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먹는 것을 지키는 것도 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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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6월 04일 11:0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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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 대통령이 FTA 문제는 단지 먹고 사는 문제일 뿐인데 일부 좌파 진영에서 이 문제를 지나치게 이념적으로 접근 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지금 세상은 ‘먹는 것’을 지키는 것도 분명히 좌파가 되는 세상이다.

    우파가 집권하고 있는 멕시코에서 또르띠야, 고기, 야채 등의 ‘식품 안전성’이 흔들리는 점을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그린피스 멕시코는 올해 3월 기자회견에서 유전자 조작 쌀이 멕시코에 수입됐다고 밝힌 바 있다. 

    미겔 앙헬 누녜스에 의하면, 베네수엘라 정부는 유전자 조작 농산물 수입을 금할 뿐 아니라 화학 비료, 제초제, 살충제 없는 농업을 위한 실험기관을 2006년 8월, 바리나스 주에 열었다고 한다. 아래에서 언급하겠지만 같은 바리나스 주에서 ‘남미 생태농업대학’가 문을 열었다. 

    선진국 비전 발표하는 다국적 투자회사 간부들

    농업이 퇴출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앞에서 미래의 ‘선진국’ 비전을 정부 또는 다국적 투자회사의 간부 등이 발표하는 것도 우리와 멕시코가 닮았다.

    최근 ‘엘 노르떼’ (El Norte) 신문 보도에 의하면, 멕시코가 2050년 경이 되면 세계에서 제 5위의 경제 강국이 될 수 있다고 유명한 골드만 삭스의 임원이 밝혔다고 한다. 단 지속적으로 연 4% 의 성장률이 가능할 경우  그렇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사람들의 삶의 질은 좋아질 것이라고 한다.

    ‘농민의 길’(Via Campesina)은 멕시코 칸쿤에서 2003년에 있었던 우리 농민 고 이경해 님의 자결로 우리에게도 알려졌지만 사회적 영향력이 큰, 전 세계에 걸친 농민 운동 단체다. 이 단체는 이 열사의 희생의 날인 9월 10일을 매년 중요시하며 기억하고 있다.

       
     
     

    이 단체의 활약으로 인해 우리가 예전에 많이 듣던 세계 식량농업기구(FAO)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퇴색되고 있는 느낌이다. 이미 WTO의 무력화에는 이 단체의 ‘농산물 자유무역 반대’라는 영향력이 많이 작용했다는 평가가 있다.

    물론 이데올로기적 지향점은 미국과 유럽국가들에 의한 신자유주의 주도권에 반대하는 것이다.

    ‘농민의 길’은 1992년 4월에 중미, 북미, 유럽 등의 농민 운동 지도자들이 니카라과의 마나구아에서 모인 대회에서 설립하게 되었다.

    첫 번째 대회는 1993년 유럽의 벨기에에서 열렸고 두 번째 대회는 1996년 멕시코에서 열렸으며 네 번째 대회는 2004년 브라질 상빠울로에서 열렸다. 2007년에는 아프리카의 말리에서 ‘식량주권에 대한 세계 포럼’을 주최한 바 있다. 상설 사무국은 온두라스의 수도인 떼구시갈빠에 있다.

    중남미 ‘좌경화’를 주도한 농민 운동

    1990년대 초는 중남미의 이데올로기, 정치 지형이 좌파 쪽으로 기우는데 중요한 시기로 보인다. 이를 주도한 것은 농민 운동을 포함한 사회운동 단체들이었고 ‘농민의 길’도 유럽 등의 선진국 운동단체들과 연대한 것이 효율적인 전략이었다고 생각된다.

    현재 전 세계 56개 국가들로부터 많은 운동단체들이 참여하고 있고, 이들이 다루는 의제들은 ‘식량 주권, 농업개혁, 신용 및 외채문제, 농촌 여성의 참여, 농촌 발전’ 이외에 다른 사회단체들(예를 들어, 브라질의 MST- ‘토지 없는 사람들의 운동’)과 연대 전략의 마련 등 다양하다

    특히 ‘식량 주권’ 문제에 있어 ‘농민의 길’은 농산물의 생산자와 소비자를 균형 있게 배려하는 가격 보장을 목적으로 농산물 시장 통제를 위한 국제사무국의 창설을 건의하고 있다. 또한 ‘소농의 보호와 물, 토지, 종자 및 신용에 대한 공정한 접근’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 단체는 단순히 농민운동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보다 폭넓은 사회운동의 다양성을 포용하는 다문화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농민 이외에 중소 규모의 농업 생산자, 농촌 여성, 원주민 공동체, 땅 없는 사람들, 농촌 청년들, 이주 농업 노동자들을 모두 아우르고 있기 때문이다.

    ‘남미 생태농업대학’(Instituto Agroecologico Latinoamericano ‘Paulo Freire’)은 ‘농민의 길’이 베네수엘라 정부와 연대하여 중남미 전체를 향해 ‘열린’ 대학의 성격으로 만들었으며, 베네수엘라 바리나스 주에 2006년 10월 개교하였다. 이 학교는 ‘농민의 길’만이 아니라 그 동안 축적된 중남미 농민 운동의 모든 역량이 모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남미는 유럽의 대안?

    올가 도메네에 의하면, 개교 시 약 100명의 학생들로 시작되었는데 주로 농민, 원주민, 흑인 자녀들을 농민 운동 단체들과 상호 연대하는 전략으로 선발하였고, 생태농업의 학부 과정으로 현재는 275명이라고 하며, 그 절반은 여성이라고 한다. 단지 생태 농업기술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인문학 과정을 병행한다고 한다. 학교 이름에 브라질 민중교육의 선구자인 빠울로 프레이리의 이름이 들어가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런 구체적인 남미의 대안적 정책 실현을 보고 있으면 왠지 남미가 가지는 독특한 문화 또는 철학의 힘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사실 근대초기 유럽의 남미 정복 시 유럽인들은 남미에 대해 새로운 세계의 ‘유토피아’를 투영했었다. 현재의 신자유주의 체제의 위기에 대한 대응에서도 남미는 유럽의 대안으로 ‘새로운 유토피아’의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다국적 농업기업들에 의한 유전자 조작 농산물 경작, 지나친 화학비료 투입 등의 여러 문제가 일어나는 것에 대해 ‘지속 가능한 내발적 발전’을 통해 ‘식량주권’을 구체화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특히, 유전자 조작 문제는 최근 농산물을 통한 연료 개발 즉, ‘바이오 에너지’ 이용 작물 때문에 더욱 커질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실비아 리베이로에 의하면, 다국적기업들이 멕시코에 유전자 조작 옥수수를 재배할 것이 요구하고 있으나 멕시코 사회의 반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중남미의 해묵은 과제 중의 하나는 토지개혁이다. 마르꼬스 로이뜨만에 의하면, 중남미의 권력은 땅에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대토지 소유자들’(Terratenientes)들이 그 권력을 농민들을 통제하는 데 이용하여 왔으며 중남미에서 최초의 사용자 단체는 농업단체였다고 한다. 그러나 단지 대지주들만이 아니라 정치, 경제적으로 엄청난 기득권을 이들 세력을 남미에서는 ‘과두제’(Oligarquia)라고 부른다.

    중남미에서 권력은 땅에서 나온다

    중남미 나라들 중 국민 경제 규모와 미래 잠재력에 있어 우리보다 큰 나라는 브라질뿐이다. 최근 IMF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국내 총생산 규모가 세계 13위이고 멕시코가 14위인데 브라질은 10위를 차지하고 있다.

    왜 브라질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는가 하면, 멕시코는 외화 수입 1위가 석유수출 수입이고 2위가 목숨 걸고 미국 국경을 넘어가 불법 체류하며 일해서 보내주는 송금수입이며 그 다음에는 미국, 일본, 우리 나라 등의 자동차, 전자 제품 조립 생산과 수출로 벌어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 14위라는 통계가 과대평가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중남미는 오래 전부터 식민 종주국인 스페인이 심어준 정치, 경제 체제와 지배계급의 문화인 보수적 가톨릭의 영향으로 대토지를 소유한 지방토호들이 있어 왔다. 이들을 스페인어로 ‘까시께’(Cacique)라고 부르는데 원래 이 단어는 카리브 지역 섬들의 족장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이 비유적으로 쓰이면서 경제적인 데 머물지 않고 사회적, 정치적 힘을 막강하게 가지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을 지칭하게 되었다. 그렇게 된 데는 지배계급의 정치행태가 자기네 그룹 내의 부정부패의 폐쇄적 회로(전문용어로 Clientelismo)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영향권 하에 있는 지역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온정과 시혜를 베풀면서 가부장적 존경까지 받게 된다.

    농민, 원주민, 생태 운동 단체들의 적극적인 활동에 강한 거부감을 보이는 것이 소수의 대토지 소유자들 즉, 지방토호들 이라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들 중 일부는 배후에서 ‘사병’ (paramilitares. 민병대로 번역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을 시켜 농민, 원주민을 암살하는 일도 서슴치 않는다. 우리로서는 상상이 안 가는 폭력과 희생의 역사가 중남미에서는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다.

    한편, 중남미에서 19세기를 거치면서 군인 출신으로 카리스마를 가진 최고 권력자와 그 권력을 뺏으려는 독재 정치인들을 ‘까우디요’(Caudillo)라고 부른다. 이들은 대부분 쿠테타를 일으키면서 권력을 잡는다.

    예를 들어, 스페인의 독재자였던 프랑코 장군이 바로 까우디요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은 일반 대중들의 숭배를 받는 특징이 있다.

    그 배경에는 민주적 정치과정의 행위자로 작동할 시민사회의 힘의 부재가 존재했다. 이와 같은 정치, 경제 체제의 특징은 소수의 특권층과 다수의 가난한 사람들로 극단적인 경제적 불평등을 만들어 낸다.

    마르꼬스 로이뜨만에 의하면, 브라질은 상기 대토지 소유제의 근간이 흔들리지 않고 있다고 한다. 전임 엔리께 까르도주 대통령에 이어 룰라 정부도 현상유지적 정책을 펴고 있어서 예를 들어 토지 없는 농민들에게 농지를 분배하는 최근 정책도 국유지를 이용한 것이지 대토지 소유자의 토지는 건드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오랜 구조에 실제로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 앞에서 언급한 1990년대부터다. 중남미에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이 1980년대이고 그 절정에 이른 것이 90년대인데 바로 이때부터 그 대안적 비젼과 체제 변혁을 위해 시민사회, 대중사회의 힘과 여기에 덧붙여 농민, 원주민, 생태운동 세력의 힘이 중요하게 작동하였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특히 볼리비아가 주목된다.

    마지막으로 고 권정생 선생님의 영정에 두 손을 모은다. 저성장의 철학과 생태적 가치관을 실제 삶으로 사신 분이라고 본다. 권 선생님은 우리나라의 간디와 같은 분이다. 쿠바 독립의 아버지인 시인 호세 마르티가 이야기한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평민이 지도자’란 말이 가슴에 와 닿게 하는 분이다.

    그러나 감수성이 풍부한 일부 사람들을 제외하고 그 분의 삶에 대해 숙고하는 사람들이 적은 것 같아 안타깝다. 그 분의 삶이 주는 각성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무엇보다 지금 시대는 지식인들이 세계를 해석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고 살 것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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