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주의는 민주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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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6월 18일 11:4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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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레디앙에 연재 중이며, 곧 책으로 나올 <세계의 사회주의자>(가제)에 실릴 글입니다. <편집자주>

    “모두는 하나를 위해, 하나는 모두를 위해!” 이것은 과거 사회주의 국가의 정치 선전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구호다. 원래는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삼총사>에서 주인공 달타냥과 삼총사가 외치던 것인데, 언제부터인가 ‘사회주의’를 상징하는 문구처럼 되어버렸다.

    여기서 문제는 ‘하나’란 단어다. 도대체 ‘하나’가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소련이나 북한에서 이 구호를 외칠 때 ‘하나’란 예외 없이 어떤 집단을 의미했다. 국가나 당 혹은 그 모두의 정점인 지도자 동지… 따라서 “모두는 하나를 위해”는 모든 인민이 국가나 당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말이었고, “하나는 모두를 위해”는 그러면 그 보상으로 집단이 인민을 보살펴준다는 이야기였다.

    이 구호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장면은 집단체조다. 수천의 군중이 모두 말 그대로 하나가 되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매스게임의 장관. 거기서 개인은 집단이라는 거대한 기계를 위해 복무하는 톱니바퀴들로만 보인다. 오랫동안 이것이 우리가 ‘사회주의’란 말에서 떠올리는 주된 이미지였고, 그래서 사회주의는 또 ‘집단주의’, ‘전체주의’와 동의어이기도 했다.

    만약 이런 게 ‘사회주의’란 말에 새겨진 유일한 기억이라면, 필자 자신부터 이것을 정치적 신념으로 고수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류의 기억 속에는 이것과는 상당히 다른 이야기들도 존재한다.

    자본주의가 등장하고 나서 오랫동안 사회주의는 노동자를 기계의 부속품으로 만드는 공장 안의 전체주의에 맞선 저항과 자유의 표어였다. 지난 세기에 모든 전체주의의 어버이 격인 제국주의에 맞서서 식민지와 약소국의 민중들이 떨쳐 일어날 때에도 그들은 이 깃발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운동의 다양한 구성원들 사이에서도 다시 이 말이 심심찮게 들려온다. ‘신자유주의 반대’, ‘세계화 반대’ 등 다분히 수동적인 구호 대신 이러 저런 운동들의 공통의 이상을 압축하는 푯말로 ‘사회주의’를 되살리자는 것이다.

    심지어는 그들 스스로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한 쪽 발을 담그고 있는 사회민주주의 정치인들 사이에서도 그렇다. 그들은 선거 때만 되면 먼지투성이 책장 한 구석에서 이 오래된 단어를 끄집어내 자신들이 여전히 근로 대중의 편임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써먹곤 한다.

    그래서 우리는 21세기, 이 새로운 백 년이 시작된 뒤에도 여전히 이러한 물음들을 손에서 놓을 수 없다 ― 도대체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그 수많은 얼굴들 중에서 단순히 집단주의나 전체주의로 손가락질할 수 없는 또 다른 얼굴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지금 여기 우리의 삶에 어떠한 메시지로 다가오는가?

    ‘평등’을, ‘평등한 자유’를!

    이야기는 프랑스 대혁명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사건이야말로 근대의 모든 정치 이념들이 등장한 산실(産室)이자 서로 다른 여정을 시작한 갈림길이었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 혁명의 이상은 ‘민주주의’였으며, 그 구호는 “자유, 평등, 우애”였다. 이것을 부르짖으며 부르주아지의 대표자들이 국왕과 귀족, 교회에 맞섰고 거리의 민중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다.

       
      ▲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들라크루아 작.
     

    한데, 막상 혁명이 성공하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세 개의 약속 사이에는 확실한 경중의 차이가 있었다. 부르주아지의 관심을 온통 독차지한 것은 ‘자유’였다. 절대 군주와 봉건 귀족의 훼방을 받지 않으며 장사하고 치부(致富)할 수 있는 자유, 즉 경제 활동의 자유가 혁명의 가장 귀중한 전리품이었다.

    이렇게 자유를 높이 떠받드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우리는 ‘자유주의자’라 부른다. 대혁명 당시의 부르주아지든 지금의 신자유주의자들이든 모두 이 자유주의의 대가족에 속한다. 이 동질감 앞에서는 그들 사이의 200년 넘는 세월의 차이도 무색하다.

    그러나 혁명의 또 다른 주역들은 이 전리품 분배에 커다란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바스티유 습격을 비롯해서 혁명의 가장 위험한 순간마다 맨 앞에 나섰던 도시의 민중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에게는 부르주아지의 ‘자유’가 새로운 ‘부자유’의 다른 이름에 불과했다.

    그 대표적인 본보기가 혁명 이후 첫 의회가 통과시킨 법안들 중 하나인 르 샤플리에 법(부르주아 출신 르 샤플리에 의원이 법안을 제출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이었다. 이 법은 생산 현장에서 그 누구도 단체를 결성하여 활동해선 안 된다고 규정했다. 한 마디로 노동자들이 조합을 만드는 것을 금지한 것이다. 경제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오직 개인 자격으로 서로 계약을 맺어야 한다는 게 그 명분이었다.

    경제 활동의 자유를 위해서 라지만, 결국은 작업장에서 자본가들의 독재권을 확립하려는 것이었다. 노동자들이 서로 힘을 모으지 못하고 모래알처럼 흩어질 수밖에 없다면 칼자루는 항상 자본가들이 쥐게 마련이다. 이렇게 새로운 특권계급, 즉 자본가들의 ‘자유’는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들과 함께 구체제에 맞서 싸웠던 과거의 동지, 노동자들에게는 새로운 ‘부자유’에 다름 아니었다.

    그래서 도시의 민중들은 “자유, 평등, 우애”의 구호 중에서 ‘평등’ 쪽을 새로이 강조하기 시작했다. 평등은 이제 국왕, 귀족과 나머지 국민들(대혁명 당시에는 ‘제3신분’이라 불렸다)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나머지 국민들 내에서도 부르주아지와 근로 대중 사이에서 다시 확인되어야 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자유’에 맞서는 식으로 ‘평등’을 주장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들이 원한 것은 다만 ‘민주주의’라는 애초의 이상을 견지하자는 것이었다. “자유, 평등, 우애”의 원칙들이 온전히 함께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

    즉, 민중들이 외친 ‘평등’은 ‘자유’에 맞선 또 다른 가치가 아니라 차라리 ‘평등한 자유’의 요구였다. 부르주아지만의 자유가 아니라 모든 민중의 자유를 요구했던 것이다. 더 나아가 부르주아지의 자유, 즉 경제 활동의 자유를 위해 대다수 다른 시민의 자유가 억압되는 현실을 반대한 것이다. 민중은 단순한 ‘<반>자유주의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스스로 ‘자유’의 주인이 되길 바랐을 뿐이다.

    민주주의는 사회주의를 요청한다

    한 동안 대립 구도는 <자유주의 대 민주주의>로 나타났다. 민주주의의 온전한 실현을 위해서는 자유주의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것이 점점 더 분명해졌다. 그러자 민주주의가 자유주의를 넘어서는 그 지점, 즉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의 모순의 임계점을 보다 선명하게 드러낼 필요가 생겼다.

    그 임계점은 무엇인가? 만인이 누구나 동등한 권리를 지닌 동료 시민이라는 생각이 경제 활동의 영역에까지는 손길을 미치지 않는 것, 이것이 자유주의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민주주의의 최대 허용치였다. 만약 이 경계선을 넘어선다면, 자유주의의 지지자들, 그러니까 자본가들은 어떠한 낡고 치사한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민주주의의 확장을 가로막을 태세가 되어 있었다.

    ‘사회주의’는 바로 이러한 진실에 대한 자각을 표현하고자 등장한 말이다. 그 진실을 보다 상세히 묘사해보면, 이렇다. 봉건 귀족이 사라진 곳에 새로운 특권 계급이 생겨난다. 시장 경쟁과 자본 축적의 자유를 발판 삼아 자본가 집단이 하나의 계급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 소유의 작업장에 동료 시민들을 노동자로 고용한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생산된 부를 다시 자신들 소유의 자본으로 쌓아간다. 자본가들의 엄청난 재력은 이제 공장 담벼락을 넘어 사회 전체에 대한 지배력으로 확대된다. 모든 시민은 ‘1등 시민’과 ‘2등 시민’으로 나뉜다.

    이러한 사회적 현실을 바꿔야 한다. 그래야 민주주의가 승리를 거둘 수 있다. 이게 급진적 민주주의자들의 생각이었다. 즉, 대다수 시민들이 생계 때문에 생산 현장에서 다른 소수의 시민들에게 종속되는 일 따위는 없어져야 한다. 모두가 생산에 참여해서 거둔 결실들이 소수의 손아귀에 장악돼서도 안 된다. 즉, 경제 활동에까지 ‘1인 1표’의 원칙이 적용돼야 한다. 경제 영역이 민주주의의 예외 지대가 될 수는 없다.

    ‘1주 1표’의 원칙에 따라 주주들이 전제 군주 노릇을 하던 기업에서도 이제는 ‘1인 1표’의 원칙이 실현되어야 한다. 근로 대중이 기업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운영해야 한다(사회적 소유, 경영).

    또한 ‘1원 1표’의 원칙이 지배하는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 안에 점차 ‘1인 1표’의 영역을 넓혀야 한다. 다르게 말하면, 시민 누구나 구매력에 상관없이 기본적인 권리들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보편적 복지).

    이게 사회주의의 맨 얼굴이다. 본래 사회주의는 이런 걸 현실로 만들자는 사상이자 운동이었다. 그것은 자유주의의 임계치를 넘어서는 급진적 민주주의였고, 바로 그러한 취지에서 자유주의의 현실 조건인 ‘자본’주의, 즉 자본이 주도하는 세상을 ‘사회’주의, 즉 다수 인민이 주도하는 세상으로 바꾸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자유주의’를 극복한다고 해서 이것이 곧 ‘자유’와는 아무 인연도 없다는 걸 뜻하지는 않는다. 결코 그렇지 않다. 위에서 지적한 대로 애초에 민중들이 부르짖은 ‘평등’ 자체가 ‘평등한 자유’였을 뿐더러, 사회적 소유나 보편적 복지 역시 ‘자유’의 꿈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프로그램은 모든 인간이 비로소 생존 경쟁의 강한 속박으로부터 ‘자유’롭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다. 어쩌면 이 빈곤과 소외, 고된 노동으로부터의 자유야말로 ‘자유’의 기다란 목록 중에서도 맨 첫 항이 아닐까.

    우리가 보편적 인류의 일원이 되는 때

    지난 두 세기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이 희망의 대열에 동참했다. 신심 깊은 복음 설교가, 천재적인 예술가, 현대 과학의 대명사라 할 위대한 물리학자… 이런 사람들이 스스로 ‘사회주의자’의 명부에 제 이름을 기입해 넣었다.

    더 중요한 것은 수백만, 수천만의 평범한 대중이 기꺼이 이 행진에 합류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천신만고 끝에 보통선거권을 쟁취했고, 피와 땀과 눈물의 격랑으로 제국주의와 파시즘을 쓸어냈으며, 복지국가와 그 밖의 중요한 성과들을 지난 세기의 진보의 대차대조표에 기재했다. 이 모두가 그들의 투쟁의 열매였다.

    하지만, 이러한 실질적 성과도 성과지만, 그보다 더 주목해야 할 게 있다. 사회주의의 이상과 그 운동이 사람들에게, ‘인류’를 떠올리고 자신을 그 일원으로 실감하는 순간들을 제공했다는 사실. 지상의 가장 저주받고 버림받은 자들이 ‘프롤레타리아’ 혹은 ‘제3세계 인민’의 일원임을 느끼던 순간, 하늘의 별만큼의 새로운 희망과 자긍심, 연대의식들이 이 혹성 위를 꽃피웠다.

    그 전에는 오직 위대한 종교 운동들만이 이런 기회를 제공했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붓다가 될 가능성을 지녔다는 가르침이나 유대인뿐만 아니라 어떠한 이방인도 그리스도의 희생을 믿음으로써 구원받는다는 메시지가 그러했다. 사막의 여러 부족들을 보편적인 믿음의 공동체로 결합시켰던 사례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두 세기에는 사회주의가 그 비슷한 역할을 했다. 따라서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사이비 세계화가 한편으로는 시장을 통한 인류의 통합을 떠들어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절대 다수의 민중들을 무대에서 밀어내는 지금만큼 사회주의의 바로 이러한 기억이 절실하게 다시 다가오는 때도 없을 것이다.

    ‘사회주의’란 말을 그대로 이어받든 아니면 새로운 카피를 뽑아내든 결국 우리를 보편적 인류의 일원으로 단결시킬 ‘사회주의적’(어쨌든 사회주의적인) 운동, 그것이 지금 간절하고도 시급히 필요하다.

    ‘하나’는 바로 나와 너, 우리다

    하지만 그 전에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모두는 하나를 위해, 하나는 모두를 위해!”의 그 ‘하나’란 무엇이냐는 처음의 물음 말이다.

    그 힌트는 사회주의 운동의 위대한 고전들 중 하나인 <공산주의당 선언>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선언>의 이 해당 문구는 항상 그 엄청난 중요성만큼 제대로 평가를 받았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바로 “계급과 계급대립으로 얼룩진 낡은 부르주아 사회 대신에,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가 나타날 것”이라는 문구다. 조금 더 생생하게 풀어놓으면, 이쯤 될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을 통해서 모든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을 이루는 공동체”.

    여기서 ‘하나’란 국가도 아니고 당도 아니다. 도무지 어떤 집단이 아니다. ‘하나’는 다름 아니라 나와 너, 우리들이다. 지금 이 혹성 위에서 밥 먹고 숨 쉬며 서로 사랑하거나 미워하며 살아가는 그 하나하나의 사람들.

    이 문구에서 ‘하나’와 ‘모두’의 관계는, 단 한 명이라도 함께 누리지 못하는 자유라면 그것은 결코 모두의 자유가 아니라는 상식과 정서로 충만한 어떤 공동체를 가리킨다. 여기에서는 “자유, 평등, 우애” 중의 그 어느 하나도 다른 원칙과 분리 혹은 대립되어 존재할 수 없다.

    이제 이 점을 분명히 전제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니, 말해야 한다. 사회주의,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시대의 자유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그 진정한 이름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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