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후 20년,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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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6월 08일 07:3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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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3월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고국을 찾았을 당시 필자 하영식씨. (자료사진=레디앙)  
     

    내 속에서 한동안 잠들어 있던 행복에 대한 생각을 일깨워준 것은 다름 아닌 영화 ‘피터팬’의 한 장면이었다. 배가 나오고 뚱뚱해져 날 수 없게 된 피터팬에게 어린아이들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생각해봐. 그럼, 날 수 있을 거야”라는 말을 한다.

    피터팬은 잠시 생각에 잠겼고 행복했던 순간을 생각했는지 곧 바로 날아오르게 된다. 영화 ET에서도 유사한 장면이 나온다. 자전거로 ET를 탈출시키려는 아이들을 경찰들이 추격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슬아슬하게 아이들이 경찰에 잡히게 될 즈음, 갑자기 아이들이 탄 자전거들이 하늘로 날아오른다. 바로 이 순간에는 모두가 함께 날아오르는 듯한 행복감에 빠져든다.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행복하냐”는 질문을 던진다면 대부분은 무척 당황할 것이다. 그리고 한참동안 생각한 후에야 겨우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모르겠다”는 대답이 아마 거의 과반수 이상을 차지할 것이다. 어쨌든 행복하다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 사람은 소수일 것이다.

    우리를 당황케 하는 질문

    이는 현대인들이 무엇 때문에 살아가는지 조차 잊고서 살아간다는 증거이다. 나도 예외는 될 수 없다. 나에게도 행복하냐는 질문이 갑자기 주어진다면 대답하기가 망설여질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행복한지 모르겠다는 사람들은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너무 행복한 나머지 아예 행복한 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또 다른 부류는 아예 행복과는 반대의 삶을 살면서 고통을 인내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어쨌든 전자보다는 후자가 대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곰곰이 따져보면 한 번 왔다 가는 인생인데 조금이라도 행복하게 살 수는 없을까. 행복하게 살기 위해 공부하고, 일하고, 사랑하고, 결혼하고, 파업하고, 데모하고, 선거하고,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위해 투쟁하고, 민주노동당도 만들고… 이 모든 행위들은 좀 더 행복하기 위한 행위가 아닐까?

    그리고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본능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위해 정든 조국과 고향, 친지들과 친척들을 버리고 다른 나라로 이민을 떠나기도 한다. 더욱이 어떤 이민자들은 국적까지도 가차없이 바꾼다. 모두 행복해지기 위한 발버둥이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투쟁하다 감옥 가고 고문당하고 두들겨맞는 이유도 궁극적으로는 대다수 인민들의 행복을 쟁취하기 위해서다.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인간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다 더 행복할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다.

    행복의 이름으로 사랑하고 혁명하고

    계급투쟁이 유혹적인 이유도 억압받고 고통당하는 대다수의 인민들이 억압과 고통에서 해방돼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미래의 희망 때문이다. 모두 인간의 행복과 밀접하게 연관돼있다.

    행복이 이슈가 되는 이유는 인간사회에 사는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다는 데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 사이에서도 행복의 문제는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행복한 사람은 극소수이고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을 차지했던 고대 그리스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가 철학자들의 고민거리였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즐거움과 관계된 것은 선으로, 고통과 관계된 것은 악으로 간주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고통에서의 해방, 평화의 상태를 가장 큰 선으로 꼽았다. 공산주의 이론의 창시자인 마르크스의 박사학위논문이 에피쿠로스에 관한 연구였다는 사실에서 에피쿠로스의 사상이 그의 머리를 한 동안 지배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지난 해 영국 레스터 대학의 심리학과 화이트교수는 국가별로 행복도의 순위를 매긴 지도를 발표한 적 있었다. 그의 발표에 의하면 가장 행복한 국가로 덴마크, 스위스, 오스트리아, 아이슬란드, 핀란드 등의 순이었다. 그리고 가장 불행한 나라는 콩고, 짐바브웨, 부룬디 순이었다.

    또한 과거의 공산주의 국가들도 행복도에서는 가장 밑바닥을 헤맸다. 러시아는 178개국 중에서 162위였고 그 뒤를 그루지야와 우크라이나가 이었다. 무엇보다도 한국은 103위로 90위인 일본이나 82위인 중국보다 국민들이 불행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평가됐다.

    한국은 불행하다, 행복 순위 103위

    화이트 교수는 건강을 첫 번째, 두 번째로 부, 세 번째로 교육을 행복도의 기준으로 삼았다. 이는 모두 부와 직결된 것으로 자본주의적인 가치척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의 기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크기 때문에 절대적인 순위로 보기는 힘들다.

    어쨌든 화이트 교수의 연구결과와는 달리 개인의 행복 정도에 대해 연구한 결과가 발표된 적 있는데 이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의과대학에서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명상을 실행하는 불교신자들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발표한 적 있었다.

    캘리포니아 주립의과대학이 인간의 두뇌활동을 데이터로 분석한 결과,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명상과 종교에 심취한 사람들의 두뇌활동이 훨씬 더 긍정적이고 밝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위의 연구결과를 뒷받침하는 현상들은 세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슬람종교가 지배하는 이집트는 가난한 사람들이 대다수지만 강한 종교의 영향으로 밝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어디서나 볼 수 있다. 경제가 훨씬 낫다는 유럽이나 미국의 경우 많은 사람들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행복하지 않다는 증거이다.

    이렇게 행복감을 느끼는 정도는 개인에 따라 천차만별일 수 있다. 종교에 심취해 얻는 만족감 또한 개인적으로는 중요한 행복의 요건일 수도 있다. 소비에트가 망한 이유 중 하나로 종교의 자유를 금지시킨 사실을 지적한 학자들도 있는데 이는 고려해볼 문제이다.

    종교자유 금지도 소비에트 패망 원인

    심리학자들이 일반적으로 공감하는 것은 부와 행복의 정도는 결코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어떤 사람은 가난하지만 행복한 사람이 있고, 엄청난 부자면서도 비참하게 살다 심지어는 자살까지 하는 사람들도 종종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위의 예가 일반화될 수는 없다. 일반적으로 개인은 사회와 동떨어져서 혼자만 행복할 수 없다. 전쟁이 일어난 나라에서 아무리 개인의 행복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전쟁이라는 파괴적이고 불행한 요인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당연히 개인적인 행복은 다수가 행복한 사회에서 추구될 수 밖에 없다. 또한 다수의 행복을 추구하는 길이 개인의 행복과도 직결된다.

    그리스어로 행복은 에프티히아(Eftihia)이다. ‘에프’라는 말은 ‘좋은’을 뜻하고 ‘티히아’는 ‘기회’를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행운이라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행복한 사람들은 자신이 행운을 잡았다고 생각한다. 대다수의 국민들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태어나 살고 있다는 사실을 행운이라 여긴다면 이는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행복하다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행복한가? 하지만 화이트 교수의 행복지도에서도 나타난 바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결코 행복한 나라가 아니다. 그의 행복지도에 의하면 대한민국의 행복도는 103위로 방글라데시나 카자흐스탄와 비슷한 수준이다.  

    조기유학 유행은 불행한 삶의 증거

    세계 10위의 경제력을 자랑하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행복도가 먹고 살기가 힘들어 우리나라에 품팔러 오는 방글라데시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자존심 상하는 발표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사실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한 해에도 수만 명의 국민들이 미국이나 캐나다, 호주 등지로 이민을 떠나기 위해 보따리를 싸는 모습이 이를 반증하고도 남는다. 이민 뿐만 아니라 조기유학이라는 세계적인 기현상에서도 불행한 삶의 증거를 찾아볼 수 있다.

    형편이 되는 자녀들은 영어권 국가로, 형편이 되지 않으면 필리핀이나 인도까지도 마다 않고 보내는 나라의 국민들에게 행복이란 단어 자체가 사치스러운 말일 수 있다. 이들이 조국을 등지는 이유는 밥 먹고 살기가 힘들어 떠나는 게 아니라 대한민국에서는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민중들의 행복을 빼앗아간 가장 큰 주범을 들라면 천박한 자본주의를 통한 금전만능주의의 지배를 들 수 있다. 또한 군부독재에 의한 노동착취와 자유와 인권의 박탈, 계급재생산구조로 정착된 교육정책, 부정부패 등을 손꼽을 수 있다. 위에서 열거한 것들은 모두 우리 민중들을 우울하고 비참하게 만든 요인들이었고 어떤 요인들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민중의 행복을 빼앗아간 주범

    올해 6월은 6월항쟁 20주년이 되는 달이다. 20년 전, 1987년 6월항쟁과 7~9월 노동자대투쟁은 우리 민중들을 한 동안 들뜨게 만들었다. 행복해질 수 있다는 희망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선을 앞두고 벌어진 양김씨의 분열은 또다시 민중들을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5년이 지난 뒤 양김씨는 연이어 대통령직에 올랐으나 예상대로 민중들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했다. 계속되는 대통령들의 자식들과 관련된 부정부패사건, 첨예하게 벌어지는 양극화현상은 민중들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우리나라에서 개인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고민해봐야 할 일이다. 국가가 민중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조국을 떠나게 만들어 왔지만 달라진 건 거의 없다. 20년 전 군부독재를 무너뜨렸던 민주화세력이 15년이 지났지만 달라진 건 거의 없다.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높고 더 많은 세련된 빌딩들이 들어섰고 수 많은 고속도로와 고속전철이 건설됐지만 민중들이 행복해지지는 않았다. 이제는 국가가 민중들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나서야 한다. 그 동안 고통만 안겨줬던 국가가 민중들에게 진 빚을 청산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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