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1 총선, 안철수 그리고 시대정신
    [탐구, 진보21] 과거와 미래 대표 세력들의 정치투쟁 서막 오르다
        2012년 05월 03일 07:3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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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업화에서 민주화로, 그 다음은?

    보통 한국의 현대사를 산업화시대와 민주화시대로 가르곤 한다. 전자를 대표하는 세력은 박정희-이병철-정주영 등이다. 이들은 수출 중심의 공업화로 한국 경제의 기틀을 마련했다. 90년대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를 맞아 수출 중심 공업화 노선을 확대발전시킨 인물이 이건희와 정몽구 등이다. 정치적으로는 대체로 이명박이나 정몽준이 이들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겠다.

    70년대 유신독재가 시작되면서 고난의 찬 민주화 운동도 시작되었다. 70년대 민주화 투쟁을 주도했던 상징적인 인물은 김대중과 김영삼이었다. 김대중은 박정희의 수출중심 공업화 노선에 맞서 중소기업, 내수 중심의 내포적 공업화 노선을 제기했다. 김대중의 내포적 공업화 노선은 역사적 검증을 받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87년 6월 항쟁은 수출 중심의 공업화 노선이 한국사회에 착근한 조건에서 주로 정치적 민주화를 둘러싸고 경합이 벌어졌다. 87년 6월 항쟁의 주역이었던 양김씨가 분열하면서 민주화는 지루하고 고단한 여정을 거치며 느리고 고통스럽게 진행되었다. 87년 6월 항쟁의 완성은 2002년 노무현 후보의 당선과 03~04년 탄핵과 대통령 복귀 과정을 거치며 최종 마무리되었다.

    한국에서 민주화를 둘러 싼 경합이 지루하게 지속되면서 내포적 공업화 노선을 대체할만한 진보적 경제패러다임의 출현이 지연되었다. 이로 인해 90년대 경제 담론은 기존의 수출 중심의 공업화 노선을 확대 계승한 이건희와 정몽구가 주도했다.

    트리클 다운 효과 붕괴와 보수의 한계 

    02~04년의 정치적 격전을 치르고 민주화 진영이 승리했지만 이들은 내포적 공업화 노선을 뛰어 넘는 진보적 경제패러다임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민주화의 여진이 너무 오래 지속되면서 돌이키기 어려울 정도로 대자본이 주도하는 경제 질서에 편입되어 버렸다.

    노무현 정부가 탄핵과 복귀로 이어지는 정치적 격변과 달리 경제적인 측면에서 대자본과 신자유주의에 포섭된 이유는 그들이 지닌 시대적 한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노무현과 386의 視界(시계)는 여전히 민주화에 머물러 있었다. 그들은 내포적 공업화의 현대적 버전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07년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고 문국현 후보가 나름대로 선전한 것은 한국의 시대정신이 산업화-민주화에서 새로운 경제패러다임으로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08년 이후 이명박 정부의 역주행이 시작되면서 민주화가 다시금 정치적 쟁점으로 부상했다. 이로 인해 07년 대선에서 정치적으로 탄핵되었던 친노, 386 등이 재기할 수 있었다. 정치적 역주행보다 중요하고 근본적이었던 것은 한국의 주류 세력이 갖고 있었던 오랜 신념, 트리클 다운 효과가 붕괴된 것이다.

    한국의 주류가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민주주의의 희생, 경제정의가 후퇴하더라도 경제성장만 되면 그 과실의 일부가 서민 대중에게도 전파될 수 있다는 트리클 다운 효과 때문이었다. 그러나 08년 이후 이것이 붕괴되면서 이명박 정부는 근본적인 한계에 봉착했다.

    안철수, 삼성에 일격을 던지다

    08~10년 한국은 복잡하고 다양한 갈등이 착종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역주행은 주변적 의제로 전락한 민주-독재의 구도를 재현했다. 남북관계의 악화도 비슷한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긴 역사적 안목에서 보면 이들 의제는 주변적인 의제였다. 본질적이었던 것은 05년 이후 노무현 정권의 몰락을 가져온 신자유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이었다.

    08~10년 MB-반MB 전선이 격화되는 와중에 또 하나의 의미 있는 전선이 벌어지고 있었다. 07년 1월 스티브 잡스가 출시한 아이폰 열풍이 몰고 온 스마트 혁명이었다. 스마트폰 혁명은 단번에 두 가지 쟁점을 한국사회의 주된 의제로 끌어 올렸다. 하나는 한국 IT 산업의 미래, 다른 하나는 SNS의 위력이었다.

    전자를 대표했던 것은 삼성이었다.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로 은퇴했던 이건희 회장이 전격 복귀했고 정부의 대응도 빨라졌다. 이들은 오랜 한국경제의 익숙한 패러다임을 다시 꺼내 들었다. 제왕적 리더의 대규모 투자와 캐치업 전략…….

    천문학적인 투자로 상황에 대처하려는 삼성에 경제구조의 문제를 제기하며 일격을 던진 사람이 안철수이다. 안철수는 애플과 삼성의 구도는 단순히 투자를 많이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정신의 차이에 있다며 양자의 차이를 수직형 효율화 모델과 수평적 네트워크 모델로 집약했다. 안철수의 진단이 옳든 그르든 안철수는 스마트 혁명에 대한 나름의 경제관을 제출했다.

    스마트 혁명과 청년 세대의 파장

    스마트 혁명이 몰고 온 또 하나의 파장은 청년이었다. 2010~11년 한국 정치를 갈랐던 핵심 변수는 세대였고 이 세대를 갈랐던 결정적인 차이 중 하나는 스마트 혁명에 대한 수용 차이였다.

    박근혜가 이명박과 거리를 두고 한국적 복지를 내세우며 전선의 성격을 흐린 조건에서 4.11 총선의 성격이 다분히 문화적인 양상을 띤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4.11에서 벌어진 문화적 갈등은 단순한 문화가 아니다. 그것은 각기 과거와 미래를 대표하는 정치투쟁의 서막이다.

    이렇게 보면 4.11 총선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MB-반MB는 주변 전선이었다. 4.11 총선에서 민주통합당의 좌절은 주변적 의제에 집중했던 정치세력의 위기이다. 둘째. 2011년 10.26을 정점으로 안철수로 대표되는 새로운 시대의 맹아가 드러났다. 핵심 키워드는 청년, 수평적 관계, 첨단 산업 등이다. 셋째. 2011년에 대한 정치적 반동이 4.11에서의 새누리당의 과반 의석이다. 4.11에서 새누리당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박정희식의 성장 모델과 중고령층의 반발이다. 이는 안철수로 대표되는 새로운 시대정신과 정면에서 대비된다는 점에서 대단히 복고적인 경향이다.

    필자소개
    전 범민련 사무처장이었고, 현재는 의견공동체 ‘대안과 미래’의 대표를 맡고 있으며, 서울 금천지역에서 ‘교육생협’을 지향하면서 청소년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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