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영원한 구세대다”
        2007년 06월 01일 03:5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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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소개를 할 때 글쓴이에 대해 잘 알 필요는 없다. 가수는 노래로 말한다는 시쳇말처럼 출판되어 서가에 꽂힌 책이 있다면 그 책을 읽으면 될 것이지, 인간 탐구의 호사까지 부려 완벽을 기할 필요는 없다. 그래도 언제나 찜찜한 것은 책 좋다고 소개했는데, 그 필자가 영 아니라는 세평을 듣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노파심 때문이다.

    그런데 『철들지 않는다는 것(철수와 영희)』을 쓴 하종강을 모른다. 나는 ‘정치’니 ‘정책’이니 하는 일에서 벗어나질 못했는데, 하종강은 ‘노동상담’으로 30년을 살았다. ‘노동상담’으로 유명했던 장명국이나 이목희나 김승호, 박석운과는 일면식이라도 있지만, 하종강은 그들처럼 노동과 정치를 넘나들었던 적도 없는 것 같다.

    믿을만한 두 사람에게 물었다. <레디앙> 이광호 편집국장과 노회찬 의원은 “그 사람 진짜”라고 말했다. 믿을만한 사람들 얘기니 믿어도 되겠다.

       
      ▲ 『철들지 않는다는 것』하종강, (철수와 영희)  
     

    “연애를 하는 9년 동안, 그리고 결혼한 뒤에도 몇 년 세월 동안 내가 하는 일을 안해에게 말하지 못했다. 새벽에 나가 한 밤중에 들어오는 나에게 안해도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굳이 묻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나갔다가 며칠 만에 들어와도 안해는 ‘그동안 누구를 만났느냐?’고 따져 묻지 않았다. 영화에 나오는 무슨 첩보기관의 요원도 아니면서, 도적놈은 더더욱 아니면서도 80년대에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다.”

    이제는 말해도 되는 시절이어서인지 하종강은 2001년부터 자신의 홈페이지(www.hadream.com)에 ‘중년일기’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일상을 기록했고, 그걸 묶은 게 바로 『철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종강은 ‘철들지 않는다는 것’을 이렇게 생각한다.

    “그렇게 살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철들지 않는다’는 것은 그 시절을 완전히 잊어버리지는 못한다는 뜻이다. ‘평범한 소시민의 소중한 정서만큼 귀한 것도 없다’고 스스로 합리화하며 살아가는 지금도 그 시대를 겪어 본 중년의 사내에게는 언제나 뒤통수를 잡아끄는, 도저히 떨칠 수 없는 생각들이 있다.”

    1997년 국민승리21을 만들 때 민주노동당 당원번호 1번 최철호는 “우리는 1987년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약해질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 말은 1987년에서 비롯된 대세나 흐름을 놓치지 말고 진보정당을 창당해야 한다는 판단이었는데, 최철호를 비롯한 민주노동당의 기획자들은 다른 한 편으로 1987년과 절연해야만 민주노동당이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80년대는 시대라기보다는 마음이었다. 마음이다.

    하종강 역시 ‘떨칠 수 없는 생각들’로 그 시대를 뒤돌아 보고, 철들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교양과 정서가 철철 넘치는 뭇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계절이 그렇게 바뀌면 배고픈 사람들이 따뜻한 밥 한 그릇이라도 더 먹을 수 있다는 것인가, 이 땅의 고통 받는 이웃들이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진다는 것인가, 나는 모르겠다. 그러니까 나는 영원한 구세대다.”

    “너, 과거의 그 일을 꼭 ‘표피적’이라고 표현해야 되겠어? 현대자동차에서, 명동성당에서 사람들은 80년대와 똑같이 머리를 깎고, 천막을 치고, 농성을 하고 있는데. 너한테는 그게 이미 ‘표피적’인 일이란 말이지 …… 세계관이 바뀐 것 가지고 내가 뭐라고 하지는 않겠어. 나는 그 세계관도 존중하니까. 그러나 어휘를 좀 신경 써서 선택해야 할 거 아냐. 그래, 너 표피적인 일을 떠나서 본질적인 문제에 많이 천착해라, 인마.”

    하지만 이 책이 하종강의 ‘전공’인 ‘노동법’ 같은 걸 다루는 것은 아니니, 지레 겁먹지 않아도 된다. 설마 ‘중년일기’에 그런 얘기만 있겠는가? 어떤 중년이 그렇게만 살 수 있겠는가?

    “노동문제와 관련된 일을 직업으로 선택한 사람들에게는 평범한 소시민의 소중한 ‘꿈’조차 없을 거라고 지레짐작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절대로, 정말 ‘절대로’ 그렇지 않다. 아끼는 후배가 어느날 문득 여성으로 다가서는 느낌조차 겪어보지 못했다면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거나 아니면 목석이라는 뜻이다. 굳이 ‘노동’을 들이대지 않더라도 사람들에게 다가설 수 있는 소중한 ‘꿈’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

    여자 후배 얘기가 눈에 확 들어와 책을 뒤적여 보아도 찾을 수 없다. 아직 다 훑어보지 못했지만, 낚인 게 아닌가 싶다. ‘하종강의 중년일기’라는 부제는 ‘아직도 다 말하지는 못하는 보통 중년일기’로 바꿔도 될 듯 하다.

    언제나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의 깊이는 시간의 누적에 따른다 한다. ‘노동상담’ 30년 한, 지겹지만 감격스러울 중늙은이의 일상을 훔쳐보는 것도 재밌을 거 같다.

    “술 다 깨셨습니까?”
    노동자들이 ‘예!’라고 큰 소리로 답했다.
    한 노동자가 손을 번쩍 들더니 말한다.
    “강사님 질문 있습니다.”
    “강의 시작도 안 했는데, 무슨 질문을…….”
    “노조 간부가 수련회에 와서 밤새 이야기하면서 술을 마셨으면 이것은 야간근로를 한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오늘은 비번으로 놀아야 한다고 생각되는데, 전문가적 입장에서 하 선생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아, 이거 또 처음부터 강사에게 완전히 엿을 먹이는구나.’
    나는 적당히 얼버무리는 수밖에 없었다.
    “어서 빨리 노동자가 주인 되는 ‘노동 해방 세상’을 만들어서 그렇게 되도록 합시다.”

                                                                * * *

    하종강 : 한울노동문제연구소 소장, <한겨레> 객원논설위원, 한국노동교육원 객원교수.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 『노동자는 못 말려』, 『항상 가슴 떨리는 처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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