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어나라, 황광우
        2007년 06월 26일 03:1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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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석 달 전 일인가? 아침저녁으로는 여전히 바람이 차던 4월의 어느 날이었다. 뜬금없이 아침부터 정문철 선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정호야, 지금 바쁘냐? 광우 형이 갑자기 쓰러지셨어야. 오늘 아침에 병원으로 실려 왔다는디, 팔다리를 전혀 못 쓰신다. 시간 나면 기독병원에 있으니까 좀 들러라.” 보듬고 있던 아이를 아내에게 맡기고 집을 나섰다. 병원 중환자실 앞엔 김상호, 윤정근 선배가 문철 선배와 함께 있었다.

    쓰러진 황광우

    그들로부터 전해들은 자초지종은 이러하다. 병원에서는 건강이 나빠진 황 선배에게 진작부터 푹 쉬실 것을 권했다 한다. 당신도 크게 염려되셨던지 담양에 계신 큰형님(황승우 스님)을 찾아 몸을 의탁하셨다.

    그러나 황 선배는 암자에서 며칠 지내는 동안 산내음 들내음에 취해 자신의 몸이 어떠한지조차 잊어버리신 모양이다. 무리하게 몸을 놀려 스산한 산골의 새벽바람을 맞고 그대로 쓰러지셨다. 마침 같이 계시던 큰형님께서 손을 따고 급전해 구급차를 부르셨다.

    하지만 산골 깊은 곳까지 차가 들어올 리 만무하다. 하는 수 없이 동아줄로 몸을 묶고 헬기에 매달려 광주의 기독병원까지 실려 오셨다 한다. 그 시린 새벽 공기를 가르고.

    잠에서 깬 황 선배를 만나러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딱딱하게 굳은 손끝마다 시커먼 피딱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바늘로 손끝을 찔러도 피가 나오지 않아 급한 대로 칼로 살점을 뜯어내 생긴 상처였다.

    우리는 황 선배를 둘러싸고 이곳저곳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도 사람들은 이런 저런 말수작을 걸었고, 중풍 환자가 되어 옴짝달싹 못하게 된 황 선배도 얼핏 설핏 웃음을 띠며 분위기를 거드셨다. 그래, 내일 초상을 치르더라도 오늘은 웃는 것이 현명한 법이다.

       
      ▲ 『젊음이여,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창비)』
     

    『젊음이여,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창비)』는 나이 오십도 못 채우고 중풍을 맞은 58년 개띠 인생이 주변의 지인들과 얼기설기 엮어간 80년에서 87년에 이르는 우리의 역사 이야기이다. 그 시절이 바로 현대사에서 가장 아름다웠고 가장 보람 있었던 때라고 말하면 밝은 마음으로 어두운 뒷골목에 몸을 숨겨야 했던 선열들에 대한 결례가 될까?

    아직 살아남은 우리들이 “옛 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하면서 가슴 뿌듯이 부끄러워할 수 있는 것도 그 시절의 풍문 때문이지 않을까?

    이 책을 읽을 때 우리는 한 사람의 손을 빌려 그 풍문의 냄새를 추적해 갈 것이다. 우리는 그 어느 날엔가 더러는 전경의 발 아래 놓이기도 하였고, 더러는 자기가 던진 ‘꽃병’에 쓰러지는 전경을 보며 자책하기도 하였고, 더러는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밤새 노래 불렀을 것이다.

    그때는 모두들 ‘민주’나 ‘혁명’의 냄새에 만취해 있었다. 80년 서울의 봄에 잠깐 피었다 자취를 감춘 그 들꽃이 87년 뙤약볕 아래 만개하게 되었을 때, 거리로 나선 사람들의 살내음 땀내음까지 머금은 그 꽃의 가시가 모두의 맘속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도 다시 찾고 싶은 고향과도 같은 흔적을.

    80년대의 풍문 혹은 흔적

    그 후로도 오랫동안 뜨거웠던 거리의 공기는 풍문으로 남아 늦은 저녁 술자리로 다시 찾아오건만 우리는 그 풍문의 정체를 소상히 알지 못했다. 6월 28일 ‘평화대행진’을 벌였던 백만 사람들의 가슴에서 그 꽃이 피어나기까지, 다들 숨죽이고 스멀스멀 땅 위를 기고 있던 그 시절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가?

    어느 누구는 칠성판 위에서 죽어가고 어느 누구는 저수지 위로 떠올랐다지만 어느 누구도 그 소식을 소상히 전해줄 수 없었다. 그 풍문의 정체가 궁금하다면 오늘 밤, 밤 새워 이 책을 읽어볼 일이다.

    『젊음이여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나온 이 책은, 내가 인천의 목민학원에서 건네받았던 『인연(因緣)』이라는 제목의 가제본과는 내용이 많이 달랐다. 원색적인 글귀나 문장은 한결 유순해졌고, 기억에 의존해 정확하지 못했던 사실의 기록은 정정되어 있었다.

    이런 식이다. 87년 3월에 뿌려졌던 ‘우리의 노동현장, 고문실과 무엇이 다른가?’라는 제목의 ‘타도투위’ 유인물에는 “전두환을 고문실로! 이순자를 부천서로!”라는 구호와 함께 이런 글이 실려 있었다.

    “노동자 여러분! 경동의 아줌마가 밤낮 혹사당하다 죽은 것과 신호수, 김용권이 놈들에게 맞아 죽은 것은 무엇이 다릅니까? 노동자야말로 민주주의도 없고 인권도 없이 가장 짓밟히고 가장 착취받고 있지 않습니까? 푼돈에 노동자의 피땀을 쥐어짜는 개 같은 노동현장이 치안본부의 고문살인실과 다를 게 무엇입니까?”

    하지만 출간된 책에서는 이 글귀를 찾아볼 수 없다. 생생한 육성들과 거친 고민들이 정제된 자리에 역사와 시대를 조망하는 너른 안목이 대신 들어앉았다. 읽는 이들로서는 삿된 감정이 아닌 이성의 눈으로 그 시절을 찬찬히 되돌아볼 수 있어 좋을 것이다.

    바위를 뚫는 물방울

    가제본 『인연(因緣)』의 뒷자락에 실려 있던 강용주의 옥중서신과 황지우, 홍윤기, 주대환의 대표논설 또한 출간된 책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1980년 5월 26일 밤, 어머니의 만류를 뒤로 하고 계엄군에 맞서 도청을 지켰던 강용주의 옥중서신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저는 바보입니다. 기꺼이 어리석은 사람이 되려고 하구요. 다만 이 어리석음이 바위에 부딪쳐 깨지는 달걀이 아니라 바위를 뚫는 물방울이 되기를 원하고 있을 뿐이죠.”

    강용주의 옥중서신에 황 선배는 이렇게 답한다.

    “물방울이 바위를 뚫을 수 있다! 단, 여기에는 한 가지 단서가 필요하다. 셀 수 없이 반복되는 횟수이다. 이것 없이 물방울은 바위를 뚫지 못한다. 권인숙은 한 명의 위장 취업자였다. 위장취업자 한두 명의 힘으로 군부독재를 물러서게 할 수 없었다.

    한두 명이 아닌 수만 명의 위장취업자가 출현하자, 위장취업자의 물결은 사회를 바꾸는 의미 있는 힘으로 등장하였다. 물론 역사를 바꾸는 힘이 되기엔 이 수로도 부족하였다. ‘진실한 사랑을 할 때만 피어나는 사랑의 장미 일백만 송이’가 필요하였다. 이한열의 장례식은 바로 이 일백만 송이 장미의 퍼레이드였다.”

    병실에 찾아갈 때면 황 선배의 침상 곁 벽면에는 심수봉의 노랫말이 적혀 있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심수봉은 독재자 박정희가 아끼던 ‘해어화(解語花)’가 아니었던가! 그런 그녀가 부른 노래가 좋다며 가사를 외우고 영어로 번역도 하고 있는 황 선배를 보니 기가 찼다.

    하지만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내 생각이 좁았음을 알겠다. 황 선배는 ‘백만 송이 장미’라는 심수봉의 노랫말에서 6월의 거리를 달구었던 백만 군중을 떠올리고 있었던 거구나! 심수봉의 노랫말은 자꾸만 이렇게 되뇐다.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 수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꽃은 피고 /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모두가 잠든 밤,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올해도 어김없이 장마가 시작되었다.

    92년 장마 종로에서 정태춘은 노래했다. “흐르는 것이 어디 사람뿐이냐 / 우리들의 한 시대도 거기 묻혀 흘러간다”고. 하지만 사람이 흐르고 시대가 흘러도 정태춘은 대추리를 위해 명동 한 복판에서 노래 부르고 있었다. 시대가 바뀌어 청계천으로 맑은 물이 흘러도 가난한 노점상들은 철거용역반에 쫓겨 난민처럼 동대문운동장에 모여들어야 했다.

    시대가 흘러도

    세상이 바뀌어 ‘브랜드’를 내세운 아파트 광고가 홍수를 이루지만 철거 깡패에 이리저리 쫓겨 다니는 세입자들의 정확한 숫자조차 알지 못한다. 강산이 몇 번 바뀌어도 노동자들의 처지는 여전하다. 아직도 천만 노동자의 절반 이상이 100만 원 미만의 저임금에 혹사당하고 있다. 법으로 보장된 최저임금도 못 받는 노동자가 우리 나라 전체 노동자수의 10%에 육박한다.

       
      ▲ 6. 29에 열리는 황광우 출판 기념회 포스터
     

    책의 말미에서 황 선배는 이렇게 회상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1987년 6월은 우리가 꿈꾸는 혁명의 시절이었다. 우리는 혁명이란 무엇인가를 책에서만 봤지 현실에서 본 적은 없었다. 6월 항쟁이 끝나고 나서야 이런 게 혁명적 상황이구나 하는 생각을 뒤늦게 하게 된 것이다. 그만큼 엄청났고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그런데 『인연』에는 여기에 몇 마디 사족이 더 붙어 있었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감격스러운 상황을 겪게 된다.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당시만큼 감격적인 상황은 없었다.” 왜일까? 왜 이 말이 출간된 책에서는 꼬리를 감추게 된 걸까? 고쳐 생각하니 황 선배에게 그날보다 더 감격적인 날이 있었던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감격의 웃음 뒤로 그림자처럼 이끌리는 부끄러움 때문이었을까?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작가 조세희는 이렇게 회상하였다. “지난날을 이야기하며 나는 아직도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혁명이 필요할 때 우리는 혁명을 겪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자라지 못하고 있다. 제삼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경험한 그대로, 우리 땅에서도 혁명은 구체제의 작은 후퇴, 그리고 조그마한 개선들에 의해 저지되었다. 우리는 그것의 목격자이다.”

    ‘난쏘공’은 지난 30년 동안 200쇄나 거듭 찍혔다. 오늘도 어떤 노동자가 분을 삼키며 이 소설 위로 눈물을 떨구고 있을지 모른다. 아직 채 자라지 못한 난장이 조세희가 2005년 11월 15일 농민대회를 회상하며 남긴 말이다.

    “그날 나온 경찰 부대는 막강한 부대였습니다. 저는 물대포가 그렇게 센지 몰랐습니다. 그때 난 잠깐 후퇴했습니다. 왜? 무서우니까요. 그때 어느 부대가 또 급습했습니다. 농민 하나가 퍽 하고 쓰러졌습니다. 옆에서 신음하는 소리가 계속 들렸습니다. 다른 농민 한 명이 나더러 도망가라고 했습니다. 그때 나의 영혼이 푹 쓰러졌습니다.”

    일어나라 황광우

    이 책을 쓰며 황 선배는 아마 쓰러졌던 자신의 넋들을 주섬주섬 다시 거두었을 것이다. 십수 년을 헤어져 안부조차 알 수 없었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고, 그들과 기억의 편린들을 조각 맞추고, 그 시절의 문건과 신문을 다시 뒤지며, 황 선배는 자신도 몰랐던 ‘또 다른 나’를 알아갔으리라.

    4·12 부평역 앞 고공시위의 공범이었던 박진희가 권인숙과 감방 동기였음을 안 것은 초고인『인연』을 황 선배가 나에게 건네줄 즈음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한 달 남짓 지나 황 선배의 육신이 푹 쓰러졌다. 외줄에 매달려 새벽 공기를 가르던 그 거목이 다시 숨 쉬지 못하였다면 이 책은 그의 유고작이 되었으리라.

    우리가 앞으로 또 황 선배의 글을 만날 수 있을까? 일어서 걷기에도 힘든 황 선배의 건강은 어느 정도나 회복될 수 있을까? 광주항쟁 과정에서 머리에 총을 맞고도 아직 버젓이 살아 있는 김상호 선배는 내게 이 책을 전해주며 출판기념회가 6월 29일에 있다고 하였다. 민중의 힘에 굴복한 항복선언이 있었던 바로 그날로 이 책이 마무리되기에, 기념행사도 그 날 갖기로 한 것이다.

    가슴 속 깊이 박혀 있는 장미 한 송이가 아직 다른 이들의 체취를 그리워한다면 찻값도 받지 않았던 “오늘처럼 좋은 날”, 한 자리에 모여 쓰러져 가는 영혼들을 다시 모두어 보자. 그 영혼들의 향기로 황 선배의 육신을 다시 취하게 해 새벽 공기를 가르는 칼처럼 서슬 퍼런 글들을 써 내게 하자.

    58년 개띠 인생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아직 우리는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음을, 젊음은 그곳이 아닌 바로 여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함을 말하자. 

    ** 윤한봉 선생 장례식 관계로 황광우 출판기념회를 2주 후로 연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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