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보의 근본주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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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7월 06일 12:2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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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글은 한국사회포럼의 한 주제인 <‘진보논쟁’ 이후의 진보논쟁>에 참여한 필자의 발제문이다. 다양성의 모색이라는 게 ‘근본’을 외면하거나 잊고 싶어하는 내면의 반영일 수도 있다는 혐의까지 두고 있는 필자는 소유와 계급, 계획 같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성찰해야 할 시점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그것이 매우 현실적인 과제와 맞물려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편집자 주>

    1. 진보의 근본주의가 필요하다
     -<레디앙>에 발표한 글에 대한 부연

    자료집에 실린 글은 <레디앙>에 발표한 것(4월 23일 "1인 1표의 궐기를 준비하자")이다. 일부러 <레디앙> 편집진이 제시한 물음에 구애받지 않고 썼으며, 진보 논쟁의 실제 쟁점들과도 논점이 일치하지는 않는다. 뭔가 딴죽을 걸고 싶었기 때문이다.

       
     ▲ 장석준 진보정치연구소 연구기획 실장 (사진=레디앙)
     

    그래서 괜히 (‘진보’와 구별해) ‘좌파’라는 말을 부각시켰고, (‘반 수구’니 ‘반 신자유주의’니 하는 내용이 아니라) ‘평등’의 가치를 강조했으며, (‘한미 FTA 반대’나 ‘비정규직법 폐기’ 이전에) ‘인민의 자치’, ‘경제의 계획’ 그리고 ‘사회적 소유’라는 사뭇 고전적인 이상과 원칙들을 환기시켰다.

    발제자가 하고 싶었던 주장은 한 마디로 지금 필요한 게 진보의 어떤 ‘근본주의’라는 것이다. 다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라고 한다. 그러면서 진보의 다양화를 이야기한다. 발제자도 거기에 반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진보의 다양화가 자칫 말의 성찬에 그쳐 버리는 것 아닌가 라는 강한 우려가 있다.

    이것도 필요하다, 저것도 필요하다는 식의 주장이 어떤 때는 지금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이야기하지 않으려는, 혹은 더 나아가 그런 이야기를 가로막는 수단이 될 수도 있겠다는 우려다. S. 지젝 같은 이들은 ‘실재’와의 조우를 꺼리는 게 우리 시대의 특징이라고 진단하면서 요즘 정치 현실(유럽 같으면 ‘제3의 길’ 정치가들, 우리 같으면 ‘중도’를 말하는 사람들)의 부박함을 질타하곤 하는데, 발제자도 비슷한 심정이다.

    그래서 새삼 ‘진보’를 논쟁하는 상황에서 진보의 ‘근본주의’를 제기하고자 한 것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 시대에는 근본주의야말로 가장 첨단의 사상이자 해방의 계기일지 모른다. 포스트모던 담론이 이미 주류가 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역설적이게도 고전적 유물론이야말로 주류 담론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전복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다.

    발제자는 그 근본주의의 키워드를 ‘평등’에서 찾았는데, 다만 여기에서 부언해야 할 것은 이때의 ‘평등’이 결코 ‘자유’의 반대말은 아니라는 점이다. <레디앙>에 발표한 또 다른 글에서 발제자는 E. 발리바르의 ‘평등자유’ 명제의 함의를 받아들여 ‘평등’을 ‘평등한 자유’라고 푼 바 있다.

    한데, 근본주의의 키워드로 또 하나 강조해야 할 게 있다. <레디앙>의 글에서는 이것을 채 강조하지 못했는데, 그것은 바로 ‘계급’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프롤레타리아. 그런데 이때의 ‘노동계급’은 87년 이후 한국의 진보파 사이에 퍼진 노동계급의 이미지와는 좀 균열이 있다.

    지난 십 수 년 간 한국 사회에서 노동계급이라면 노동조합원과 등치되었는데, 이런 이미지에 딱 들어맞지는 않는다는 것이다(그렇다고, 배치된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프롤레타리아란 역동적인 프롤레타리아화 운동의 최전선에 노출된 대중을 뜻한다.

    현재 그러한 대중을 대표하는 명칭이 ‘비정규직’이다. 하지만 좀 더 엄밀히 말하면 ‘비정규직’이란 말로도 다 포괄이 안 되는 다양한 집단들, 즉 노동시장의 경계를 넘나드는 여성들, 비정규직과의 경계가 모호한 장기 실업자들 그리고 이주 노동자들이 존재한다. 진보의 근본주의에는 이러한 프롤레타리아화 운동의 최전방과 조우해야 한다는 요청이 포함된다.

    진보 논쟁에서는 이른바 ‘반 수구’냐 ‘반 신자유주의’냐가 쟁점이 되었다. ‘반 수구’를 진보의 가치라고 둘러대는 하도 기괴한 주장들이 판을 치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기는 하지만, 논의의 첫 단추를 잘못 꿰었다는 생각이다. ‘신자유주의 반대’를 이야기하기 전에 신자유주의와 정반대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우리의 가치, 이상, 원칙들이 먼저 이야기되었어야 했다. 이런 문제의식 때문에 발제자는 ‘자치’, ‘계획’ 그리고 ‘소유’를 이야기하고 나선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계획이니 소유니 하는 게 쟁점이라고 하면, 뜬금없다고 할 수도 있겠다. 실제 <레디앙>의 글에서는 원칙 정도만 제시했지, 부연 설명이 없어서 그렇게 이해되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발제자가 생각하기에 이것들은 이미 우리의 현안이다.

    ‘소유’부터 보자. 주거 문제가 이미 뜨거운 현안 아닌가? 한국 사회의 주거 문제란 결국 자산 소유의 불평등 문제 아닌가? 그래서 보수 진영에조차 토지공개념을 이야기하는 정치인들이 있지 않은가? 사립학교법만 해도 그렇다.

    이제는 학교 이사회 구성을 놓고 일진일퇴할 게 아니라 아예 사립학교 재단(이라고 해봐야 중고등학교의 경우는 대부분 국고보조금으로 운영된다)의 국공립화를 주장해야 한다. 이것 역시 결국은 소유 문제다. (사실은 민주노동당 역시도 이 역할을 제대로 못했다. 민주노동당은 이번 대선에서라도 이러한 자기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

    ‘계획’도 그냥 그렇게 한 단어만 떼놓고 던질 때는 서먹하게 들리지만 결코 그런 것만은 아니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과거의 경제기획원을 노동자 시민 대표가 참여하는 형태로 새롭게 설치하자는 것으로 정식화할 수 있다. 자본의 부족이 아니라 그 과잉으로 고통 받고 있는 한국의 시장 경제에 필요한 게 바로 이런 계획 기구를 통한 고삐와 족쇄와 채찍임을 분명히 주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치’는 결국 민주주의의 심화 문제로 나타난다. 이것은 최근 새사연에서 제안한 ‘국민주권운동’ 등과 만날 수 있다. 발제자는 지난 6월 27일 열린 진보정치연구소 주최 87년 20주년 토론회에서 ‘제헌적 대중 토론’이라는 요청을 제기한 바 있다.

    사실 ‘제헌적’이라는 수식어 때문에 많은 우려와 오해, 반론이 있었는데, 발제자의 고민은 결코 헌법주의적 문제설정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대중 토론’, 즉 대중 참여적 정치 과정에 주목하자는 것이었다.

    ‘제헌적’이란 수식어를 붙인 이유는 기존의 제도 틀에 제한되지 않고 모든 근본 쟁점들을 의제로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고, ‘대중’이라 한 것은 ‘대의’ 과정에 제한되지 않음을 못 박고자 한 것이었으며, ‘토론’이라 것은 ‘일회적’인 대중투쟁(일본식으로 표현하면 ‘일규’)보다는 훨씬 더 ‘과정적’이고 ‘심의적’인 대중운동이어야 함을 부각하려는 것이었다.

    발제자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한 전 세계적인 민주주의의 위기 상황에서 필요한 게 바로 이러한 ‘제헌적 대중 토론’라고 생각한다. 지금 한국 사회에 절실히 필요한 것 역시 이것이 아닐까? 이번 대선도 이러한 정치 과정의 한 계기가 될 때에만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발제자는 이제 좀 더 성숙한 단계의 진보 논쟁은 이러한 것들, 즉 좌파의 포기할 수 없는 가치와 이상, 원칙들에 대한 토론이어야만 한다고 믿는다.

    2. 더 이야기해야 할 것들 – 특히 통일과 평화의 문제

    물론 진보의 근본주의가 필요하다는 문제제기가 위와 같은 주제들에만 제한되는 것은 아니다. 진보의 다양화라는 요청과 조응하면서도 각각의 의제들에 대해 근본주의적 재성찰을 전개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발제자가 <레디앙>의 글에 담고 싶었으나 채 이야기한 못한 주제가 있는데, 바로 통일과 평화 혹은 국제정치와 관련된 좌파의 자기 성찰이다.

    이제껏 통일과 평화에 대한 진보 담론 지형은 한반도 차원의 ‘민족’주의(이른바 ‘전국적 관점’)와 남한 차원의 ‘국민’주의(이른바 ‘[남한] 독자적 관점’) 사이의 대립 비슷했다. 이른바 NL 대 PD의 대립 구도. 후자의 경우 내용적으로는 민족주의와 거리를 둔 민주주의의 강조로 나타났지만, 그 형식 측면에서는 남한 국민주의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대목에서도 어떤 근본주의적 재접근이 필요하다. 민족주의 대 국민주의의 대립 구도를 넘어서 이제는 국제주의가 실체로 등장해야 한다. 이것은 전통적인 NL식 민족주의를 넘어서야 한다는 의미일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PD식 비판 혹은 방어 논리도 뛰어넘어야 한다는 의미다.

    좀 장기적으로 보면, 이것은 마치 지난 이 세기 동안 유럽의 혁명가들이 변혁의 문제를 사고하고 상상하면서 항상 유럽이라는 단위를 잊지 않았던 전통이 이제는 아시아에서도 예외여선 안 된다는 이야기다. 사실은 아시아에서도 중국, 한국 등이 국민국가로 분립하기 이전에는 지금과는 다른 전통이 분명 존재했다(가령, 아시아 반파시즘 공동전선에서 ‘옌안’의 의미).

    너무 엄청난 주제이기 때문에 발제자로서도 국제주의적 운동은 어떠해야 할지 그 단초나마 제시하기 벅차다. 하지만 이제 막 재분배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하는 중국의 노동자 농민들과 한 세대 운동의 실패로 침체 상태에 있는 일본의 진보적 시민들 그리고 그 사이의 한국 민중들을 복합적인 공동 운명체로 바라보고 그러한 시각에서 공통의 미래 전략을 구상해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진보 논쟁뿐만 아니라 일본의 시민사회 내 논쟁과 중국의 자유주의-신좌파 논쟁에 대한 관심이 긴요하다. 아니, 단순한 관심 수준이 아니라 서로 횡적으로 연계된 국제적 토론과 공동 행동이 필요하다. 그 용광로에서 ‘21세기 동아시아 좌파’를 주조해내야 한다.

    좀 더 단기적으로 보면, 일본의 평화헌법(헌법 9조) 문제를 일본만의 양심의 시험이 아니라 동아시아 각 국의 공동의 내부 현안으로 발전시켜야 하지 않을까 싶다. 중국, 한국이 아무리 일본의 과거 피해국이라 하더라도, 일본에게만 ‘비무장’을 헌법적 원칙으로 유지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위선이다.

    일본의 주변국들 내에서도 일본 국내의 평화헌법 수호에 상응하는 평화의 내면화(가령 선도적 핵철폐 및 군축 노력)를 위해 노력하면서 일본의 양심에 호소해야 말이 된다. 한국의 진보파도 그런 선도적 평화 행동을 제기하고 나설 때가 됐다.

    물론 새로운 단계의 진보 논쟁의 쟁점으로는 이외에도 생태주의와 여성주의, 이주 노동자와 시민권 등 다양한 근본 문제들이 있다. 하지만 평화 통일에 대한 국제주의적 접근이, 이러한 근본 문제들 중 하나로서, 한국 좌파의 전면적 재구성과 직결된 중요한 사안이라는 점만큼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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