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젊은 혁명가들은 학원 선생이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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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6월 29일 08:3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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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은강’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공업도시 인천, 80년대 이 땅 청년 혁명가들의 마음의 고향이었던 인천, 한국의 뻬쩨르스부르그가 되기로 약속되었던 인천, 그 도시로 나는 돌아왔다. 2007년 6월 19일 부평으로 송경평을 찾았지만, 벗들의 소식을 전해 듣는 귀향은 쓸쓸했다.

    20년 전 인천의 ‘혁명가’들은 여러 곳으로 흩어지고 그 중의 한 사람, 박종혁은 서울에서 나를 보자고 했다. 20년 전에도 나는 인천으로 가고자 했지만, 항상 마포에서, 여의도에서, 방배동에서, 고척동에서 맴돌아야 했다. 인천에는 형사들이 득실대고 나와 나의 동지들은 혁명을 선동하는 불온 문서를 써야 했기 때문이다.

    이미 40대 후반, 또는 50대 초반이 되어 지금은 결코 그럴 리 없는 나의 동지들은 과연 20년 전에 얼마만큼 현실과 역사책 속의 이야기를 혼동하였을까? 진정으로 세기 말의 인천과 세기 초의 뻬쩨르스부르그를 혼동했을까? 그건 알 수 없지만 수많은 청년들이 러시아혁명 재현의 환상을 품고 인천으로 몰려든 것이 사실이다.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은강’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공업도시 인천은, 80년대 이 땅 청년 혁명가들의 마음의 고향이었다. 사진은 인천 최대 공단인 남동공단.  
     

    인천은 거기 그대로 있었지만 젊음과 혁명의 환상은 가고 없었다

    1986년 가을, 나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내가 맡은 일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전략 전술을 우리 현실에 적용하는 것이었다. 골방에 갇혀 인천에서 시작될 혁명의 그림을 그려댔다. 너무 빨리 1987년 6월이 왔고 7, 8월이 왔다. 민주주의 혁명은 찰나처럼 지나가고 프롤레타리아트는 책에서 걸어 나와 현실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우리는 노동자 계급이 민주주의 혁명에 참여하여 그것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성장 전화 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국으로 청년들을 보내고 <정세와 실천> <노동자의 길> <사회주의자> 따위 잡지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1987년과 88년, 우리는 미친듯이 열심히 무언가를 하면서 급변하는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권우철은 양우진 교수의 한국 자본주의에 대한 관점을 받아들여 6월의 변화가 단순히 정치적인 변화가 아니라, 사회경제적이고 물질적인 토대로부터 유래된 불가역적인 변화라고 주장했다. 그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로의 점진적 이행’이라는 테제를 내놓았다. 결국 노동자 계급도 선거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 전술적 결론이다.

    인천은 거기 그대로 있었다. 아니 더 큰 대도시가 되어 있었지만, 그러나 80년대의 노동자 도시 인천은 없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발상지로 점지된 인천은 없었다. 젊음과 치기와 혁명의 환상은 거기 없었다. 벗들은 거기 없었다.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수천 노동자들을 설레게 했던 송경평은 학원 수학 선생이 되어 있었다.

    15년 전,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노선을 폐기했다

    우리는 레닌만큼이나 열심히 신문을 읽고, 정세 흐름을 붙잡으려 노력했다. 노동자 계급의 눈과 더듬이가 되어 한국 사회와 세계의 변화를 읽었다. 1987년의 변화는 읽었다. 그러나 동유럽의 혁명과 소련의 붕괴를 예측하지 못하고 금방은 이해하지도 못했다. 궁지로부터의 탈출, 전위당을 자진 해산하는 ‘신노선’을 채택했다.

    이번에도 이론가 권우철이 아이디어를 냈다. 우리는 충분한 토론 끝에 600명의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지하당원들의 투표로 지하조직을 자진 해산하는 신노선을 채택했다. 그리고는 ‘한국노동당’ 창당에 나섰다. 그러나 경찰은 나와 민영창, 전성, 이용선을 잡아갔다. 나는 경찰 측에 ‘나의 정치 소신’이라는 메모를 제출하였다.

    나는 그 메모를 통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 노선, 폭력혁명 노선, 전위정당 노선을 폐기한다”고 선언했다. 신노선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것이며 신노선의 정치철학적 배경을 밝힌 것이다. 민영창, 전성, 이용선 동지는 내가 적성한 문서에 대해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주었다. 이로써 1992년 1월 우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검찰은 나의 메모에 만족하지 않고 수배자들의 사상도 알아야겠다고 했다. 같은 내용으로 18명의 수배자가 구속 중인 4명에 대한 탄원서를 제출하면 수배자들을 잡아들이지 않겠다고 역제안했다. 격론 중에 조근래는 같은 내용을 신문 광고로 밝히자고 제안했다. 가장 옳은 주장이었지만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주장이었다.

    ‘탄원서’를 언제 어떻게 기념할 것인가?

    홍기표는 1973년 프랑스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발리바르의 논리 정연한 비판을 무시하고 만장일치로 결정했던 것처럼 분명하게 프롤레타리아 독재 노선을 폐기한 적이 우리나라에서는 ‘탄원서’ 사건 외에는 없는 것 같다고 말한다. 만약 그렇다면 탄원서 사건 15주년 기념식이라도 열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그는 이야기한다.

    탄원서보다는 신문광고로 밝혔다면 좋았을 텐데, 서울구치소의 나는 그런 제안이 있었는지도 몰랐으니… 검찰은 동네 깡패처럼 굴욕을 원했고 우리는 한신이 했던 대로 자존심을 버렸다. 그리고 15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그 굴욕을 경멸하면서도 그렇다고 당당하게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옹호하지도 못한다.

    지금은 서울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를 하는 구인회가 썼다. “각별히 중요한 의미를 띠는 사건으로서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창당 준비위원회’의 자발적 해산을 꼽고자 합니다. 이 조직의 해산은 그간 노동운동 등의 정치적 그룹들이 지향해온 ‘비합법 전위 조직 노선’의 폐기를 명백히 천명한 것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입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이름 아래 노동자의 국가로 알려져 왔던 사회주의 국가가 실은 공산당의 일당 독재에 다름 아니었음을 많은 사람들이 확인하였습니다….” 신노선의 실천 과정에서 만난 복병, 대한민국 공안당국이 요구한 탄원서는 부끄럽다, 나의 조국만큼이나. 그러나 우리는 신노선을 따라 여기까지 걸어왔다.

    그러나 지난 20년은 민주주의를 회의하는 나날이었다

    1987년 겨울 백기완 선거와 1988년 봄 부평의 송경평 선거를 시작으로 지난 20년 동안 우리는 숱한 선거를 경험하였다. 그러나 선거를 경험할수록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는 깊어갔다. 소크라테스가 목숨을 걸고 민주주의를 반대했던 이유가 이해되었다. 때로는 심지어 민주주의에 바친 청춘이 아깝고 후회스럽기도 하였다.

    우리가 경험한 민주주의는 금권정치, 선동정치, 중우정치, 바로 그것이었다. 플라톤이 보았던 아테네 민주주의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노동자, 민중을 위한 정책을 주장하고 온 국민이 바라는 깨끗한 선거를 하고, 아니 근본적으로 우리가 선거와 정치에 참여한 동기 자체가 순수함에도 우리는 10%도 표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신영복 선생은 다른 이야기도 한다. 최근 나온 책 <여럿이 함께>에서 영국 유전학자 프란시스 골튼(1822~1911)이 시골 장터에서 겪은 일화를 소개했다. 시골 장터에서 황소 몸무게 알아맞히기 퀴즈에서 아무도 답을 맞히지 못했지만, 퀴즈에 참가한 사람들이 적어낸 몸무게를 합쳐서 나누어 보니 맞았다는 이야기다.

    개미 한 마리 한 마리의 지능은 미미하지만 수만 마리로 이루어진 개미 군집의 지능은 놀랍다. 자신들의 생존에 필요한 일을 놀랍도록 해내고 생존할 수 있는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농사도 짓고 목축도 하고 열대지방 흰개미는 놀라운 건축물도 짓는다. 그래서 하트와 네그리라는 학자는 ‘무리 지성’이라는 말도 지어내었다.

    우리는 진정한 민주주의자인가?

    윤종훈과 내가 자주 인용하는 바, <한겨레>가 2004년 5월 17일 창간 16돌을 맞아 전국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전화 여론조사를 했는데 “앞으로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한가”라는 질문에 답하기를 북유럽식 사회민주주의 44.8%,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39.2% 기타 2.8%, 무응답 13.2%였다.

    이 얼마나 의미심장하고 대단한 결과인가?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10% 미만의 지지에는 우리 탓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뜻밖에도 우리 자신이 충분히 민주주의자가 되지 못한 것은 아닌가? 혹시 우리는, 우리의 행동과 생활 습관과 실천은, 우리의 몸은 아직도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내버리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가?

    민주주의는 그 공동체의 생존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공동체가 생존하기 위해서 나아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를 판단하는 데는 대중의 판단이 가장 정확하다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 진정한 민주주의자라면 우리가 옳다고 믿는 바를 가르치려 하기 전에 대중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먼저 들어야 한다.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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