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죽을 '지상의 방 한칸'을 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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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6월 02일 08:4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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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최근 들어 집을 한 번 지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꽤나 강렬하게 갖게 됐다. ‘지상의 방 한 칸‘을 쫓아 유목(遊牧)하며 살기보다는 이 지구에서의 삶에 하나의 온전한 둥지를 만들고 갖고 또 누리고 싶다는 욕망이 아닐까 나는 홀로 생각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세속의 꿈속에는 지상과 지하, 소박과 풍요, 은둔과 활력, 소음과 화음, 성장과 죽음이 늘 아름답고도 당연하게 공존한다. 하기야 그 누군들 집에 대해 그렇지 않겠는가! 그 누구나의 집에 대해 스위스 태생의 에세이스트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이 말한다.

    “어떤 장소의 전망이 우리의 전망과 부합되고 또 그것을 정당화해 준다면, 우리는 그곳을 ‘집’이라는 말로 부르곤 한다. 꼭 우리가 영구히 거주하거나 우리 옷을 보관해주어야 집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아니다. 어떤 건물과 관련하여 집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단지 그것이 우리가 귀중하게 여기는 내적인 노래와 조화를 이룬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방식일 뿐이다. 집은 공항이나 도서관일 수도 있고, 정원이나 도로변 식당일 수도 있다.”(p.111)

    알랭 드 보통의 말을 좀 더 확대하면, 모든 집은 집인 동시에 집이 아닐 수도 있다. 집은 누구에게나 빈틈없이 동일하게 인정되는 객관적 공간이 아니다. 가령 아파트, 빌라, 단독주택, 다세대 등은 집에 대한 이름이 아니다. 집은 또한 아라비아 숫자가 포함된 행정구역의 이름도 아니다.

    집은 자아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유지하며 조화를 이루는 그 어떤 특별한 환경일 뿐이다. 나의 집은 너에게 황무지이고, 너의 황무지는 나에게 원앙금침이다. 그렇다면 그런 집을 욕망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 것일까?

    “건축에 나서고 싶은 가장 진정한 충동은 소통과 기념을 향한 갈망과 연결되어 있는 듯하다. 말과는 다른 기록을 통하여, 사물, 색채, 벽돌의 언어를 통하여 세상에 우리 자신을 밝히고 싶은 갈망.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누구인지 알리고 싶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 자신에게도 일깨우고 싶은 야망.”(p.132)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고 말했던 것은 하이데거였던가? 보통은 그 하이데거를 조금 비틀거나 혹은 흉내내 집을 존재의 언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의 질문. 지금 집이 없는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어떻게 꿈꾸어야만 하는가?

    아쉽게도 보통은 그렇게 밑으로까지 내려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행복의 건축』은 ‘은밀한 부르주아의 매력’으로 가득 찬 나머지 노동으로 집을 세우려는 ‘야생의 생각’은 결코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가 편력하고 여행했다고 하더라도 저자로서 그는 집에서 생각하고 기록한 ‘집의 아이’일 뿐이다.

    만약 알랭 드 보통의 글이 조금 느끼하게 여겨진다면, 그나마 길 위에서 읽을 수 있는 집에 대한 책을 더불어 소개하고자 한다. “서울에서 제주까지, 딸의 손잡고 인문학 교육에 나선 건축평론가의 여행기록!”이라는 카피가 붙은 『딸과 함께 떠나는 건축여행』(이용재 지음, 멘토)이라는 책이다.

    보통의 스타일과는 전혀 딴판이다. 책 날개에 수록된 그의 약력도 가관(?)이다. 건축전문 출판사를 차렸다가 망했고, 감옥에 갔다오기도 했고, 지금은 택시운전을 하고 있다고 한다. 세 번째 책을 엮어내는 그의 글쓰기 역시 만만치 않다. 책에 수록된 <절두산순교성지> 편의 한 대목.

    “새남터에 얽힌 역사는 눈물겹습니다.…중략…수렴청정이 시작됩니다. “딸아, 수렴청정 알지요?” “말의 먹이. 당근.” “정조의 부인이자 순조의 어미인 효의황후가 살아있지만…중략…권력다툼이 종교탄압으로 이어진 겁니다.” “진짜 무서운 할머니네. 완전 현대판 엽기극이잖아요.” “허걱, 명쾌한 정리입니다!”(p.22)

    지나치게 연출되고 과도하게 표현된 것은 못마땅하지만, 보통의 느끼함을 상쇄해 주는 측면이 없지 않다. 집에는 개인이 있고 또 집단이 있다. 공동체의 기억을 영구화하기 위해 큰 집을 세우고 그 큰 집을 세운 개인들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보통의 글을 읽든 이용재의 글을 읽든 집에 대한 나와 당신의 욕망은 여전하리라. 태어난 집을 선택할 수는 없을지언정 내가 죽을 ‘지상의 방 한 칸’은 선택할 수 있어야하지 않겠는가. 그 선택이야말로 자신의 육신과 영혼을 위해 최후의 배려이지 않은가. 세상이여 부디 그 배려를 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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