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나무는 살아남기 위해 달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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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6월 30일 10:1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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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 전 대학 신입생 시절에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이 있었다. 누군가로부터 선물 받고 읽었던 책. 이른바 ‘의식화’의 맨 첫머리에 있던 책들 중의 하나였다. 이제 그 책에 대한 기억은 가물가물하고 다만 나비가 그려진 노란 표지만이 선명하게 기억될 뿐이다.

세기가 바뀐 지금, 2천원에 산 빨간 포트에 담긴 꽃을 보며 나는 생각한다. 저 꽃이 지금은 가고 없는 누군가를 대신해 꼭 한번쯤은 나에게 말을 건넬 것만 같다고. 그 희망에 빨간 포트의 수는 점차 늘어만 간다. 하지만 꽃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꽃들이여 희망을!

내 안의 세월을 가늠해보면, 꽃은 민중 자유 혁명 등등에서 소통 그리움 운명의 항목으로, 집단에서 개인으로 그 자리를 움직여 왔다. 영어식으로 말한다면, 대문자에서 소문자로 바뀐 셈이다. 도대체 그 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꽃은 말이 없고, 나는 어떻게든 대답을 해야 한다.

   
  ▲『욕망하는 식물』마이클 폴란.  
 

『욕망하는 식물』의 저자 마이클 폴란은 식물과 인간의 관계에서 그 주종관계를 뒤집는다. 책 제목 ‘욕망하는 식물’-원제는 욕망의 식물학The Botany of Desire-에서부터 그렇다. ‘욕망’이라는 명사는 아무래도 식물보다는 동물에게 더 잘 어울린다.

가령 ‘꿈꾸는 식물’이지 ‘욕망하는 식물’이 아니다. 하지만 저자는 “식물은 욕망한다”라고 잘라 말한다. 좀 멋부려 말한다면, “욕망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식물판 데카르트식 코기토인 셈이다.

눈치 빠른 독자들이라면 이 대목에서 『욕망하는 식물』이 이른바 환경 혹은 생태관련 서적이라는 사실을 눈치챘으리라. 맞다. 『욕망하는 식물』은 식물의 입장을 충분히 들여다보며 인간과의 공생, 책의 표현을 따르면 인간과 식물의 공진화(公進化) 면모를 추적한다.

곧 인간에 의한 식물의 일방적 지배와 길들이기가 아닌, 인간과 식물 각각의 욕망이 부딪치고 화해하고 길항하는 자연의 지도를 그려내고자 한다. 그리고 그 탐색의 끝은 모든 삶의 근원인 자연을 새로운 눈으로 새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저자가 고리타분한 원론만을 늘어놓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변적이기 보다는 오히려 직접적이고 구체적이며 때로는 드라마틱하기도 하다. 식물의 욕망과 인간 길들이기의 예로 드는 것은 사과나무, 튤립, 감자, 대마초 이 넷이다.

이 넷이 선택된 이유는 “사과를 통해 달콤함을, 튤립을 통해 아름다움을, 대마초를 통해 황홀함을 그리고 감자를 통해 지배력”(p.24)의 변천과정을 살펴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가령 사과나무. 사과나무는 자신의 생존과 번식을 위해 애초 자신이 갖고 있던 신맛이 아닌 달콤함이라는 새로운 맛을 인간들에게 제공함으로써 인간과의 공생-공진화를 펼쳐왔다는 것이다.

에덴동산의 선악과가 사과나무라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지만 ‘선악과=사과나무’라는 등식이 생겨난 것은 바로 인간과 사과나무의 욕망이 만나 이루어낸 합작품인 셈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사과, 튤립, 감자, 대마초에 대한 저자의 이야기가 그다지 새롭지는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주체로서의 인간을 객체로서의 인간으로 뒤집어 보는 사고 역시 그렇다. 하지만 『욕망하는 식물』이 지닌 미덕은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에서 크게 돋보인다.

하나의 아이디어에 디테일과 스케일을 부여하고 관통해나가는 방식은 여타의 환경 생태관련 저자들이 참고할만 하리라. 그렇고 보면 책도, 저자와 더불어 진화해나가는 것은 아닐런지. 아니 지금 이곳의 책에 대해서야말로 책을 주체의 입장에 세워야 하는 것은 아닐런지.

추신. 나의 꽃은 어디로 갔을까? 나는 결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라는 생각을 버린 적이 없다. 아니 꽃이 결코 사람보다 아름다울 수 없다고 믿는다. 꽃은 꽃일 뿐이다. 그러나 이제 조금씩 꽃이 아름다워진다. “꽃에 욕망과 운명을 기대어볼까?”라는 생각이 움튼다. 너무 일찍 철이 드는 것일까 아니면 너무 일찍 늙어버리는 것일까? 꽃아 사람아 대답해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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