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술과 노동이 하나인 이상사회 꿈꾸다
        2007년 06월 25일 05:2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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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사회의 본질적 특징은 예술과 생활의 즐거움을 뺏는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런 사회가 없어지면 인간의 타고난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과 그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는 더 이상 없어지지 않을 것이고, 예술은 자유롭게 될 것이다.” – 윌리엄 모리스

    디자이너, 공예가, 시인, 판타지 작가, 책 제작의 장인, 고건축물 보호운동가. 이 모든 분야에서 업적을 남긴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1834~1896)는 당대에는 시인으로 명성을 얻었고, 지금은 ‘현대 디자인의 아버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가 1919년 설립했으며 현대 조형예술 분야에서 큰 획을 그은 바우하우스는 윌리엄 모리스의 ‘미술공예운동’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판타지를 하나의 문학 장르로 자리 잡게 했다는 『반지의 제왕』의 작가 J.R.R 톨킨도 윌리엄 모리스의 로망스(romance) 『세계 저편의 숲 The Wood beyond the World(1894)』, 『세상 끝에 있는 우물 The Well at the Worlds’s End(1896)』등의 영향을 받았다.

       
    ▲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1834~1896)
     
     

    다방면에 재능을 보인 예술가 윌리엄 모리스는 사회주의자였다. “예술의 창조와 그것에 따르는 일의 즐거움은 회화나 조각 등의 예술작품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노동의 일부이고, 또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신념은 40대의 윌리엄 모리스가 사회주의자가 되도록 이끌었다.

    윌리엄 모리스는 1834년 런던 동북부에 있는 왕실 전용 에핑숲으로 둘러싸인 월섬스토에서 부유한 증권 중개업자의 셋째로 태어났다. 에핑숲은 모리스가 평생 자연을 사랑하고 꽃과 나뭇잎을 소재로 벽지 등을 디자인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모리스는 1848면 사립 기숙학교인 말버러 칼리지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중세역사와 고딕 건축에 관한 책을 탐독했다. 1851년 교내 폭동으로 퇴학을 당한 후 옥스퍼드에 입학하기 위해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았다.

    1853년 성직자가 되기 위해 교회의 권위 회복을 위한 운동의 중심지였던 옥스퍼드에 입학했으나 오히려 중세역사와 당시의 사회 문제에 관심을 쏟았다. 모리스는 옥스퍼드에서 평생의 친구가 된 화가 번 존스(Burne Jones, 1833~1898)를 만났고, 그의 사상의 토대가 된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과 칼라일(Thomas Carlyle, 1795~1881)의 저작을 탐독했다.

    특히 사람이 일하면서 경험하는 즐거움이 사회의 기초에 존재함을 주장한 러스킨의 예술론은 모리스의 평생에 영향을 끼쳤다. 러스킨은 중세의 고딕건축을 행복한 노동의 산물로 예찬했으며 빅토리아 시대의 육체노동과 정신노동, 노동자와 지식인 사이의 분리와 차별을 비판했다.

    모리스는 러스킨의 사상을 받아들여 중세에는 개인과 사회 사이에 올바른 상호작용이 존재했고 노동이 분절되지 않아 노동의 즐거움이 있었다고 보았다. 그는 중세에는 일상적인 노동이 일상의 예술 창조로서 즐거움의 표현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고딕문화를 낳은 중세의 자유도시를 유토피아의 모델로 삼았다.

    그가 오랜 시간이 지나 저술한 로망스 『에코토피아 뉴스 News from Nowhere(1890)』는 2150년대의 이상사회를 그리고 있다. 그가 묘사한 사회는 “사람의 능력을 노동에 맞추지 않고, 사람의 노동을 각자의 능력에 맞추는” 사회였다. 공상과학시대가 아닌 14세기 중세를 연상케 하는 그 사회는 대도시의 인구는 분산되고 자연과 공존하는 작은 도시들은 자유로운 노동과 평등한 자치를 실현하고 있다.

    노동 그 자체에 있는 예술적 가치에 주목한 모리스는 빅토리아 시대의 노동자들, 기계에 종속되어 분업화된 비숙련 노동자들이 예술로부터 소외된 것에 분노했다. 그래서 노동에서 즐거움을 얻을 수 없는 자본주의를 극복하고자 했다. 그의 이러한 예술관은 40대 이후 사회주의자로 활동하게 된 사상의 배경이 되었다.

    1855년 여름 옥스퍼드 시절 모리스는 친구들과 함께 프랑스 북부 지방의 중세 고딕 성당들을 방문했으며 파리에서는 자연에서 겸허하게 배우는 예술을 표방한 ‘라파엘 전파’의 로세티(Dante Gabriel Rossetti, 1828~1882)의 작품에 매료되었다. 모리스의 이 여행은 성직자로서의 꿈을 접고 예술가로, 건축가로 살아가고자 결심한 계기가 되었다.

    1856년 초 옥스퍼드를 졸업한 모리스는 고딕부흥주의자로서 당대 저명한 건축가인 스트리트(George Edmund Street, 1824~1881)의 제자가 되었다. 스트리트의 사무실에서 만난 웨브(Philip Speakman Webb, 1831~1915)는 평생의 친구이자 정치적 동지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번 존스의 스승이 된 로세티의 제안으로 9개월 만에 건축가의 길을 끝냈다. 화가의 길을 걷겠다고 다짐한 그는 ‘라파엘 전파’에 가입하기도 했다. 모리스는 1859년까지 회화 공부에 열중했다.

    1857년 여름 모리스는 로세티, 번 존스, 라파엘 전파 화가들과 함께 옥스퍼드대학의 박물관과 학생회관의 천장과 벽에 ‘아서왕의 죽음’을 주제로 프레스코화를 그렸다. 이 벽화는 완성하지 못했지만 모리스는 중세 고딕식 공동제작의 즐거움을 깨달았다. 무엇보다 실내 장식의 실제를 조직적이고도 세부적으로 계획한 최초의 경험이었다.

       
    ▲ 레드하우스
     

    이 경험은 ‘레드하우스’ 건축에서 디자인 회사 설립으로 이어졌다. 1859년 그의 신혼집으로 건축된 ‘레드하우스’의 설계, 건축, 실내장식은 웨브와 모리스가 중심이 되었다. 모리스는 ‘레드하우스’를 채운 가구를 디자인했으며 친구들과 공동 작업으로 완성했다.

    모리스는 “예술이 낳은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름다운 집이라고 답하리라”고 했는데 이는 “건축은 모든 예술의 종합, 즉 서로 돕고 서로 조화되도록 종속하는 여러 예술의 융합”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레드하우스’는 이를 실천한 첫 작품이었다.

    중세 고딕풍의 ‘레드하우스’는 간소함과 소박함, 그 기능성, 이를 추구한 이들의 예술론으로 근대건축의 출발점이 되었다. ‘레드하우스’는 회화나 조각 등의 순수예술이 아니라 생활예술의 중요성을 설파한 ‘미술공예운동’의 요람이 되었다.

    ‘레드하우스’ 건축의 경험을 바탕으로 1861년 모리스, 번 존스, 로세티, 웨브 등이 공동경영자로 ‘모리스․마셜․포크 회사’를 설립했다. 당시 기계로 제작된 조잡한 제품과 예술가들의 비싼 장식예술품을 비판하며 모든 생활용품을 예술가의 손으로 직접 아름답게 만들어 저렴하게 판매하겠다는 취지로 설립했다. 벽화, 벽지, 장식, 스테인글라스, 조각, 자수, 가구 등 모든 영역에서 작품을 만들었다. ‘모리스․마셜․포크 회사’는 1874년 ‘모리스 회사’로 개편되었다.

    모리스의 사업은 번창해서 1877년 런던에서 가장 번화한 옥스퍼드가에 상점을 낼 정도였다. 1881년에는 런던 교외에 2만 8천㎡(약 8,500평) 규모의 공장을 새로 지었으며 3년 후에는 100여명의 노동자를 고용했다. 그러나 모리스 회사의 노동자들은 그의 감독 하에서 기계적인 노동에 시달렸으며 그들이 만든 제품들은 높은 가격에 팔렸다.

    노동의 즐거움의 표현으로서의 예술, 공동 작업의 가치, 소외되지 않는 노동, 이 모든 것을 추구하고자 설립했던 모리스의 회사도 여느 기업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시대의 기업일 뿐이었다.

    모리스의 가정사는 행복하지 않았다. 1857년 가을 모리스는 로세티의 모델이자 마부의 딸인 제인 버든(Jane Burden, 1839~1914)을 만났고 1859년에 결혼을 했다. 그들은 제인과 메이 두 딸을 낳기도 했지만 제인 버든은 로세티를 사랑했다. 부유한 모리스를 배우자로 선택한 것뿐이었다.

    버든은 로세티와 내연의 관계를 지속했다. 버든을 저버릴 수 없었던 모리스는 1872년부터 버든과 로세티와 셋이서 동거를 하기도 했다. 1874년 ‘모리스 회사’ 개편 당시 이 회사의 공동경영자 중 하나였던 로세티와 결별했으며 평생 그를 증오하며 살았다.

    윌리엄 모리스는 40대가 되어서야 현실 정치와 사회 활동에 발을 들여 놓았다. 1876년 터키가 불가리아 크리스트교도를 학살했음에도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 영국의 보수당 정부는 터키를 지원했다. 이에 분노한 모리스는 ‘동구문제협회’에 가담했고 자유당원이 되었다.

    1877년에는 고딕부흥주의자들이 양식의 통일을 위해 대성당 등을 훼손하고 획일적으로 복구하려는 움직임을 막고자 모리스는 ‘고건출물 보호협회’ 결성을 주도했다. 이 활동은 이탈리아로도 확대되어 그는 산마르코 선당 보수공사 반대운동 등에도 참여했다. 문화유산을 보호한다는 미명아래 그 유산의 역사성을 무시하는 현대의 상업적 복원을 1세기도 전부터 경고를 한 선구적 활동이었다.

    ‘동구문제협회’는 분열했고 자유당은 아일랜드를 탄압하는 데에 찬성했으며 자유당을 들락거리는 노조지도자들은 투표권에만 관심을 기울이자 모리스는 이들 모두를 불신하게 되었다. 모리스는 1883년 진보적인 정치단체인 ‘민주연맹’에 가입했다. ‘민주연맹’은 보통선거권 실현, 은행․철도․토지의 국유화, 1일 8시간 노동시간제 확립 등을 주장했다.

    모리스는 ‘민주연맹’에서 영국의 사회주의 운동을 형성한 하인드먼, 백스, 마르크스의 막내 딸 엘리노어와 그이 남편인 에이블링과 함께 활동을 했다. ‘민주연맹’은 ‘사회민주연맹’으로 개칭하면서 사회주의 노선을 분명히 했다.

    ‘민주연맹’이 세를 확장하자 하인드먼은 의회 정당으로 전화하려고 했다. 이에 반발한 모리스는 1884년 말 엘리노어와 에이블링 등과 함께 연맹을 탈퇴하고 ‘사회주의동맹’을 결성했다. 이 단체는 국가사회주의를 거부하고 혁명적 사회주의를 지향했다. 모리스는 ‘사회주의동맹’의 기관지 『커먼월(Commonweal)』을 편집했으며 그가 사는 곳인 해머스미스의 지부를 지도했다. 1889년 모리스는 『커먼월』에 「에코토피아 뉴스」를 연재했으며 이듬해 단행본으로 출간하였다.

    1886년과 1887년 두 해에는 실업자들의 시위와 조직노동자들의 파업이 잇따랐다. 1887년 11월에는 런던의 트라팔가 광장에 모인 노동자들이 시위를 군경이 폭력으로 진압해 2명이 사망한 ‘피의 일요일’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싸움에도 불구하고 큰 성과를 얻지 못한 사회주의자들에게 회의를 안겼으며 그 후에 엘리노어 등 다수가 ‘블룸즈버리 사회주의자 연맹’을 결성해 ‘페이비언협회’나 ‘사회민주연맹’과 연대하는 의회주의 전술로 돌아섰다.

    의회주의를 거부한 모리스는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사회주의동맹’에 잔류했으나 1890년 아나키스트들과도 결별했다. 동맹의 해머스미스지부를 ‘해머스미스 사회주의협회’로 전환하고 죽을 때까지 이 단체를 발판으로 사회주의 활동을 펼쳤다. 모리스는 1893년에는 사회주의동맹, 사회민주동맹, 페이비언협회 등을 통합하기 위한 노력도 펼쳤으나 성과는 없었다.

    모리스는 1877년부터 죽을 때까지 20년 간 사회주의, 예술, 건축, 디자인 등 다양한 주제로 600회 이상의 강연을 했다. 이는 그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활동이었다.

       
    ▲ 윌리엄 모리스가 디자인한 초서의〈캔터베리 이야기>
     

    당대에는 시인으로 인정받던 윌리엄 모리스는 1858년 첫 시집 『귀네비어의 항변』을 발행했지만 비평가들로부터 혹평을 받았다. 1865년부터 집필하기 시작해서 1868년부터 1870년에 발간된 『지상낙원』시리즈로 유명한 시인이 되었다. 모리스는 1877년 옥스퍼드대학으로부터 시학교수로 초빙되었고 1892년에는 영국 계관시인으로 추대되었지만 모두 거절했다. 실천하는 예술가이길 원했기 때문이다.

    모리스는 말년에는 ‘켈름스코트 출판사’를 설립(1891)해서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책을 만드는 일에 혼신을 쏟았다. 책 표지의 장정에서 활자 디자인, 레이아웃까지 치밀한 작업은 마치 건축과 다름없었다. 1896년 만들어진 『초서 작품집』은 세계 3대 아름다운 인쇄본 중 하나로 찬양받고 있다.

    모리스는 1896년 10월 62세 나이로 해머스미스의 자택에서 운명하였다. 묘비의 디자인은 ‘레드하우스’를 설계했던 웨브가 담당했다. 죽음을 지켜본 의사는 그가 죽은 원인을 윌리엄 모리스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평생 열 사람 몫”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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