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비의 구닥다리 역사관을 비판한다
        2007년 06월 11일 07:0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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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1일자로 발간된 <창작과 비평> 여름호는 ‘책머리에’ 「6월항쟁 20주년, 진보개혁세력의 재결집을 위하여」에서 분단과 현실 정치에 대한 독특한 주장을 편다.

    <창비>의 독특한 주장

    “우리 현실에서 그간 중도적 지향의 광범한 진보개혁세력이 독자적인 급진세력보다 정치적 다수의 우위를 점한 것은 단지 후진성의 징표가 아니라 그럴만한 한반도 분단체제라는 여건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말하자면, 주어진 한반도 현실의 조건이 평화-개혁-진보세력의 광범위한 연대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분단 때문에 독재해야 한다는 둥의 이야기를 듣던 박정희 시절이 기억나기도 하거니와, 독일 같은 분단 국가에서 ‘독자적인 급진세력’이 집권하곤 하던 것만 보더라도 이론으로 성립될 수 없는 특수성의 일반화일 뿐이다.

    <창작과 비평>의 주요 필진들이 근래 내놓는 주장은 분단에 대한 과학적 분석으로부터 국내 정치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분단을 끌어다 쓴다는 점에서 또 다른 ‘분단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다. ‘중도적 지향’의 집권세력 주변에 포진하고 있는 이 인문주의자들은 ‘현실’과 ‘이성’을 동일시한 헤겔의 처세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같은 책에 실린 「87년체제의 궤적과 진보논쟁」에서 한신대 사회학과 김종엽 교수는 ‘책머리에’의 논지를 더 자세하게 펼친다. 이 글에서 그는 <레디앙>을 비롯한 몇 매체에서 전개됐던 ‘진보논쟁’을 되짚으며 최장집과 손호철의 주장을 비판한다.

    집권세력 주변에 포진해 있는 인문주의자들

    “97년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87년의 중요성을 평가절하하고, 87년에 대한 강조가 곧장 민주 대 반민주 전선의 강화 그리고 비판적 지지론의 ‘악몽’을 불러들일 것이라고 우려하는 손호철의 생각은 지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정치적 전략의 차원에서 문제가 있다.

    최장집과 손호철이 그들의 논의에서 정치적 다수화 전략을 절연시키고 있는 점은 문제적이라고 여겨진다. …여전히 필요한 것은 정치적 다수화 전략이며, 중요한 것은 그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왔던 개혁적 자유주의 분파의 선거전술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내용과 가치체계에 입각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백낙청은 최근에 ‘변혁적 중도주의’를 제창했는데, 나는 이 주장이 아직 구체성을 덜 가지고 있긴 해도 현재 남한 민주주의의 위기 극복과 분단체제 극복을 위해서 필요한 정치적 다수화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87년체제에 대한 존경심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우리가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 시절 가졌던 자기 나라에 대한 도덕적 수치감에서 벗어나게 해준 체제이며 우리가 그것을 건축했다는 사실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는 것, 이것이야말로 새 집을 짓기 위해 길을 나서는 마음가짐이어야 할 것이다.”

    나는 최장집과 손호철이 개진한 역사 인식에 동의하고, 「‘변혁적 중도주의’는 분단이데올로기(<레디앙>, 5. 17) 」라는 짧은 글에서 백낙청의 정치노선을 비판한 바 있으므로, 이 글에서는 김종엽이 백낙청의 주장에 동조하며 끌어댄 논거들을 비평하겠다.

    1.

    김종엽은 이른바 ‘자유주의 분파’가 뭔가 대단한 양 이야기한다. 이는 그가 ‘자유주의 분파’의 정체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자신이 아는 것과 다르게 글을 쓰는 것일 수도 있다.

    자유주의 정파의 정체성에 대한 무지

    “노무현 정부와 보수세력의 ‘신자유주의 성장동맹’ 같은 최장집의 말이 수사적인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라면 과도한 표현이다.

    …그는 ‘한국 정당의 균열축은 민족문제를 둘러싼 한 수준에서는 분명한 차이를 갖지만, 다른 수준에서는 이렇다 할 차이를 갖지 않는 애매한 이중성이 중첩해 있다’고 진단하는데, 경제정책은 그렇다 치더라도 사회정책에서도 이렇다 할 차이가 없었는지는 의문이다.”

    일반적으로 사회정책이라 할 때는 노동정책, 복지정책, 언론정책 등을 일컫는 것인데, 노무현 정부를 비롯한 ‘자유주의 분파’와 ‘보수세력’의 그것은 거의 완벽하게 일치한다.

    노무현은 대통령 당선자 시절인 2002년 12월 “대규모 노조에서는 해고가 어려워, 노동유연성이 떨어진다”는 발언을 시작으로 일관되고 강력하게 노동운동에 적대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그리고 마침내 비정규 악법과 노사관계 로드맵의 강행 입법을 통해 반노동 국가시스템을 완성했다.

    이처럼 ‘자유주의 분파’의 노동관, 노동정책은 “90% 노동서민 착취하는 10% 노동귀족”이라는 조갑제의 그것과 이론적으로, 실천적으로 같다.

       
    ▲ 노무현 대통령이 10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정부 차원의 첫 6.10 민주항쟁 20주년기념식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홈페이지)
     
     

    자유주의 분파와 보수파의 동질성

    사회복지 정책도 매한가지다. 노무현 정부는 국민연금 등에서 ‘많이 걷고 적게 주는 개혁’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다. 물론 그 방법이 한나라당과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조삼모사냐 조사모삼이냐 하는 차이 뿐이다.

    다양한 사회정책의 총합 결과물이라 할 빈곤율을 살펴 보면, 1998년 최고점 이후 하락하다가 2002년부터는 다시 상승하는 것을 읽을 수 있다. 이는 현재의 빈곤이 IMF라는 상황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 분파’의 능동적 사회정책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만약 ‘보수세력’이 ‘자유주의 분파’와 다르다면, ‘보수세력’은 친민중세력일 것이다.

       
     
     

    자신의 언론특보였던 서동구를 KBS 사장으로 임명한 것으로부터 시작된 노무현 정부의 언론정책은 최근의 기자실 통폐합 논란으로 이어지고 있다. ‘자유주의 분파’가 얼핏 자유주의적인 것으로 보이겠지만, 그들의 언론정책은 거의 절대화된 자기애(自己愛)에 기반하여 공급자 중심 정책을 편다는 점에서 ‘보수세력’의 그것과 같은 철학 기반 위에 서 있다.

    김종엽은 ‘신자유주의 성장동맹’이 과도한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탄핵까지 당했던 노무현의 정부발의안 99%가 ‘보수세력’의 지지에 힘입어 입법되었다. 물론 이 때의 ‘동맹’은 ‘입법’에 국한되고, 겨우 ‘99%’일 뿐이다. 김대중과 노무현에 의해 임명된 총리 여덟 명 중 여섯 명이 군사정권 때 관직에 있던 사람들이다. 물론 이것도 단순한 ‘행정 동맹’일 뿐이겠지.

    2.

    김종엽은 ‘자유주의 분파’가 이룬 남북한 사이의 교류협력 확대에 대해 지나치게 과장된 평가를 한다. 물론 이것 역시 그들의 업적을 칭송하기 위해서일 테지만, 지켜보기 거북할 정도로 민망하다.

    남북한 교류확대 과장 민망하다

    “남북정상회담 등의 성과는 …경제적 이익이나 평화무드의 정착에 더해 남북한 사람들의 상상력의 지평을 넓히고 사회체제의 변혁과 혁신의 지평을 한반도 수준으로 확대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노태우 정부의 91년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과 92년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등은 …임수경과 문익환 목사의 방북으로 대변되는 통일운동에 대응하기 위한 수동혁명적 성격을 지녔으며”

    김대중과 김정일의 역사적 만남이 한 때 뭔가 될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고 남북 관계를 지속 진전시킨 것은 분명하지만, ‘상상력의 지평 확대’니 ‘변혁의 지평 확대’니 하는 따위 평가는 한총련 학생용 ‘교양자료’에나 나오는 칭송이다.

    아래 표를 살펴 보면 ‘북한’ 문제에 대한 국민의식은 경제 문제 등과는 달리 진보성향 사람들에 있어서도 보수성향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상상력의 지평 확대’라기보다는 ‘자유주의 분파’의 남북관계 남용에 따른 ‘피로증’으로 평가하는 것이 적절하다.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이 문익환과 임수경의 방북에 대응하기 위한 ‘보수세력의 수동혁명’이라는 평가는 무지이거나 날조다.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은 1973년 박정희의 선언 이후 남한 정부의 일관된 정책이었으나, ‘분단 영구화’라는 북한의 반대에 의해 저지됐던 것이다.

    보수세력 수동혁명론은 날조

    문익환과 임수경의 방북 이전에 노태우의 취임사에서 먼저 등장한 이른바 ‘북방외교’가 동시가입의 승인자인 소련과 중국의 지지를 받고, 이에 북한이 기존의 입장을 철회하게 된 것이다. 문익환과 임수경의 방북은 남한 정부의 동시가입 추진 이후의 일이고, 소련과 북한이 동시가입을 받아들이는 데에도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요컨대, ‘자유주의 분파’의 여러 활동이 남북 관계의 개선에 미친 영향이 막대하기는 하나,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등의 구조적 변화는 ‘보수세력’으로부터 ‘자유주의 분파’로 이어지는 남한 국가의 단계적 접근 전략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북한 국가의 정치군사적 일괄 해결 노선에 근접하게 되었기 때문에 성사된 것이다.

    3.

    김종엽은 한미FTA 등의 신자유주의가 외환 위기라든가 87년 헌법의 구조적 문제점에서 비롯된 것처럼 말한다. 물론 김종엽이 “그러니까 그들은 무죄”라고까지 말하진 않지만, 보통 수준의 독해력을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읽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미국 제국주의자가 나쁜 놈이지 그 마름인 남조선 괴뢰가 무슨 죄냐”는 1980년대식 운동권 논리를 조금 세련화시킨 것으로 보여지는데, 그 주장을 이끌어내기 위해 끌어다 쓰는 논거가 너무 엉터리다.

    한국판 신자유주의 기원은 YS때부터

    “경제적 자유화 프로젝트가 민주화 프로젝트를 압도해가는 일이 벌어진 것은 외환위기에 연원이 있으며, 최근의 한미FTA 타결은 …그를 지지했던 세력들에게 적잖은 당혹감마저 안겨주고 있다.

    이런 당혹감은 노무현정부에 대한 기대가 배반된 까닭일 텐데 …냉정하게 말하면 그 기대 자체가 오류를 내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기대의 재조정이 있어야 할 것이며 …사태를 노무현 대통령의 개성과 통상관료들의 한탕주의 같은 우연적 요소로 환원하지 않기 위해서는 87년체제론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개헌에 참여한 두 세력은 어느 쪽 후보가 당선될지 불확실한 대통령의 권한은 약화시키고, 자신들이 일정한 지분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 의회권력은 강화했다. …이런 상태에서 대통령은 자신의 주도권을 확립하기 위해 대외정책에 눈을 돌릴 개연성이 높았다. …그 핵심은 남북관계의 변형 아니면 금융 및 통상정책의 수정이었다.

    …이런 영역에서 대통령이 상당한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음은 마찬가지로 강조되어야 한다. 방향설정을 제외하면 정보와 접근경로, 협상에서의 재량권과 의지, 관료의 동원 그리고 국내정치와 국제환경에 대한 정세판단에서 대통령은 상당한 자율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외정책이 일단 현실화되면 대단히 비가역적인 방식으로 우리 사회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김종엽 뿐 아니라, 많은 학자들이 신자유주의의 기원을 1997년 말의 외환위기에서 찾고 있다. 하지만 이런 관점은 대형 사건만을 기억하는 문외한의 눈에는 적당하겠지만, 정확한 관찰을 하고 그 기록을 남겨야 하는 학자의 것으로는 옳지 않다. 이윤 최대화를 위한 이데올로기와 다양한 경제사회 정책으로서의 신자유주의는 외환위기보다 더 오래 전인 김영삼 정부 초기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위 노동소득분배율 그래프는 1987년부터 1991년까지는 가파른 상승 곡선을 보이고, 그 이후에는 정체 상태인 것을 보여준다. 이런 현상은 앞서 살펴봤던 빈곤율이 1992년 경부터 늘어나는 것과 동일한데, 이는 1987년 이래의 분배 정국이 1992년부터는 민중을 대상으로 한 절대적 잉여가치 확대 정국으로 전환되었음, 즉 신자유주의 정책이 본격 구사되었음을 증명한다.

    외환 위기 진단의 오류

    다만, 빈곤율보다는 노동소득분배율이 상대적으로 긍정적 동향을 보이는데, 이는 조직적 노동운동의 영향이라 파악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가 구조적으로 출현했다 할지라도, 그 실현은 현실 사회에서 현실 세력의 능동적 쟁투에 의해 구체화한다.

    외환위기는 김종엽의 진단처럼 “경제적 자유화 프로젝트가 민주화 프로젝트를 압도해가는 연원”이 아니라, OECD 가입, 금융자유화, 노동소득분배율 지체 등 신자유주의 정책에 의한 결과물이다. 더 정확하게는 급속히 도입된 신자유주의와 구래의 재벌시스템의 부조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쨌거나 외환위기라는 면죄부는 유효하지 않다.

    김종엽은 87년 체제와 그 헌법이 ‘자유주의 분파’의 대통령으로 하여금 대북정책이나 대외정책에 몰두케 한 것처럼 말한다. 그렇다면 남한 헌법상의 대통령 권한보다 훨씬 약한 권력을 부여받는 유럽의 수상이나 총리들은 모두 나라 밖으로만 나도나? 아예 국가 수반이 없는 스위스가 유로화 가입도 안하고 미국과의 FTA를 중단한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대내정책과 대외정책을 나누는 김종엽의 패러다임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87년 헌법의 굴레 안에 있는 대통령들은 대외정책 뿐 아니라 대내정책에서도 노태우의 신공안정국, 김영삼의 날치기, 노무현의 노동악법과 같이 강력한 ‘자율성’을 행사했다.

    대내, 대외정책 분리 패러다임 사실 오도

    또, 6.15 정상회담, 한미FTA 같은 대외정책만이 ‘비가역적’인 것이 아니라, 국가보안법이나 가족제도 같은 대내정책도 반세기 동안 비가역적으로 운영된다. 국내법이든 국제조약이든 남한 체제의 운용 틀 안에서 그 중요도와 가역성 정도가 결정된다.

    김종엽은 87년 헌법이 특정한 대북정책과 대외정책을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자유주의 분파’가 아니라, ‘보수세력’이 집권하였더라도 이북과 좋은 관계를 만들어나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박근혜나 이명박이 아메리카합중국에 가입 신청을 하더라도 비난하지 말고, “기대의 재조정”만을 해야 한다.

    자유주의자들을 감싸려 하다 보니, 모든 정치세력에게 면죄부를 주게 된 꼴인데, 이것은 몰역사적 환원주의이거나 천박한 구조결정론이다. 20주년 맞은 1987년, 아무 데나 동원되느라 고생이 많다.

    4.

    김종엽은 그의 글 전체에서 ‘자유주의 분파’와 ‘민주화세력’을 나누어 서술하며, ‘민주화세력’에 기대를 건다. 아마도 실패와 변절이 공인된 자유주의 정치세력과 1987년을 만든 사람들을 구별하고,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실패가 곧 1987년의 실패는 아니라고 주장하기 위한 입론처럼 보이는데, 이런 구분법 역시 사실과 다르다.

    1987년 상반기 정국은 재야와 학생운동권이 주도했고, 많은 시민들이 여기에 동조했다. 그 하반기 정국은 노동자 파업이 휩쓸었지만, 상반기를 주도한 세력과 원활한 연대가 있지는 못했다.

    87년을 주도한 민통련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의 간부들 중 압도적 다수는 이미 당시부터 김대중 당의 비밀당원이었고, 이후 20년 동안 ‘통합’이나 ‘입당’이라는 형식으로 수혈돼갔다.

    자유주의 분파와 민주화세력 나누는 건 어불성설

    김근태 등은 ‘자유주의 분파’인가 ‘민주화세력’인가? 당시 시위대를 지휘했던 이인영, 우상호 등의 전대협 세대는 지금 열린우리당 소속 국회의원인데, 이들은 ‘자유주의 분파’인가 ‘민주화세력’인가?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상임대표 백낙청은 ‘자유주의 분파’인가 ‘민주화세력’인가?

    1987년 이래 한국 사회의 변화는 자유주의자들이 주도하는 가운데, 예전 군부독재 정당을 이은 정치세력과 현재 민주노동당으로 모인 민중운동 세력이 하위 파트너로서 협력하거나 긴장하는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다.

    즉, 굳이 87년 세력을 나누려면 호헌선언까지의 세력과 6.10대회 이후의 세력, 파업 세력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이지, ‘자유주의 분파’와 ‘민주화세력’으로 나누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사실에 있어 ‘자유주의 분파’는 ‘민주화세력’의 정치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주체가 그것을 자임하고 디자인해야 한다. …여전히 필요한 것은 정치적 다수화 전략이며, 중요한 것은 그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왔던 개혁적 자유주의 분파의 선거전술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내용과 가치체계에 입각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위 구절은 김종엽의 논문에서 인용한 것이지만, 이제는 관변화된 2류나 3류 운동권의 유인물 또는 심약한 학자들의 논문에서도 빼다 박은 듯이 똑같은 구절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하나 같이 ‘자유주의 세력’과 구분되는 ‘민주화세력’, 실재하지 않는 통일된 ‘주체의 다수화’를 주장한다.

    실재하지 않는 ‘통일된 주체’의 다수화

    물론 언제나 ‘새로운’이라는 수사를 들먹이지만, 이런 시도에 의해 1987년 이래의 한국 정치가 재건축된 적은 한 번도 없다. 언제나 페인트 색 정도 바꾸는 리모델링이었을 뿐이다.

    ‘자유주의 분파’와 ‘민주화세력’을 나누는 입론은 “그래 그들은 실패했어. 하지만 우리는 한 번 더 해봐야지”라고 속삭이기 위해서이다.

    아직은 신선한 듯 보이는 사람들을 동원해 때 묻은 자들을 구원하는 선거전술은 지난 20년 동안 총선이나 대선 직전마다 어김없이 되풀이돼 왔고, 나는 이를 일컬어 ‘계절병’이라 말하곤 했다. 그런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제 스스로 투쟁하거나 독립적 힘으로 집권해 본 적 없는 한국 자유주의의 유전병인 듯 하다.

    더구나 김종엽과 백낙청은 김영삼, 김대중에서 노무현으로 이어지는 자유주의자들의 ‘개혁성’에서마저도 후퇴하는 듯 하다. ‘변혁적 중도주의’라는 황당한 입론이 그것인데, 아무리 좋게 봐줘도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인기가 밑바닥인 상황에 적응키 위한 치졸한 선거전술일 뿐이다. 변혁도 좋고 중도도 좋지만, 중도가 변혁하겠다고 나서면 친위쿠데타밖에 더 되겠는가?

    5.

    김종엽을 비롯한 ‘백낙청 사단’의 가장 큰 오류는 일제시대로부터 비롯되어 1953년에 굳어진 분단과 1987년 체제를 어거지로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분단과 87년이라는 두 기제로 세상만사를 재단하는 것이다.

    거칠게 정리하자면, <창비>의 논리는 ‘분단체제 ⇒ 87년 체제 ⇒ 평화개혁 세력 다수화 ⇒ 중도 중심 진보개혁 연대’이다.

    ‘백낙청 사단’의 가장 큰 오류

    백낙청의 분단체제론은, 분단이 남북한 정권의 적대적 의존관계를 낳고, 이에 의해 남북에서의 민주주의와 민생이 침해받는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옳다. 하지만, 내전기라 할 1953년까지의 분단, 공식 비공식적으로 공존 질서가 확립된 1973년 이후의 분단, 김대중 김정일 정상회담 이후의 분단은 그 연원은 같으나 그 작용은 다른 체제이다.

    즉, 분단이 남북의 정치질서와 민생에 미치는 영향이 다른 것이다. 이북 정권을 찬양하면 53년까지는 즉결 총살되었고, 그 이후에는 감옥에 갇혔고, 요즘은 단순 찬양으로는 별 탈 나지 않는다. 그런데 <창비>는 ‘분단’이라는 고정된 틀 안에 한국 정치와 민생을 가두려 한다.

    분단이 1987년과 중도 수렴을 만들었다는 또는 만들어야 한다는 <창비>의 논리 역시 몰역사적이다. 이 명제가 올바르려면 1953년에 이미 1987년이 예비되고 있었다든가, 거꾸로 1987년에 분단이 시작되었다고 증명해야 한다. <창비>의 논리대로라면 당시로서는 혁명적이라 할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이나 1960년의 민주주의 경험은 비논리적 일탈로 역사서에서 삭제해야 한다.

    박정희가 ‘분단’을 애용한 것처럼 김종엽은 ‘87년’을 애용한다.

    “87년체제에 대한 존경심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우리가 박정희와 전두환정권 시절 가졌던 자기 나라에 대한 도덕적 수치감에서 벗어나게 해준 체제이며 우리가 그것을 건축했다는 사실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는 것, 이것이야말로 새 집을 짓기 위해 길을 나서는 마음가짐이어야 할 것이다.”

    새 집 지을 때 필요한 건 ‘존경’ 아니라 ‘철거’

    우리는 물론,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신념과 긍지를 가진 근면한 국민으로서, 새 역사를 창조하는 데도 앞장 서야 한다. 하지만 국민교육헌장이 뭐라 하든, 6.10 20주년 기념사에 어떻게 쓰여져 있든 ‘존경하는 마음가짐’ 따위는 언제 어디서든지 기득권 수호와 역사 퇴행의 무기이고, 인민에 대한 폭력이다. 새 집을 짓는 데는 ‘존경하는 마음가짐’이 아니라, 철거가 필요하다.

    1987년은 무엇인가?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이다. 그 때로부터 20여 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60년과 61년이 있었고, 1987년의 사람들이 1960년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2007년의 사람들은 1987년을 잊었다.

    내가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 종(種)에 속하지만, 아프리카 동부 사바나에서의 기억보다는 SKT의 핸드폰 요금에 더 큰 영향을 받는 것처럼 2007년의 사람들은 1987년이 아니라, 소득이 대여섯 배 늘고 자유주의로 인해 양극화된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 분단도, 1987년도 변했다. 변하지 않은 것은 <창비>의 구닥다리 역사관 뿐이다.

    6.10은 무엇인가? 그것은 6.29로 귀착되었다. 물론 ‘절반의 승리’라거나 하는 진단이 당연하지만, 절반을 넘는 완벽한 승리는 앞으로도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애초에 ‘완벽한 꿈’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합의조차 없었으므로, 어떤 상황이 만들어지든 누군가는 그것을 완벽하다고 긍정할 것이고, 다른 이들은 완벽하지 않다고 부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실 정치에서 완벽한 승리란 없다. 실험실 조건에서나 추출 가능한 순수한 물을 현실 세계에서 구하는 것은 책상물림들의 몽상이다.

    신화화된 87년 이데올로기 재생산하는 <창비>

    1987년은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라는 정상정치(正常政治)를 만들었고, 1997년에 이르러 포스트 87년 체제의 한 축이라 할 민주노동당 운동이 태동했다. 따라서 1987년의 지속이든 그것으로부터의 탈출이든 여러 정치적 선택이 있게 마련이지만, 동적 역사로서의 87년 체제를 모르고, 정적 시점으로서의 87년에 갇혀 있는 <창비>들은 신화로서의 87년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재생산한다.

    김종엽은 ‘비판적 지지’가 아니라며, ‘변혁적 중도주의’를 염두에 둔 ‘정치적 다수화 전략’을 제시한다. 황태연의 ‘저항적 지역연합’ 이후 단연 최고의 정치담론이다. 김종엽은 ‘자유주의 분파의 선거전술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내용과 체계’를 주창한다. 그런데 기껏 내보이는 것은 ‘존경심’이니 ‘자부심’이니 따위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였다.

    김종엽의 논문을 보며, 자신의 정치적 지향에 따라 곡학아세하는 데 대한 분노는 일지 않았다. 오히려 “자유주의 분파의 집권이 보수세력의 집권보다 더 나빴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대목에서 나는 애처로움을 느꼈다. 김종엽은 손호철더러 ‘지적 차원’에서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 나라 학계의 ‘지적 수준’이 참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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