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 고대사회를 뒤바꾼 평등 이데올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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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6월 01일 12:2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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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들은 말 중에서 제일 멋진 말은 유마힐(維摩詰)의 “중생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는 한 마디였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르고 보니 “병까지도 중생 핑계를 대는 웃기는 사람이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대승 불교의 경전이 대개 철학소설이라 유마힐이라는 인물도 역시 허구의 주인공이니 그럴 수도 있으리.

    부처님의 지시로 문병을 온 문수보살에게 유마힐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중생이 아프니 나도 아픕니다. 중생의 병이 없어지면 내 병도 없어질 것입니다. 보살은 중생을 위해 생사에 들고 생사가 있으면 병이 있게 마련입니다. 보살의 병은 대비심(大悲心)에서 생깁니다.” 엄청난 보살(菩薩)의 사명감이 젊은이들을 매혹시킨다.

    ‘나의 삶’에 특별한 의미가 있어야만 했던 10대 소년에게 ‘보살’이란 말은 매력적이었다. 물론 20대 이후에 보살은 ‘혁명가’로 바뀌었지만, 35년 불효(不孝)의 근원인 잘못된 자아(自我) 개념은 불교로부터 비롯되었다. 중학 2학년 때 읽은 부처님 전기로부터 사상 편력은 시작되었으니 불교는 나에게 또 다른 마음의 고향이다.

    중생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

    그토록 선망하던 출가(出家)도 못하고 가출도 아니 했던 10대 소년은 이제 아버지의 지나친 사명감을 물러 받지 않은 아들들에게 감사하는 50대가 되어 또 다른 마음의 고향, 불교를 찾아 경북으로 갔다. 참외로 유명한 성주부터 갔다. 성산가야의 고분이 120여 개나 있었다. 커다란 고분들을 보면서 평소의 궁금증이 되살아났다.

    나주, 고흥, 함안, 창녕, 대구 불로동 등 전국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고대 국가 귀족의 무덤은 왜 그 이후의 중세 왕들의 무덤보다 더 크고 많은가? 그 작은 고대 국가들의 기술과 생산력이 그토록 대단했을까? 나의 추리로는 이름도 정확하게 전해지지 않는 고대 소국가들은 너무나 비인간적이고 비합리적인 정복 국가들이었다.

    철제 무기를 가진 외래 종족들이 쳐들어와서 원주민을 정복하여 백성으로 삼고 저항하는 자는 노예로 삼은 철기 문명의 비극적 결과가 고대 국가들이었다. 그래서 무덤들이 그토록 ‘비합리적으로’ 큰 것이다. 무덤은 실제 생활의 반영이고 유일한 흔적으로 남아 극심한 불평등의 나라, 고대 소국들의 참담한 현실을 증언하고 있다.

    수만리 서역에서 들어온 불교는 새로운 사상, 제도, 문화를 몰고 온 평등주의 이데올로기였다. 그것은 오로지 힘이 지배하던 고대 사회를 변화시켰다. 고구려, 백제가 불교를 받아들여 당대의 현대 국가를 먼저 만들어 주변 고대 소국들을 흡수하고 강대국이 되었다. 그리고 신라도 그 길을 따라, 한 걸음 더 나아가 통일을 주도했다.

       
      ▲ 상주 경천대에서 바라본 낙동강 중상류  
     

    1,600년 전 불교는 서양으로부터 온 외래 사상이었다

    불교는 비인간적인 노예 노동에 근거한 고대 소국들을 무너뜨린 위험한 평등사상이었다. 반면 불교는 고구려, 백제, 신라로 하여금 고대 소국으로부터 벗어나 나라다운 나라가 되게 한 진보사상이었다. 그러나 그런 진보 사상이 이 땅에 뿌리를 내리는 과정이 순조롭지는 않았다. 그것은 문화적 풍토가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인도는 서역이다. 서쪽으로 수만리, 인도까지 가자면 몇 년이 걸리고 목숨을 걸어야 했다. 인도 유럽인들의 세계관은 우리 민족의 지배적 뿌리인 몽골족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여러 민족들의 세계관과 너무나 달랐다. 불교는 완전히 다른 문화적 풍토와 세계관, 사고방식에 근거하고 있었다. 그것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사상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불교는 이 땅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는가? 오랜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지난 경험으로 진보 정당이 이 땅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걸 안다. 문화적 풍토가 다르기 때문이다. 장미를 자갈밭에 옮겨놓고 뿌리를 내리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1천 5,6백 년 전 불교의 처지가 바로 그러했다.

    신라 최초의 절이라는 선산 도리사(桃李寺)를 찾았지만 아무런 단서도 발견하지 못했다. 거대한 불당과 아도화상(阿度和尙)의 동상은 돈 냄새만 풍기고 있었다. 내 친구 경남대학교 최유진 교수는 차라리 동네 절의 산신각을 찾아보라고 한다. 자연숭배나 샤머니즘과 타협, 포용하는 전략이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차돈의 순교는 정치적 사건, 즉 순국(殉國)이었다.

    신라는 후진국이고 소국이었다. 그런데 신라가 통일을 주도했다. 그것은 신라가 가장 늦지만 가장 현대적인 나라를 만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불교는 그 현대적인 나라의 통치 이데올로기였다. 이차돈은 바로 불교를 신라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만들자고 주장한 사람이었다. 이차돈의 지위는 낮았지만 관리였고 왕의 측근이었다.

    불행하게도 그는 소신이 너무 뚜렷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순교자가 되었다. 22세인지 26세인지 모르지만 20대의 이차돈은 나라를 위해 즐거이 목숨을 바치고자 했다. 나도 그 나이에 그랬기 때문에 그 기분을 잘 안다. 보수 기득권 세력이 장악한 조국의 현실에 대해 “이대로는 안 된다”고 강하게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목을 베자 머리는 날아가 경주 소금강산에 떨어지고 목에서는 흰 피가 수십 장(丈)이나 솟아올랐으며, 갑자기 캄캄해진 하늘에서는 아름다운 꽃송이가 떨어지고 땅이 크게 진동했다.” ‘흰 피’는 연꽃의 꽃대에서 나오는 액체를 상징한다. 그가 죽자 기적은 과연 일어났다. 진보적 평등주의 사상이 국가 통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진정한 기적은 전혀 다른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불교가 신라 사람들에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리고 그 전에 일어난 작은 기적은 멀쩡한 사람이 자신의 주의, 주장, 사상, 이념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었다. 신라 사람들의 눈에는 이상하고 신기한 일이었으며,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일이었다.

       
      ▲ 이차돈 순교비 (경주박물관)
     

    어디나 이차돈이 필요하다.

    이차돈(異次頓)은 527년에 순교하였다. 신라는 비로소 진보적 평등주의 통치 이데올로기를 갖춘 현대적 국가가 되었고 통일을 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었다. 이차돈 순교비는 818년에 세워졌다. 정말 현대적인 감각의 조각품이고 예술품이다. 순교 후 290년이 지나서 세워졌으니 흰 피의 전설이 만들어지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사람들의 오래된 생각을 바꾸는 데는 이차돈이 종종 필요하다. 이차돈처럼 목숨까지 내놓지는 않더라도 크고 작은 희생을 감수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구미 동락 공원에 추모의 숲을 남긴 최양진, 박동국, 나의 두 동지도 그런 순교자에 속한다. 또 다른 순교자 박정희의 생가에 갔더니 갑자기 막걸리가 마시고 싶어졌다.

    5월 21일 저녁 민주노동당 경북도당 위원장 최근성은 사이버노동대학에서 주최하는 홍세화 강연회에 있었다. 덕분에 홍세화 선생의 좋은 강연도 듣고 여러 동지들과 유럽식 막걸리, 맥주를 많이도 마셨다. 다음날 아침 구미역에서 ‘내 一生 祖國과 民族을 爲하여 1974.5.20 朴正熙’라는 글귀를 보았다. 또 다시 목이 타올랐다.

    ‘부처님 오신 날’ 경주에서 좋은 말을 들었다. “부처님은 중생을 구제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중생이 이미 구제되어 있음을 가르치기 위해 오셨다.” 성철 스님의 말이라고 한다. 구제의 대상인 중생과 구제의 주체인 보살의 구분을 넘어서려는 뜻도 담겼을까? 원효의 생각 역시 보살과 중생의 구분을 넘어선 어딘가에 있지 않았을까?

       
      ▲ 경주자활후견기관 제 6 농장
     

    법륜과 정토회, 그리고 ‘좋은 벗들’

    불교 관련 언론사 기자들과 시민단체 활동가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불교 지도자로 지목된 법륜 스님을 나는 아직 만나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야기는 민주노동당 울산시당의 전위원장 정창윤에게서 많이 들었다. 법륜이 이끄는 정토회에서 운영하는 정토수련원이 문경에 있다는데 이번에도 가 보지 못했다.

    그러나 ‘좋은 벗들’은 인터넷 홈페이지를 여러 차례 방문해보았고 정말 깊이 감사하고 있다. 믿을 수 있는 단체가 전하는 구체적 북한 소식이 우리에겐 정말 소중하다. 법륜 스님의 고향도 경주라고 하던데 과연 경주 남산 아래는 교도소까지도 아름답게 보였다. 신경준이 관장으로 일하는 자활후견기관 농장은 특히 아름다웠다.

    80년대 말 서울지하철 노동조합 홍보부장을 하던 신경준은 고향에서 여러 좋은 일을 하다가 지금은 경주자활후견기관을 운영하여 10개의 농장에서 허브 기르기나 야생화 기르기, 유기농 채소농사 등을 통해서 실업자 150명의 자활을 지원하고 있다. 경주 남산 아래 제 6 농장은 이름이 ‘남산생태마을’이다. 신경준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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