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 그녀들처럼 살고 싶지 않다”
        2007년 06월 16일 08:0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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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인 줄 알았어요.”

    살면서 가장 많이 들어본 첫 인사이다. 간혹 어떤 분들은 "왜 남자가 아니냐?"고 황당해하다가 여자인 걸 안 뒤로 언행이 돌변하기도 한다.

    지면의 기사, 혹은 온라인 공간에서의 채팅이나 글로 만나다 오프라인에서 나를 처음 만날 때 대개의 사람들이 꼭 하는 첫 인사말이다. 왜 그러한 ‘오해’를 하는 줄은 모르겠으나, 문체에서 은연중 배어나오는 화법의 남성성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오랫동안 남성 전용 미용실 블루 클럽 특별회원이었던 나는 소위 ‘명예남성’과 였다.(공적인 모습에 한해) 블루클럽을 다녔던 건 ‘저렴하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생활비를 직접 벌어야 했던 내게 일반 미용실은 머나 먼 나라의 사치였다.

    ‘생활’과 ‘사치’. 이 두 단어는 내가 ‘명예남성’의 삶을 ‘공적으로’ 선택하게 만든 ‘열쇠말’이다. 난 비겁했다. ‘남성성’은 내가 생활 전선에서 살아남는 데 ‘유용한’ 도구가 돼 주었다. 남성들이 주류였던 체계 속에서 그들에게 빨리 인정받고 덜 상처받으며 편하게 살 수 있는 효율적인 방패막이었다.

    생활전선이 총성 없는 전쟁이라는 걸 온 몸으로 배워야 했던 내게 ‘여성주의’에 대한 인식은 ‘일반 미용실’처럼 사치였다. 그러한 선택의 기저에는 여중과 여고를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여성성’ 에 대해 긍정적으로 교육받지 못한 문화적 배경도 한몫한다.

    학창 시절 제도권 교육은 내게 ‘여성성’이란 그저 시집을 잘 가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고 주입시켰다. 그렇게 ‘머리’ 속에 부정적으로 박힌 여성성은 ‘몸’에 가해지는 고통으로 인해 더욱더 나와 화해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되었다.

    여성성에 대한 ‘몸’의 자각은 ‘생리통’으로 처음 시작되었다. 난 생리를 시작한 후 십여 년간 한 달의 반은 지킬박사와 하이드의 경계를 광폭으로 넘나들며 산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찾아오는 허리 통증은 수시로 다리를 잘라버리고 싶다는 난폭한 충동에 휩싸이게 만들며, 대책 없는 현기증이 엄습할 때는 잇몸에서 피가 새어나도록 이를 악물어야 한다.

    또 여성으로서 가슴이 나오는 것이 자연스런 성장 과정의 일부임에도 불구하고 난 그 소중함을 알기도 전에 가부장적인 가정과 학교에서 ‘수치스럽고’, ‘감춰야 하는’, ‘부정적인’ 그 무엇으로 배워야했다.

    아주 오래 전 막연히 ‘주류’에 끼고 싶었던 시절. ‘여성성’은 내게 거추장스럽고 도무지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성가신 그 무엇이었다. 비겁하고 소심했던 난 주류가 만들어 놓은 그런 인식에 정면으로 맞서는 대신 그들의 ‘남성성’을 훔쳐오기로 했다. 본능적으로 마이너리티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값진 감수성이 내 몸에 자연스럽게 체화된 것도 모른 채.

    그렇게 사는 동안 내 것이 아닌 ‘남성성’과 체화된 ‘여성성’이 충돌을 일으킬 때면 난 여성성을 억제하며 남성의 그것을 닮기 위해 스스로에게 더욱 채찍질을 가했다. 억압의 연속이었던 삶은 당연히 행복하지 않았고 내 것이 아닌 남성성을 움켜쥐기 위해 바둥거리는 스스로에게 지쳐갔다.

    그래서 지혜를 구하고자 서성거린 곳이 진보라고 불리는 동네였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만큼은 다른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내게 돌아온 건 실망과 상처였다.

    인민의 해방과 평등을 논하면서 조직의 친목과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성매매 업소로 향하고, 운동 조직 내 남녀 역할이 가부장적 가정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하며, 조직의 효율과 단합을 위해 개인의 다양성을 묵살해버리는 전체주의적 문화를 접하면서 적잖은 상처를 받았다. 정작 내가 그럴 자격도 없는 비겁한 사람임을 잊은 채.

    가장 화가 났던 건 그 속에서 내 자화상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조직 문화에 침묵으로써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언니들이 미웠지만, 그녀들의 모습은 끊임없이 스스로의 여성성을 억압했던 나와 일치했다. 진보라는 동네 안에서도 여성들은 동네 바깥의 고초를 똑같이 겪으며 감내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민주노동당 심상정 대선예비후보 주최로 지난 11일 창당 이래 처음 ‘민주노동당의 여성주의를 말한다’라는 토론회가 10명 남짓한 작은 규모의 인원이 모인 가운데 개최됐다.

    집권을 바라보는 진보 정당으로써 여심에 대해 얼마나 고민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고, 또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성찰하고자 찾아갔던 토론회였건만 ‘여전히’ 언니들의 삶은 팍팍했다.

       
      ▲ 지난 11일 창당 이래 처음 개최된 ‘민주노동당의 여성주의를 말한다’라는 토론회 (사진=레디앙 김은성 기자)
     

    진보 정당에서 이제서야 여성주의에 대한 토론회가 ‘최초’로 열렸다는데 놀랐으며, 토론회에 대한 당내 무관심에 씁쓸했고, 진보 진영에 깊숙이 몸담고 있는 그녀들의 삶조차도 진보와 무관한 보통 여성의 그것과 똑같아 ‘행복하지 않다는 것’에 암담했다.

    그녀들은 ‘슈퍼우먼’이었다. 무슨 부귀영화를 거머쥐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대단한 사회적 성공과 명예를 성취하고자 하는 것도 아닌데. 직장인이자, 엄마이자, 아내이자, 며느리이자, 딸로서 ‘전쟁’ 같은 삶을 치르는 그네들을 엿보면서 ‘이념의 진보, 생활의 보수’라는 말의 적나라함에 당황스러웠다

    더 솔직히 말하면, 난 그렇게 살 자신도 없을뿐더러 또 ‘무슨 별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닌 주제에’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또 정작 자신은 행복하지 않으면서 타인과 행복을 나누기 위해 진보 정당에서 일하는 그들의 모습에 ‘모순’을 느끼기도 했다.

    더 안타까운 건 이런 그녀들의 속내가 여성 당원들에게조차도 지금껏 단 한번도 공식적으로 공유된 적 없이 그저 ‘개인’들의 속앓이로만 그치고 있다는 점이다.

    진보 정당에서도 가부장적인 남성 중심의 조직 문화에 결박당한 채 스스로를 억압하며 ‘슈퍼우먼 콤플렉스’에 제각기 고군분투하는 그녀들의 모습이 나같이 당원이 아닌 평범한 후배들에게 얼마나 공포스럽게 다가오는지 과연 민주노동당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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