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의 정치학, 위장취업자들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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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6월 16일 08:2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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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주, 노마드, 유목과 정주…. 인문학에 관심 있는 독자들이라면 이런 류의 단어들이 낯설지 않으리라. 들뢰즈와 이진경…. 이들 이름 역시 마찬가지다.

    ‘정주하지 않는 지식인의 삶과 자유’라는 부제가 달린 『다른 곳을 사유하자』 역시 그 낯익은 풍경 속에 한자리를 스스럼없이 차지해 마땅한 책이다. 그러나 조금은 다르다. 광고 카피를 흉내내 말해본다면 ‘20세기 지성사를 독특한 관점에서 서술한 진짜 에세이’ 정도가 될듯 싶다.

       
    ▲『다른 곳을 사유하자』 니콜 라피에르, 푸른숲
     

    『다른 곳을 사유하자』에는 거의 250여명에 달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저자의 인물 퍼레이드는 몽테뉴에서 시작해 자신의 아버지-저자는 자신의 아버지의 이름을 밝히지는 않고 그저 ‘아버지’라고 무인칭으로 말한다-에 이르러 끝이 난다. 그 인물들의 이름을 구태여 나열할 필요는 없으리라.

    이 인물들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사유를 ‘연구실’에서 만들어내지 않았다는 데 있다. 곧 관념의 탈주가 아닌, 자의든 타의든, 실제의 탈주를 감행해야만 했던 사람들을 말한다. 가령 나치의 박해를 피해 국경을 넘었던 지식인들, 유대인들, 이주민 등을 생각해보면 그 실상이 비교적 분명하게 떠오를 것이다. 다른 말로 한다면 ‘몸의 이동을 통해 사유의 이동을 실천했던 사람들’이다.

    “결국 비판적 지식인이란 ‘이동한 사람’이다. 실제적인 의미로는 자신의 배경이나 다소간 고통스러운 역사적 우연 때문에 본디 자리에서 떠나야 했던 사람. 하지만 비유적인 의미에서는 인식론적 필연성 때문에 극적으로 자신의 자리를 떠나야 했던 사람이다.”(p.26~27)

    그렇다면 왜 ‘이동’이 문제시되는 것일까? 사실상 정답이라고 여겨지는 저자의 말을 길지만 인용한다.

    “자기 자리를 지키려는 논리에 맞서, 사회적 장벽을 뛰어넘고 경계를 넘어선 사람들의 통제되지 않는 움직임에는 전복적인 요소가 담겨 있다. 그러한 움직임이 이미 정립된 입장의 허영과 그들에게 있을 수 있는 약점을 폭로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러한 움직임은 어떤 아찔한 장소, 비어 있는 공간, 이미 지나간 것과 아직 오지 않은 것 사이의 틈새에 대한 관심을 부추기고, 비결정성과 변이의 지대 혹은 표지판을 아직 세우지 않은, 모호한 정체성들의 모험 지대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킨다.”(p.17~18)

    『다른 곳을 사유하자』는 이런 류의 책들의 가장 흔한 단점으로 지적되는 현란하고도 과시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지 않다.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던 인물들간의 이른바 가상 대담 같은 소설적 재미도 곁들이고 있으며 저자 개인의 에피소드들도 가미돼 쉽게 잘 읽히기도 한다.

    지식의 단순한 나열이나 짜깁기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무거운 책임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여유만 갖고 읽는다면 쏠쏠한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책이다. 흥미를 보태고자 두 개의 예를 들고자 한다.

    저자가 말하는 ‘이동’에는 ‘위장취업’도 포함된다. "말에서 내려와 꽃을 바라보”(p.132)고자 했던 사람들, "민중을 향한 십자군 운동“(p.133), "교수가 될 수도 있었지만 선동가가 되기를 꿈꾸었던 젊은”(p.142) 사람들의 이야기. 저자는 시몬 베유와 더불어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인 몇 사례를 거론한다. 그에 대한 저자의 말.

    “이처럼 대담하고 위험천만한 변신을 통해 타자의 삶을 산다 해도 이것은 제한된 시간에 이루어진 한정된 경험에 불구하다. 비록 예전으로 돌아오는 것이 쉽지 않더라도, 예전과 같은 사람으로 돌아올 수 없더라도, 언젠가 돌아와 이야기를 하는 입장이 될 것이라는 사실은 처음부터 예견된 일이다.”(p.146)

    “결국 위장 취업자들의 경험은 우회의 경로를 거쳐 책으로 회귀하면서 비로소 그 흔적과 교훈을 남겼다. 그중 한 권이 말하듯 그 책들은 해체되기를 원했다. ‘책으로 끝장을 보아야 한다면 진심으로 그렇게 하자. 우리는 바로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가 ‘대장정’이라고 외쳤던 것을 오늘날 나는 ‘지식인들의 출애굽’이라고 부르고 싶다.’”(p.148)

       
     ▲ 국경을 넘다가 죽은 ‘이동’의 대표적 지식인 벤야민
     

    ‘이동’이라는 저자의 관점에서는 ‘위장취업’은 말 그대로 ‘위장’ 취업이다. ‘위장’ 취업은 계급의 이동임에는 분명하지만 계급이 고정되는 게 아니라 자신의 계급을 바꿔봄으로써 자신의 정체성과 사회의 본질을 다르게 보는 일시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의 위장취업은 다시금 돌아와야만 하는 ‘위장’ 취업인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지나치게 ‘문자위주의 관념’을 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령 이제 우리가 곧 치를 대통령 선거와 관련해 후보로 나서겠다는 사람들 중 1987년 6월 위장취업자와 2007년 그들의 현재를 놓고 말한다면, 저자는 2007년 자신의 계급으로 돌아온 자들의 ‘책’을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곧 그들에게서 그 어떤 진실이 발견되리라고 여기는 것은 아닐까?

    왜 그런 생각이 드는가 하면, 한 번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게 아닌, 한 번 가서 더 깊이 간 사람들도 있지만 한 번 갔다가 돌아왔지만 한 번 갔던 게 오히려 치명적인 독이 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동’의 결과인 자신들의 ‘책’은 자신들이 왜 ‘이동’했었는지 그 이유조차 망각한 ‘책’일 뿐이다.

    “비겁한 변명”이자 “배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변명과 배신은 우리와 사회의 진실을 호도할 뿐이다. 단순한 사실이겠지만 모든 ‘이동’이 모두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다.

    책의 이동은 어떨까? 책의 말미에는 책의 이동, 곧 번역에 관한 이야기도 등장한다.

    “이동에 대한 찬사에서 번역에 대한 찬사까지, 그 움직임은 연속적이다. 다른 곳을 사유하기, 그것은 곧 ‘이방인이자 번역가’로서 존재하면서 그 역할을 감당하고 텍스트와 문화 사이에서, 학문 분과와 지식 사이에서 아이작 조지프가 “간극의 언어”라고 불렀던 바로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 언어는 사유를 이주시켜 억양을 간직한 채 번역하고, 어조를 실어 글로 표현하되 결코 완전히 정착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p.312~313)

    그러나 나로서 정작 흥미로운 것은 다른 데 있다. 원서의 편집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번역본에는 오른쪽 홀수 페이지에 글에 해당되는 인물들의 사진을 싣고 있는데, 마음 내키는 대로 찾아 읽기 쉬워 훌륭한 색인 노릇을 하리라 여겨진다. 아마도 번역본을 낸 출판사의 아이디어인듯 싶다. 번역하고 편집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곧 책의 이동이 낳은 결과인 셈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로서는 우리 독서시장에서 인문학 관련 책들이 너무 과장되게 편집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팔리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말과 아무리 색칠해도 호박이 수박되지 않는다는 말 사이에서 끊임없이 ‘요동’치지만 굳이 선택하자면 ‘호박은 호박답게 수박은 수박답게’라는 쪽에 나는 기댄다.

    시장이 명령하는 중심 혹은 흐름과는 다르게 거슬러 ‘이동’하고 싶다는 알량한 자만심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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