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년 해고, 07년 또 해고된 사람
        2007년 06월 08일 04:4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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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7일 서울 영등포의 한 카페. 인터뷰를 위해 만난 전재환 전 금속산업연맹위원장(사진)은 머리가 많이 긴 모습이었다. "아니, 왜 그렇게 머리를 기르셨대요? 흰머리도 많고 나이 들어 보이잖아요?" “삭발 투쟁을 너무 많이 해서 이제 장발 투쟁 좀 해보려구… 허허”

    금속산업연맹의 마지막 위원장 전재환. 대공장들의 금속노조 전환을 마무리하고 2006년 12월 27일 금속산업연맹 해산 대의원대회에서 그는 자신의 손으로 연맹의 깃발을 거뒀다. “연맹 해산이 섭섭하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까지 제가 노동운동 해왔던 보람을 느끼는 정말로 가슴 벅찬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현재 두산인프라코어(옛 대우중공업, 대우종합기계) 현장에 들어갈 수 없다. 지난 5월 14일 회사로부터 날아온 ‘당연 퇴직’ 통보. 한 마디로 ‘해고’다.

    그는 금속산업연맹위원장 재임 중 민주노총 지도부의 총사퇴로 민주노총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으면서 2005년 12월의 비정규법안 관련 투쟁을 이끌었고 지난 4월 26일 대법원에서 징역2년에 집행유예 3년 확정판결을 받았다.

    대법 판결 이후 사측은 재빠르게 단체협약과 취업규칙(‘금고’ 이상의 형이 확정 되면 당연퇴직)을 이유로 당연퇴직 통보를 하고 그의 현장출입을 제지했다.

    박용성 두산그룹 회장과 두산인프라코어 박용만 부회장이 326억 공금횡령과 2,000억의 분식회계 등의 이유로 징역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도 멀쩡하게 복귀한 것과는 무척 대비된다.

    그룹 회장은 복귀, 노동자는 해고

    “경영진과 노동자들에게 이중 잣대를 들이대면서 법과 원칙을 지킨다는 두산 자본의 논리를 이해하려 해도 이해할 수도 없고, 단체협약에 정당한 노동조합 활동과, 전임자 활동을 보장한다고 되어있습니다. 노조활동을 하면서 집행유예를 받은 것이 단협과 취업규칙의 적용 대상으로 해석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회사측의 일방적 해석은 곧 노조 활동을 부정하는 것이기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는 매일 지회사무실로 출근한다. “주로 무슨 일 하세요?” “별로 일 안하는데… 지회에서 나한테 뭐 일을 시켜야 말이지… 허허” 그래도 그는 바쁘다. 인터뷰도 밤 9시나 되어서야 시작됐다.

    사실 그는 이번이 두 번째 해고다. 처음 해고는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3월, 회사가 어려워서 올해 임금은 동결한다는 노동조합의 어용성에 분노하며 그는 당시 대우중공업 현장에 ‘불온 유인물’을 뿌렸다. 어용노조에 대한 비판이었다. 당시 나이 ‘방년’ 28세.

    20년 전 처음 해고

    문제의 ‘불온 유인물’은 그의 자취방에서 만들어졌다. “등사기로 유인물을 밀어 허리춤에 숨겨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출근을 했지요. 화장실과 기계 밑 등에 유인물을 놔뒀어요” ‘불온유인물’이 발견됐다며 회사가 발칵 뒤집어졌다. 유인물을 수거한다고 난리법석이 났다. 그러나 조합원들은 이를 호주머니에 접어 숨겨놓고 읽었다.

    4월 중순, 8명이 다시 그의 자취방에 모였다. 2차 유인물을 준비하고 있는데 경찰과 노무과 직원이 함께 들이닥쳤다. 그와 동료들은 인천시경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당시 대공분실은 끌려가면 가족과도 연락이 두절된 상태로 죽어서 나오기도 하는 곳. 잠을 안 재우는 고문과 취조로 그는 자신이 유인물을 제작했다는 것을 “불었고” 3일 만에 대공분실에서 나올 수 있었다.

    회사는 1주일 뒤인 4월 28일에 인사위원회를 열어서 4명을 해고하고 4명을 정직시켰다. 그는 해고였다. 당시 서슬 퍼런 분위기에 정신적인 고통과 후유증으로 활동을 포기하고 공장을 떠나 시골로 내려가 잠적한 동지들도 있었다.

    그는 ‘푸른 잔디회’라는 학습모임의 주도자였다. “밟아도 밟아도 다시 일어선다는 뜻이죠” 회원은 13명. 징계 받은 8명이 모두 회원이었다. 그들의 징계 후 모임은 오히려 조합원들로부터 더 지지를 받았다. 5월에 있었던 대의원 선거에서 푸른잔디 회원과 지지자들이 거의 모두 당선된 것. 그 여세를 몰아 위원장까지 갈아치울 수 있었다.

     ‘푸른 잔디’는 이후 ‘대우중공업 노동자회’가 됐고 회원은 150명가량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이들은 87년 대투쟁을 주도했다. “87년 대투쟁 때 조합원들은 1주일을 밤이슬을 고스란히 맞으면서 잔디운동장에서 철야농성을 했습니다. 결국 임금동결은 철회됐고 승리감을 맛봤지요”

    그 투쟁 이후에 조합원들은 ‘혼자는 나약한 존재이지만 뭉치면 못 할 것이 없다’는 자신감을 가졌다. 그런 자신감으로 대우중공업 노동자들은 이듬 해 43일간의 파업투쟁을 벌인다. 공장은 완전히 섰고 그들은 또 승리했다. 그리고 1989년 5월 1일, 2년간의 출근투쟁과 노조의 투쟁으로 그는 마침내 공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20년 세월, 현장과 조합원을 바꿔놓다

    2년 만에 복직했던 그가 20년 만에 다시 해고됐다. “2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여서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조합원들이 87년처럼 폭발적인 표현은 하지 않아요. 그만큼 우리 운동의 조건이 바뀌었다는 거지요” 섭섭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아니라"라고 답한다. 그가 생각하는 현장의 변화는 두 가지다. 조합원의 고령화와 자본의 변동.

    “두산은 기본적으로 노조를 불인정합니다. 노조의 자주성을 상실하게 만드는 노무관리를 하죠. 그래서 배달호 열사도 돌아가셨고요.” 대우종합기계가 두산으로 넘어간 뒤 생긴 첫 번째 해고자. 그는, 그를 사업장에서 쫓아낸 것은 ‘두산식 노무관리’를 두산인프라코어에도 그대로 적용하겠다는 표현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반드시 현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

    연맹의 깃발을 자신의 손으로 접은 만큼 금속노조에 대한 애정도 각별하다. “올해 중앙교섭에 따라 금속노조의 진로가 결정될 것입니다” 금속노조의 미래는 노동운동의 미래이기도 하다.

    “초국적 자본을 중심으로 흐르는 신자유주의가 짧은 시간에 거칠게 들어왔습니다. 상황이 어렵다는 걸 조합원들도 알지요. 하지만 여기에서 밀려서 금속노조마저 방향을 잃으면 영원히 자본에 속박될 것입니다. 노동자계급의 희망은 없습니다. 중앙교섭의 중요성을 조합원들이 함께 인식하고  함께 투쟁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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