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두에게는 각자의 지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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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7월 07일 09:3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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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지 쌓인 사무실 책꽂이 한켠에서 우연히 고은의 시집을 펼쳐들었다. 그래서 지금 고은의 시를 읽는 것은 우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시집 『해금강』은 1991년 한길사에서 나왔다. 아마 지금쯤은 절판돼 쉽사리 구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고은의 시는 결코 마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가령 이 시집 말미에 실린 다음의 시인의 말이 지금도 유효하다.

    “시에 관한 한 나는 철들 날이 없을 지 모른다. 아니 시에 대한 내 청년적인 열정조차 소년의 동경세계로 돌아가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시인 33년의 삶이 이것이다.” “내가 죽은 뒤 몇 년 뒤 누군가가 내 무덤을 파헤쳐본다면 거기에도 내 뼈 대신 내가 그 무덤의 어둠 속에서 쓴 시로 꽉 차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내가 살지 않는 미래까지도 내 시의 현재이지 않으면 안된다.”

    도대체 시가 무엇이길래 시인을 이토록 시로 내모는 것일까? 그 대답을 이 시집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고은은 『해금강』에서 시를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고 있다. 다만 시보다 더 포괄적인 의미에서 글을 말하고 있는 시를 세 편 가량 수록하고 있다. 순서대로 나열하면 <마당에 나갔다가> <귀로> <글>이 그것들인데, <글> 한 편을 집중적으로 읽어보는 것으로 대신하자.

    글이란 무엇인가
    어느날 나는
    글이야말로 지옥이라고 대답했다
    아프리카 피그미족 아이들
    나뭇잎 움막 안에서
    글자 한 자 없이 나온다
    어느날 나는
    피그미족 아이들이야말로 지옥이라고 대답했다

    그 아이들은 일자무식으로 지옥이고
    나는 만권의 책으로 지옥이다

    이 세상을 니르바나라고 말하는 자 철딱서니 없어라
    -<글> 전문

       
      ▲ 시인 고은 (사진=뉴시스)
     

    시인은 우선 “글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이 내면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타인이나 어떤 특별한 상황으로부터 대답을 요구받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그 질문은 상당 시간 지속되고 있다는 의미에서 시인에게는 일종의 화두와 다를 바 없다.

    “어느날 나는…대답했다”라는 진술을 두 번 반복함으로써 그 질문과 대답의 시간성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시간성 속에서 시인은 “글이야말로 지옥”이라고 답한다. 그런데 ‘글, 글쓰기, 시쓰기=지옥’이라는 대답은 창작의 고통에 대한 은유 혹은 상징으로서 이미 우리가 익히 들어왔던 발언이지 않은가?

    경우에 따라 우리는 얼마든지 시인의 시인됨이자 깊이로, 시인의 유치(幼稚)와 엄살로 그 발언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귀에 박힌 말인 셈이다. 고은의 ‘지옥’은 그 어느 쪽일까?

    시인은 조금 방향을 튼다. 시인은 글에 대해 다시 말하는 대신 지옥에 대해 말한다. 곧 A=B로 이루어진 은유에서 원관념인 A에 대해 되풀이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조관념인 B를 변주한다. 글은 지옥인데, 지옥은 또 “피그미족 아이들”이라고 말하는 식이다.

    되풀이하면 글=지옥=피그미족 아이들이 된다. 이같은 등호의 연쇄를 일종의 시적 확장이라고도 말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피그미족 아이들은 글과 지옥과 어떤 연관을 갖고 있는가? “피그미족 아이들은 나뭇잎 움막 안에서 글자 한 자 없이 나온다”라는 구절을 해석하면 그 답이 있으리라.

    위 구절에서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해보자. 피그미족 아이들에게는 “글자 한 자 없”다라는 것과 “나뭇잎 움막 안”이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 아이들은 비참하고도 열악한 삶의 조건 속에서 삶을 영위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후자는 쉽게 이해되지만 전자가 의미하는 바는 조금 애매하다. 왜냐하면 글을 지옥이라고 말하는 시인에게 글이 없는 상태 혹은 글 없이도 살 수 있는 삶은 오히려 지옥으로부터의 벗어남 혹은 해방감이라고도 생각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 대목에서 그 아이들은 “일자무식” 곧 글의 결핍이어서 “지옥”이라는 역설의 방식을 택한다. 글의 과잉이 지옥인 것처럼 글의 결핍 역시 지옥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에게 “글”은 그 어떤 상황에서든 “지옥”일 수밖에 없다. 글 속에 갇혀 있어도 지옥이고 글과 무관하게 살아도, 글을 가진 자도 글을 못 가진 자도, 다 같은 지옥의 수인(囚人)인 것이다.

    시인에게 글은 절대적인 존재의 터전인 셈이다. 시인은 자신의 상상력 속에서조차 글에서 벗어나는 그 어떤 경우수도 내비치지 않는다. 시인은 지옥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꾸지 않고 오히려 지옥으로의 유폐를 선언한다. 고은은 그렇게 자신의 시인됨을 밝힌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자신에게 해당되는 기준을 타인과 사물들에게 일방적으로 적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이다. 곧 피그미족 아이들이 일자무식이어서 지옥이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유아론적이거나 자기본위적인 규정인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아프리카 피그미족 아이들이 지옥일 수 있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겠지만, 글이 지옥인 작가가, 일자무식인 타인들을 지옥이라고 말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글을 쓰는 시인에게 글은 시인을 재단할 수 있지만, 바로 똑같은 정도로, 시와 무관한 타인의 삶을 글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아 재단해 말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그것은 지나치게 유아론적이고 자기 과신적이지 않은가?

    그 연장선상에서 시의 마지막 구절 “이 세상을 니르바나라고 말하는 자 철딱서니 없어라”를 보자. 여기에 등장하는 “니르바나”는 특정한 종교적 언어라기보다는 “지옥”이라는 명사에 반대되는 개념일 뿐이다. 곧 지옥과는 달리 평온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그 어떤 곳을 일컫는 말인 셈이다.

    시인은 이 세상을 그런 곳이라고 말하는 자들을 “철딱서니 없어라”라고 질타한다. 글도 지옥이고 삶도 지옥인데 어찌 평온과 행복이 가능하겠냐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이 살만한다는 소리는 문리(文理)도 물정(物情)도 터득 못한 한낱 잡소리일 뿐이라는 것이다.

    요약해보면, 시인은 자신의 지옥을 통해 세상의 지옥을 본다. 글은 시인에게는 과잉이어서 지옥이고, 타인에게는 결핍이어서 지옥이다. 시인에게 ‘글지옥’은 세상을 보는 절대적인 눈이다. ‘글지옥’에 있는 한 시인은 천상 시인이다.

    문제는 누구나 시인일 수는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는 데 있다. 시인에게는 시인의 눈이 있고 농부에게는 농부의 눈이 있다. 곧 각자에게는 각자의 지옥이 있다. 각자의 지옥에는 각자 혼자만이 수인인 세상이 바로 제대로 된 니르바나인 것은 아닐까? 하여, 나는 이제 시집을 내려놓으면 나만의 지옥으로 간다. 지옥이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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