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국가로의 제헌? 그 필요성과 가능성
        2007년 06월 28일 04:3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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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진보정치연구소가 주최한 87년 20주년 토론회가 열렸다. 요즘 봇물처럼 유행을 이루고 있는 달력 행사의 하나이지만, 이제는 비난받는 권력이 된 이들의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리고 학술 주체가 아닌 정치 주체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역사의 현재성에 가장 가까울 수 있는 자리였다.

       
      ▲ 27일 오후 진보정치연구소가 주최한 87년 20주년 토론회가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에서 열렸다. (사진=레디앙)
     

    그 1부는 1987년에 대한 고찰이나 평가였고, 2부는 진보정치연구소가 준비해온 ‘사회국가론’, 즉 역사의 미래에 대한 것이었다.

    1부, 장석준(진보정치연구소 연구기획실장)의 발표 「6월 항쟁이 넘어서지 못했던 것, 지금 우리가 넘어서야 할 것」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6월 항쟁은 한국 사회에 일반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결정적 출발점이 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었다. 또 아시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성공적인 민주혁명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6월 항쟁에는 ‘수동혁명’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다. 기존의 지배 세력이 민중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거나 혹은 저항 세력의 일부를 흡수함으로써 지배 질서의 안정적 재생산을 도모하려 한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6월 항쟁의 한계를 시공간적으로 더 확장해 볼 수도 있다. 분단이 고착화된 48년이나 53년처럼 1958년도 중요하다. 1958년 조봉암이 사형됨으로써 자유주의보다 왼쪽의 이념이 거세되었고, 그런 지형이 87년에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6월 항쟁은 바로 이 58년 틀거리 안에 있었으며 그것을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세계사와 한국사의 역사적 제약이 87년 민주혁명의 의제 형성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졌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적 제약들을 극복할 방안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계기는 바로 제헌적인 대중 토론이었다. 브라질 등의 민주화 과정을 살펴보면, 제헌적 대중 토론 과정이 이후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의 진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침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는 이것이 제대로 시도되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87년 체제’를 넘어설 새로운 역사적 가능성들을 깨워내기 위해서는 제헌적 대중 토론의 새로운 시도가 필요하다. 이것은 또한 지난 번 민주혁명의 해방적 에너지는 고갈되었으면서도 변화의 조짐은 안개에 싸여있는 지금, 변화를 열망하는 모든 세력에게 던지는 하나의 제안이다.”

    약정 토론자들은 주로 장석준의 ‘제헌적 대중 토론’이라는 제안에 대해 조심스러운 태도를 표했다.

    박상훈(후마니타스 주간)은 법이나 제도를 중심으로 접근하는 방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의문을 제기했다.

    “법률주의는 플라톤의 후견인주의나 요즘의 전문가주의처럼 민주주의에 대립하는 함정에 빠질 수도 있다. 법률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이 커지면 국민투표 민주주의 같은 것으로 빠지게 되는데, 국민투표조차도 사회구성원 전체가 참여하기보다는 특정한 사회세력이나 집단의 대표, 엘리트들에 의해 규정되는 바가 크다. 헌법에 사회권을 집어 넣는다고 사회권이 실현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민중들에게 법률 잘 만들면 잘 되지 않을까라는 환상만을 심어줄 수도 있다.”

    조희연(성공회대 통합대학원장)은 현재의 민주주의에 대해 조금 더 긍정적인 평과 함께 당시에 ‘제헌적 상상력’이 실재할 수 있었을까 하는 취지의 토론을 하였다.

    “양극화 때문에 한국 민주주의가 위기라는 평 자체가 한국 민주주의의 성숙을 보여주는 건 아닐까. 다른 나라에서는 양극화 문제를 민주주의와 연관시켜 보지도 않지 않는가. 직선제가 지나친 최소 요구화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본인 스스로도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못했다. 이런 것이 바로 역사적 제약이다.

    지금은 87년 헌법의 해석 투쟁 시기이다. 진보파는 그것을 확대 해석하고, 보수파는 그것을 제한 해석한다. 이 상황에서 개헌으로 넘어가려면 분노하는 대중이 있어야 한다. 제헌보다는 헌법에 담을 급진적 대안을 대중화하는 것이 현 시기의 과제다.”

    심상정(민주노동당 국회의원) 역시 ‘제헌’ 문제에 대해 유보적인 견해를 표했다.

    “87년이 ‘부르주아혁명’이라는 평가는 학술적으로 인정하지만, 그것만으로 87년을 이해할 수는 없다. 87년이 봉건 파괴나 산업화 초기가 아니고, 발달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요구들이 있었던 것을 보아야 한다. 그래야 노동자 총파업이 터졌던 것을 설명할 수 있다.

    제헌적 헌법 투쟁을 실제 사회운동으로는 어떻게 할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 사회운동을 펼 수 있는 주체를 어떻게 형성하느냐가 현재의 과제가 아닐까. 그리고 지금의 비정규직 문제 같은 걸 헌법상의 제약 때문이라고만 볼 수도 없는 것 아닌가.”

    약정토론자들의 이런 토론에 대해 장석준은 “‘제헌’은 수식어이고, ‘대중 토론’에 강조점이 있다고 보아 달라. 이 제안의 문제의식은 현재의 정치구조나 현실이 새 가능성을 내놓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으로부터 나온다. 그런 현실 정치체제를 초월해야 한다는 점에서 ‘제헌적 대중 토론’의 필요성을 제기한 것”이라고 답했다.

    이날 토론회의 2부에서는 진보정치연구소가 꽤 오랜 시간 공을 들인 대안사회론이 군사외교적 분야까지 포함하여 ‘사회국가’라는 틀거리로 정리돼 제출되었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사회국가는 시장국가, 혹은 자본국가에 대응하는 개념이다. 사회국가는 사회적 시장경제, 사민주의, 그리고 새로운 사회주의의 한계와 성과를 극복, 계승하고 한국적 현실에 맞는 새로운 국가를 지향한다.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국가는 분단국가에서 남과 북 모두의 민주적 평화국가, 통일국가이다.

    ‘분배를 통한 성장’은 재정지출을 통해 양극화를 억제하고 미래자원에 대한 투자를 강조한다는 데 의의가 없는 것은 아니나, 지속가능한 경제운용에 있어서 미래산업에 대한 비전이 빠져있는 것이 약점으로 지적된다. 따라서 경제에 대한 새로운 좌파적 시각은 미래에 ‘지속가능한 동력자체에 대한 새로운 구상’과 장기적으로 ‘성장을 추동할 수 있는 복지전략’을 동시에 마련하는 것으로 정리될 수 있다. 사회국가의 대안적 경제기조는 조직노동의 주도적 역할과 경제의 공공화이다.

    사회국가에서의 복지는 변화된 한국 사회 즉 노동시장이 유연화되고 양극화가 구조화된 사회의 문제와 위험을 해결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재편되는 것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복지예산의 확대,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보장시스템의 체질개선이 요구된다. 또, 사회복지를 체감하여 그 확대를 원하는 세력을 형성하는 복지동맹 전략을 펴야 한다.

    사회국가는 탈동맹 평화중립 국가이다. 첫째, 평화체제 형성을 최우선으로, 둘째, 한반도 통일과정에 대비, 셋째, 다자안보협력 질서의 형성이 탈동맹 평화중립 국가로 가는 길이다. 이런 원칙에 입각해 안보전략의 전환과 한반도 공동안보체제의 구축, 한미동맹의 전환과 주한미군의 철수, 동북아시아 다자안보협력의 형성을 이루어야 한다.”

       
      ▲ 조승수 진보정치연구소 소장 (사진=레디앙)
     

    조승수(진보정치연구소 소장)가 발표한 ‘사회국가론’에 대한 토론은 그 실현 가능성에 대한 것과 구상 자체가 올바른 것인지로 모여졌다.

    이대근(경향신문 정치국제 담당 에디터)은 “사회국가론은 동북아 국제질서나 외교안보환경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목표를 설정하고 있다. 특히 북한에 대한 고려가 빠져 있다. 민주노동당은 북한 문제만 나오면 객관성을 잃는데, 북한을 정확히 읽어야 한다. 북한은 남한이나 민주노동당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움직인다. 북한은 미국과는 대화하지만 남한과는 대화하려 하지 않는다. 이런 북한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조언을 던졌다.

    조국(서울대 법대 교수) 역시 사회국가론에 포함된 일부 정책의 변경을 주문했다. “중국이라는 강국 옆에 있는 상황에서 대중이 ‘주한미군 철수’를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유엔평화유지군’ 같은 정책으로 변경해야 하는 건 아닐까. 교육정책은 전교조 것과 비숫할텐데, 이것으로 교육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3불 정책이 옳지만 그것을 유지되는 가운데 학생과 학부모의 고통이 커지고 있지 않나.”

    박순성(동국대 북한학 교수), 오유석(성공회대 사회학 교수), 강원택(숭실대 정치학 교수)은 서로 다른 관점에서 민주노동당과 ‘사회국가론’의 정체성에 대해 토론했다.

    “민주노동당은 평화를 강조하지만, ‘정예화된 군대’ 같은 개념은 정부와 국방부의 안보론을 그대로 가져다 쓴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평화론의 실제로는 안보담론이나 세력균형담론일 뿐이다. 이것은 민주노동당이 정권을 잡으려는 정당이라는 점에서 오는 딜레마 때문이다. 사회국가란 개념에 평화나 생태를 담을 수 있는가. 무리라고 생각한다. 국가적 관점에서 벗어난 시민국가, 탈국가에 대해서도 고민이 필요하다(박순성).”

    “노동자들까지 성장주의와 개발주의를 내화하고 있는데, 노동자 중심으로 아래로부터의 연대를 통한 집권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환경이나 여성, 풀뿌리 운동이 더 급진적이지 않는가(오유석).”

    “사회국가론에는 집권프로그램이 빠져 있다. 민주노동당은 스스로 소수세력, 비판적 저항세력이라 규정한다. 정당인지 운동인지 하는 자기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분명히 해야 한다. 더 과감하게 집권으로 나가야 한다(강원택).”

    노회찬(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은 민주노동당의 현실에 대해 비판적 의견을 표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민주노동당에 대한 이미지는 ‘운동권, 민주노총, 머리띠, 친북’ 같이 대단히 단편적인 것이다. 정당의 정체성은 어떤 사회를 만들려 하는가인데, 민주노동당이 이런 상을 제시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대중에게 전달하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사회국가론 역시 상이 잡히지 않는다. 비자본주의보다는 포스트 87년 체제 같은데, 포스트 87년 체제의 핵심은 6월에 종속되어 있는 7, 8월을 성장시키는 것이다. 노동운동이 혁신되고 성장해야지 사회국가로 갈 수 있다. 따라서 사회국가론에는 노동운동 혁신방안이 더 중요하게 배치되어야 한다.”

    앞선 1부 토론에서도 노동운동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김성희(비정규노동센터 소장)는 “민주노조운동의 역사적 정당성이 다 했는가. 대중적 평가는 이미 끝났다. 현재의 민주노조운동은 정당한 비판마저 정파 문제로 치부할 정도로 심각한 지경에 처해 있다.”고 매몰차게 비판했다.

    노중기(진보정치연구소 부소장)는 민주노동운동에서 민주노동당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양 노총의 분립 문제나 비정규직 문제를 한 쪽 정규직 노조인 민주노총 내부 역량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민주노동당이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해결해야 한다. 하지만 그 개입이 정책을 만들어 내놓는 것 정도여서는 안 된다. 노동운동의 제반 문제에 대해 정치적으로 제안하고 그 해결과정을 주도해야 한다.”

    1987년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를 학술적으로 규명하거나 어떤 규명이 이견 없는 정의로 굳어지지는 못할 것이다. 이전의 역사 서술이 으레 그러하였듯 87년 역시 정치적으로 평가되리라. 따라서 현재의 정치인 민주노동당, 그 정치의 미래이고자 하는 사회국가론이 87년 논쟁의 해답이어야 한다.

    하지만 조승수는 사회국가론이 “아직 공동 연구에까지 다다르지 못한 개별 연구의 집합 수준”이라고 고백한다. 공동이 아닌 집합, 우리는 87년으로부터 꼭 그만큼쯤 벗어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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