신 노장들이고, 의원 당선 후에도 훌륭하게 의정 활동을 해내신 분들이지만, 술자리에서 혹은 정치에 대해 잘 모르는 친구들에게 ‘이 사람들은 이런 사람이야’라고 할만한 얘기가 없다.

    반면, 롯데는 어떤가? 야구에 관심 없는 여자 친구에게 야구가 얼마나 재밌는 건지 설명해줄 때마다 빠지지 않고 나오는 얘기가 최동원 얘기, 호세 얘기, 박정태 얘기다. LG팬인 나도 LG 얘기보다는 훨씬 재밌는 롯데 얘기를 해줄 정도이다.

    대선 후보들이 내놓는 정책 역시 어떤가? 스토리가 없고 지나치게 설명적이다. 1백만 민중대회, 제7공화국, 대표교체, 1가구1주택, 최저임금인상.. 다 좋은 정책이지만 내가 볼 땐 텅빈 수원 구장에서 이숭용이 친 안타랑 똑같게 느껴진다.

    정확하고 꾸준하면 뭘 하나? 팬들의 피가 끓지 않는데. 똑같은 얘기라도 ‘근로조건 개선, 환경 보호’가 아니라 ‘스웨터 입고 자전거 타고 출근할 수 있게 해준다.’가 더 느낌이 오지 않나?(나만 그런가? ‘기와집에서 이밥에 고깃국 먹게 해준다’란 얘기만 들어도 배가 부르다.)

    공부 잘 한다고 반장되는 거 아니다. 물론 당이야 열심히 해서, 공부 잘 하는 애들이 반장되는 시스템으로 한국 정치의 패러다임을 바꾸겠다고 하지만. 글쎄, 내가 볼 땐 사람이란 동물은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보다 좋고 싫음을 먼저 판단하는 동물이다. 좋기 때문에 옳은 거고, 싫기 때문에 그른 게 아닌가 싶다.

    난 민주노동당이 맨날 맨 앞자리에 앉아서 공부만 하는 학생이 아니었으면 한다. 성적은 좋지만, 막상 반 애들은 얼굴도 기억 못하고, 이름까지 가물가물한 그런 학생이 되면 안되지 않는가? 자, 지금부터라도 트위스트헤드 가서 머리도 좀 볶고, 가끔 야자 시간에 애들 데리고 나가서 하드도 사주고 술도 사주고, 엿 같은 선생이 머라 하면 박치기도 좀 하고 좀 그랬으면 좋겠다.

    그래야 졸업 후에도 술자리에서 ‘민주노동당 걔가 말야~’하며 얘기도 될테고, 민주노동당이랑 친한 걸 자랑으로 여기는 아이들이 많이 나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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