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반 혁명의 사생아 '중도' 넘어
    일찍 늙은 '혁명 주체' 되살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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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6월 04일 03:4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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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7년의 회오리가 있고 난 바로 뒤였다. 그 다음 해 1월, 당시의 한 지하 운동단체의 기관지에 다음과 같은 주장이 실렸다.

    “이제 민족민주운동 내부에, 군사독재정권이 급격하게 반동화하리라는 주장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있다. 최소한 앞으로 있게 될 총선까지, 더 나아가면 9월 말, 10월 초의 올림픽 때까지는 현재와 같은 유화 국면, 개량 국면이 지속되리라는 예측을 아무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지는 않다. (중략)

    그러나 우리는 현재의 시기를 보다 긴 역사적 맥락 속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현재 진행되고 있는 변화들이 단기적인 전술 수립뿐만 아니라 전략 계획의 변경과도 관련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6. 29 이후 진행되어 온, 그리고 앞으로도 일정 기간 동안 지속될 변화의 성격은 전략 자체에도 일정한 변경을 요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전술’이 아닌 ‘전략’의 변화가 필요하다? 이것은 상당히 중대한 문제 제기였다. 이 글의 저자는 이런 심각한 문제의식 아래서 6월 항쟁 직후(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1988년을 6월 항쟁의 ‘직후’라 불러도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리라)의 정세를 이렇게 규정했다.

    “개량 국면은 직접적으로는 6월 투쟁의 산물이다. 그러나 그것은 보다 넓은 시각에서 보면 군사독재정권의 구조적 위기와 관련되어 있다. 20여 년간 계속되어 온 군사 독재 정권이 일시적 위기에 처한 것이 아니라 구조적 위기에 빠진 것이다. 그러한 구조적 위기로부터의 탈출이 지배 계급 주도하의 개량이며, 부르주아 민주주의로의 점진적 이행인 것이다. 이것이 현재의 개량 국면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은 ‘신준희’라는 필명의 저자가 쓴 ‘현정세의 성격과 민족 민주 운동의 당면 과제’이며, 이 글이 실린 잡지는 <정세와 실천>,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약칭 인민노련)의 기관지였다.

    한데, 이 조직의 모든 성원들이 위 글의 정세 인식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정세와 실천>의 다음 호에는 ‘최윤희’(지금 우리는 이것이 황광우 전 민주노동당 중앙연수원장의 필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라는 명의로 위 글에 대한 문제제기가 실렸다. 비판자는 무엇보다도 위 글이 남한 사회의 ‘부르주아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너무 단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지적했다.

       
     
    ▲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던 이한열 열사의 영결식
     

    사실 당시 운동권의 일반적 정서를 대변한 것은 위의 글이 아니라 ‘최윤희’의 비판 쪽이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당시에 6월 항쟁 이후의 정세를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진전’이라고 규정했다가는 운동권 내에서 ‘개량주의’니 ‘기회주의’니 하는 비난을 듣기 십상이었다.

    물론 이게 어느 한 쪽이 옳았고 다른 한 쪽은 틀렸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문제는 아니다. 87년이 벌써 20년 전의 옛 일이 된 지금에 와서 보면 역사에 대한 혜안을 보인 것은 ‘신준희’의 과감한 문제제기였던 것도 같다.

    하지만 또 달리 생각해보면, 당장 내일 일어날 일을 점치기 힘들었던(김영삼, 김대중 둘 다 결국은 대통령이 될 줄 누가 알았겠으며, 더구나 소련, 동유럽이 저렇게 될 줄은 누가 알았는가!) 당시 상황에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있다”는 진단이 지나치게 태평한 것으로 여겨졌을 법도 하다.

    실제로 군부 세력이 물러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외양이 갖춰지는 과정에서만도 수많은 예측하기 힘든 우여곡절을 겪지 않았던가. 91년 5월 투쟁의 이면에서 벌어진 민자당 내 민정계와 김영삼 세력의 치열한 권력 투쟁, 97년 대선을 앞두고 김종필과 손잡은 김대중의 정치 곡예 등등.

    그러나 ‘신준희’ 류의 정세 판단에 대해 당시 운동권이 격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이쪽이 훨씬 더 근본적인 것이었다.

    그 때도 운동권은 NL이니 CA니 PD니 하는 다양한 분파들로 나뉘어 있었지만, 이들 사이에는 커다란 공통점 또한 있었다. 이들이 내세운 각양각색의 혁명 전략은 모두 ‘민주주의 혁명’론, 이른바 DR론(DR은 Democratic Revolution의 약자)이었다.

    ‘반제 반봉건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 ‘민족민주혁명’, ‘반제 반독점(혹은 반파쇼)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 … 한국 사회에 당장 필요한 것은 민주주의 혁명이고, 이 민주주의 혁명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당시 사회주의자들의 혁명 전망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 혁명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었고, 그 민주주의 혁명을 노동자-민중이 ‘주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87년 6월 항쟁은 확실히 ‘민주주의 혁명’의 기준에 미달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민주주의 혁명이 필요했다.

    그런데, “87년을 거치면서 이미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대세가 됐다”? 이것은 운동권의 시나리오를 온통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는 진단에 다름 아니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있다면 이것은 운동권의 ‘민주주의 혁명’론이 이미 역사에 의해 추월당했다는 뜻이 되고, 따라서 노동자-민중이 민주주의 혁명을 주도하여 새로운 혁명으로 나아간다는 전망도 철모르는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그러니 ‘신준희’ 류의 주장에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였을 수밖에.

    20여 년 전 한 지하 운동단체의 잡지에서 전개된 논쟁은, 이렇게 6월 항쟁 이후 한국의 좌파가 경험한 혼란과 미묘한 동요를 보여준다.

    6월 항쟁 – 너무 늦거나 혹은 너무 이르거나

    87년 6월 항쟁은 확실히 ‘혁명’은 아니었다. ‘정치혁명’이라고 불리려면 최소한 집권 세력 정도라도 바꿔야 하는 법인데(이 점에서 1960년 4월은 6월 항쟁에 비하면 ‘혁명’이라고 불릴 만했다), 그 해 12월 대선의 당선자는 기존 군부 세력의 후보인 노태우였다. 그래서 혁명이란 말을 굳이 쓰고 싶다면, ‘절반의’라는 수식어를 꼭 앞에 붙여줘야 한다.

    하지만 6월 항쟁은 어떤 혁명의 ‘출발점’이기는 했다. 이탈리아 맑스주의자 A. 그람시가 ‘수동혁명’이라고 부른 것까지도 ‘혁명’의 범주 안에 넣는다면 말이다. 기존의 지배 세력이 저항 세력의 부상에 맞서고자 스스로 앞장서서 혹은 저항 세력의 일부를 흡수하면서 ‘위로부터’ 사회의 일부 구조를 바꿔나가는 것, 이것이 그람시가 말하는 ‘수동혁명’이다.

    한국 사회에서 지난 20년간 느릿느릿 진행된 ‘민주화’야말로 이러한 수동혁명의 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6월 항쟁은 그 시작이었다.

    이 ‘혁명’은 80년대의 젊은 혁명가들이 꿈꿨던 혁명과는 인연이 멀어도 한참 먼 것이었다. 노동자-민중이 주도하기는커녕 부르주아 정치 세력과 군부 잔당들 사이의 타협을 통해 실현되었으며, 노동계급의 미래를 열기는커녕 대자본가들의 힘만 키워주었다. 운동권이 구상한 시나리오가 현실에 들어맞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정반대의 그림이 현실이 된 셈이었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87년 당시 ‘운동권’ 대가족의 일부를 이루던 수많은 인물들이 수동혁명의 추진 대열에 합류했다. 다른 누구보다도 지금 우리의 대통령이 바로 이런 사람들 중 한 명이다. 그리고 지금 이 세력들은 ‘중도’라 자칭하는 거대한 엘리트 풀(pool)을 이루며 정치적 생존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6월 항쟁이 ‘절반의 혁명’이라는 판정을 이렇게도 달리 반복할 수 있겠다. 그것은 ‘너무 늦었으면서’ 동시에 ‘너무 일렀던’ 혁명이었다고.

    우선, 6월 항쟁은 ‘너무 늦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었다. 너무 늦었다? 무엇에 비해서? 세계사의 시간대에 비해서.

    6월 항쟁이 벌어진 1987년은 이미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거센 흐름이 전 지구를 덮치던 시점이었다. 우리의 6월 항쟁만 그런 게 아니었다. 비슷한 시기에 브라질, 칠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페루, 대만, 필리핀 등지에서 벌어진 민주화 투쟁들이 다 마찬가지였다. 이들 모두 일종의 민주주의 혁명들이었다. 그러나 이 중 어느 사례도 진보적인 경제사회적 민주화를 동반하지는 못했다.

    한때 소련 과학 아카데미는 이집트의 나세르 정권이나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정권을 사례로 들어, 이른바 ‘민족민주혁명’(National Democratic Revolution, 약칭은 NDR), 즉 일정한 진보적 경제사회 변혁을 수반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전망을 제시한 바 있다. 실제로 2차 대전 후 30여 년간 계속된 세계 자본주의의 한 시대는 저발전 국가들의 일부에서 이러한 시도들이 벌어질 수 있는 여분의 공간을 허용했었다.

    그러나 1980년대는 이미 전혀 다른 시대였다. 민주주의의 새로운 봄을 구가하던 나라들 중 그 어느 곳에서도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대변자들은 더 이상 NDR 식의 전망을 주창하지 않았다. 우리의 경우, 그 대표적 사례는 김대중이다.

    1970년대 김대중의 경제 강령은 ‘대중경제’론이었다. 지금 우리는 그 실제 저자가 박현채 선생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대중 경제론은 한 마디로 NDR의 한국판이었다. 거기에는 좌파 케인스주의 정도의 전망이 제3세계적 형태로 녹아들어 있었다.

    그러나 80년대 김대중의 미국 체류 기간 중에 대중경제론은 ‘대중참여경제’론으로 교체된다. 비록 명칭은 비슷해도 둘 사이에는 심대한 단절점이 존재했다. 전자의 내수 중심 발전 전망과는 달리 후자는 이후 ‘자유화’ 혹은 ‘개방’이라는 이름으로 추진될 신자유주의 세계화와의 통합 시도를 앞서서 전폭적으로 긍정했다. 많은 이들의 오해와는 달리, 김대중은 결코 1997년 외환위기 중에, IMF에 의해 전향한 게 아니었다.

    김대중은 단지 한 사례일 뿐이다. 전 세계 그 어디에서도 이제 부르주아지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대열에 기쁜 마음으로 함께 하는 것 외에는 스스로 다른 어떤 희망을 품거나 그것을 여타 사회 세력들에게 대안으로 제시할 수 없었다. 6월 항쟁은 바로 이런 시대 흐름을 배경으로 했다. 그래서 그것이 ‘너무 늦게’ 찾아온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6월 항쟁은 ‘너무 이른’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기도 했다. 우리의 시야를 한국 사회로 좁혀 보면 특히 그렇다. 너무 일렀기 때문에 참으로 중요한 한 요소가 미성숙한 상태였고, 이것이 또한 우리의 지난 20년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요소란 다름아닌 노동계급이다.

       
     
    ▲ 87년 6월 민주항생 당시 시청앞 광장을 가득메운 인파.
     

    6월과 7월 사이의 단절 – 그리고 지금 우리 내부의 단절

    1987년 전체를 따지고 보면, 노동계급의 활약은 놀라웠다. 7월에서 9월에 이르는 대중파업은 그야말로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6월 항쟁과 7~9월의 노동자 대투쟁 사이에는 깊은 골이 자리했다. 6월 항쟁이 노동자 대투쟁에 촉매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대중파업이 민주화 시위의 주력이 되지도 못했고 거리의 투쟁이 공장의 봉기와 결합하지도 못했다. 노동계급이 민주주의 혁명을 주도한다는 레닌주의의 공식은 소수 운동권의 머릿속에만 존재했다.

    우리의 87년을 같은 시기 브라질의 상황과 비교해보면 그 특징을 보다 선명히 이해할 수 있다. 브라질에서는 이미 1978~79년에 우리의 87년 7~9월과 같은 대중파업이 있었다. 그리고 이 투쟁 과정에서 룰라 같은 선진 노동자들이 성장했다. 이들은 불과 1년 뒤인 1980년에 곧바로 노동자당(PT)을 창당했다.

    중요한 것은 우리처럼 민주화 투쟁 이후에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진 게 아니라 그 반대였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대통령 직선제’가 민주화의 압축적 요구가 되었듯이 브라질에서도 80년대 중반에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민주화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런데 이 운동을 주도한 것은 바로 노동자당을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 세력이었다. 룰라가 대규모 거리 집회를 통해 노동조합 지도자를 넘어서는 대중적 정치 지도자로 부상한 것도 역시 이 때였다. 즉, 브라질에서는 실제로 노동계급이 민주주의의 전위 투사로 나섰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했다. 당시 한국의 노동계급은 정당은커녕 제대로 된 노동조합조차 갖지 못했다. 불과 몇 년 전부터 비로소 민주노조운동이 다시 기지개를 켜는 형편이었다(85년의 구로 동맹 파업, 대우자동차 파업 등). 학생운동 출신의 활동가들이 대규모로 현장에 진출하기는 했으나 그것도 정말 이제 막 시작이었다.

    그래서 6월 항쟁은 ‘너무 이른’ 혁명이었다는 것이다. 노동계급이 상황을 장악하기에는 역사의 속도가 너무 빨랐다. 그리고 이 때문에 김영삼, 김대중 등 부르주아 정치 세력의 지도력도 별다른 도전을 받지 못했다. 한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게 있다. ‘너무 이른’ 혁명의 역사적 경험이 이후의 노동계급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우리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든 노동자들의 의식과 조직은 거대한 역사적 경험을 통해 획기적으로 발전하곤 한다. 87년 노동자 대투쟁도 분명 그러한 역사적 매듭이었다. 전투적인 기업별 노동조합에서부터 파업 투쟁과 현장 여론을 중시하는 기풍, 운동 가요와 율동에 이르기까지 지금 우리 노동운동의 전통으로 불리는 것들 대부분이 이 때 등장한 것들 아닌가. 87년 여름의 그 나날들은 가히 한국 노동운동이라는 우주의 ‘빅뱅’이라 할 수 있었다.

    많은 이들은 이 때 혁명적 주체의 장엄한 등장을 보았다. 동해를 낀 거대한 산업 도시에 드리운 붉은 낙조, 그리고 이를 배경으로 공권력의 무자비한 폭력에도 굴하지 않는 수천, 수만 노동자들의 포효는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이나 그리스 신화의 거인들을 연상시키기까지 했다. 정말 우리들 중 다수는 거기서 한국 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한, 하지만 그 열쇠를 쥔 주체를 발견했다.

    그러나 ‘너무 이른’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으로 인한 6월과 7월 사이의 깊은 골은 그러한 예감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골짜기가 잘라놓은 것은 무엇이었던가? ‘6월’로 상징되는 ‘정치’와 ‘7~9월’로 상징되는 ‘경제’ 사이의 거대한 단절이었다.

    전자의 시야에서 공동체의 범위는 ‘국민’이었고, 쟁취해야 할 것은 ‘대통령 직선제’라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장치였다. 반면 후자의 시야에서 공동체는 ‘작업장’ 바깥을 넘기 힘들었고, 쟁취해야 할 것은 개별 기업주의 임금 양보였다.

    이것은 대중파업이 자동적으로 정치적 궐기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라는 진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자생적인 경제 투쟁을 정치 투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 촉매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촉매들을 제공하는 것은 변혁적인 정치 세력들의 몫이다. 허나, 87년의 투쟁 현장에서는 그런 세력들이 강력하게 존재하지 못했다.

    당시 ‘재야’라고 불렸던 운동권의 다수는 오히려 노동자 대투쟁을 임단협이라는 경제적 행위로 제한되도록 만드는 데 앞장섰다. 헌법 개정 과정과 경제사회적 민주주의의 요구를 서로 결합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니, 최초의 대통령 직선이라는 정치 일정을 위해 노동자 대투쟁의 빠른 종결을 바라기까지 했다.

    아무튼 6월의 경험과 7~9월의 경험 사이의 이러한 괴리는 이후 우리 노동운동 안에서 ‘정치’와 ‘경제’를 끊임없이 분리하는 역할을 했다. 노동자들의 의식 속에서 ‘정치’는 어디까지나 계급이 지워진 국민의 입장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진전을 바라보는 것 이상을 넘어서기 힘들었다.

    다른 한편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투쟁을 편협한 분파적, 경제적 이해 안에서 바라보기만 했다. 둘 사이의 결합이 가능하며 그게 바람직하다는 상상력은 종내 주도권을 쥐지 못했다. 공장의 봉기가 87년 6월보다 더 위대한 궐기의 시작이 될 수도 있으며 정부를 둘러싼 투쟁이 수십, 수백 번의 임단협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는 상상력 말이다.

    이렇게, ‘너무 이른’ 혁명은 정작 혁명적 주체의 성장을 너무 빨리 중단시켜 버렸다. 채 발육이 중단된 혁명적 주체는 결국 분파주의와 경제주의의 포로가 되었다. 자본가들은 바로 이 약점을 철저히 파악했고 신자유주의 공세를 통해 이 틈을 사정없이 비집고 들어왔다. 혁명적 주체의 조로(早老)야말로 신자유주의 반혁명의 가장 튼튼한 토대였던 것이다.

    ‘다른’ 민주주의 혁명을 향하여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 4월 혁명 1년 후 김수영 시인은 이렇게 읊었다. 87년 이후 20년이 된 지금, 우리는 이렇게 토로하지 않을 수 없다. 혁명은 왔지만 그것은 결국 우리의 혁명은 아니었다고.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혁명은 결코 단수(單數)가 아니라는 점이다. 역사는 혁명’들’ 사이의 약간 긴 휴식 시간일 뿐이며, 각 세대는 저마다의 혁명을 경험해야만 한다. 요즘 이곳저곳에서 ‘87년 체제’를 극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데, 여기에 우리가 맞대꾸할 말은 하나뿐이다. ‘87년 체제’가 어쨌든 그 나름의 혁명의 결실이라면 그것은 오직 또 한 번의 혁명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을 뿐이라는 것!

    이 글은 그 혁명의 전망까지 밝히는 데 목적이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 출발이 어떠해야 하는지는 짚어 볼 수 있겠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혁명적 주체의 성장이 가로막히고 중단된 그 대목을 뚫어내는 데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공동체의 범위에 대한 새로운 감각이며 새로운 전복적 선택과 행위에 대한 자신감이다. 이를 통해 노동계급의 의식과 조직에서 ‘정치’와 ‘경제’의 장벽을 거둬내야 한다.

    허나, 과연 지금의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은 이러한 역사적 전변의 순간에 촉매의 역할을 다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87년 당시의 ‘재야’의 역할을 반복하는 것은 아닌가?

    오늘날 우리가 ‘수동혁명’의 사생아들, 저 이른바 ‘중도’ 세력의 몰락을 앞에 두고 어부지리를 꿈꾸기보다는 저소득-미조직 노동자의 거대한 대열에 말을 걸고, 손을 건네는 데 골몰해야 할 이유는 바로 이 물음의 절박함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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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글은 전진 기관지인 <전진> 6월호에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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