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레논을 이렇게 밖에 생각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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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5월 26일 07:1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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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장에 넘쳐나는 것은 소설이요 그 소설의 태반은 ‘메이드 인 재팬’이다. 소설 그 중에서도 특히 일본소설을 의도적으로 멀리하고 있지만 그만 제목에 이끌려 또다시 한 권의 소설을 충동적으로 접어든다. 『존 레논을 믿지 마라』가 바로 그 것.

    존 레논John Lennon? ‘비틀스’의 바로 그 존 레논? 맞다. ‘Imagine’의 존 레논? 맞다. 그 존 레논이다. 그런데 그를 믿지 말자고? 도대체 지금 무슨 곡절 혹은 무슨 사기행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소설의 원제가 맞나? 판권을 살펴보지만 일본어를 모르니 거기까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원제에도-John Lennon Wo Shinjiruna-존 레논은 분명히 등장한다. 그렇다면 그 활자活字-活者가 아니다!-의 존 레논만을 믿고 가보자! 또 책 뒷날개에 작가 가타야마 교이치의 다른 두 작품이 소개되고 있는 것을 보니 우리 시장에서 제법 장사가 되는 편인 듯도 싶다. 어쨌든 샀으니, 본전은 뽑아보자

       
     
     

    『존 레논을 믿지 마라』는 스무 살 중반의 젊은 청년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 방황하다 이윽고 진정한 자기자신을 긍정하게 된다는 이른바 교양소설적인 면모를 보이는 작품이다. 좀 고상하게 들렸다면, 이렇게 말해보자.

    젊은 청춘이 여자 친구에게 채여 눈물과 콧물을 짜는, 청춘 로맨스물 언저리에 있는 그렇고 그런 드라마라는 소리이기도 하다. 소설로서는 닳고 닳은 구조와 스토리를 지닌 작품인 셈이다. 그렇다면 무언가 더 있지 않을까? 존 레논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존 레논이 마크 채프먼에게 저격당해 죽은 1980년이다. 소설의 주인공이 여자 친구와 헤어진 바로 그때이기도 하다. 곧 작가는 그 때를 의도적으로 상실의 시간으로 설정하고 있는 셈이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소설의 주인공은 여자 친구도 잃고 아티스트도 잃었다. 사랑도 잃고 예술도 잃고, 따라서 영혼을 잃었다!

    그런데 이 주인공의 꿈속에 존 레논이 등장한다. 그 꿈속에서 존 레논은 “존 레논을 믿지 마라”라고 벽에다 스프레이로 낙서를 하고 있다. 작가는 이 존 레논과 주인공을 대화시킨다. 물론 그 둘의 관계는 동등하지 않다. 죽은 자와 산 자의 대화이고, 음악가와 감상자의 대화이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그 둘의 대화에서 정작 의도하는 것은 일종의 멘토mento로서의 존 레논이다. 그가 하는 말은 아픈 영혼을 달래는 치료의 언어인 동시에 삶의 화두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소설은 두 인물의 대화를 통해 밑줄 그을만한 많은 철학적 사색과 문장들을 심심찮게 쏟아내고 있기도 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 스승은 벽에다 이렇게 쓴다. “나는 여기에 있다”라고. 그렇게 소설은 존 레논의 두 발언 곧 3인칭 명령문과 1인칭 감탄문 사이에 놓여 있다. 타인에 대한 절대적 신뢰 곧 사랑도 소중하지만 개인의 철저한 긍정이 필요하다는 게 핵심 발언인 셈이다. 아래 인용은 각각 존 레논과 주인공의 말이다.

    “하지만 그런 오만한 생활은 끝이 났다오. 지금은 결코 그런 식으로는 말하지 않으니까. 지금의 나는 가령 내가 오늘 아침에 쾌변이었다는 것을 노래하오. 그리고 나의 쾌변은 인류의 쾌변이 아니오. 결국 그런 것이오.”(p.22)

    "잃은 것 따윈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것도 그 사람을 잃는 것도 또 내가 없어지는 것도. 오로지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사실 모두가 뭔가 커다란 존재를 향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 커다란 존재는 내 안에 있었다. 우리 하나하나는 자신 내부에 커다란 존재를 위한 장소를 가지고 있다.“(p.174~175)

    이 소설의 작가 가타야마 교이치는 1959년생이다. 그리고 그가 이 소설을 발표한 것은 1996년이다. 한국문학의 언어로 『존 레논을 믿지 마라』를 말한다면 조금 나이든 386이 쓴 후일담 범주의 소설이라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한국문학에서도 후일담은 아주 많은 비판을 받은 바 있기도 하지만 이 메이드 인 재팬 후일담을 접하니 얼굴빛이 더 노래진다.

    쓸데없이 흥분할 것 없이, 작가의 방식을 쫓아 말해보자. 존 레논을 말하고 음악을 말했으니 음악으로 말해보자. 소설 속에는 당시의 록음악, 좀 더 넓게는 팝음악에 대한 이야기들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샘 쿡과 이글스는 등장하지만, 재니스 조플린이나 레드 제플린은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일본에서의 실황공연을 음반으로 만들어 명반의 목록에 올라있는 딥 퍼플도 없다. 물론 내가 처음 듣는 아티스트들로 등장하지만, 짐작컨대, 작가의 성향이 록이나 하드록-내 짧은 음악지식으로 ‘하드록Hard Rock’이라는 용어는 일본에서 만들어졌다라고 알고 있다-쪽이라기보다는 보다 파퓰러한 쪽에 많이 기울어 있는 편이듯 싶다.

    그렇다면, 그런 음악으로 1980년 혹은 1980년대를 상실의 시기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강철을 아이스크림으로 대신할 수 있는 것인가? “밥 딜런이 옳았소. 지금은 담배보다 보리 배아를 찾는 시대니까. 곡물을 알갱이 채 먹고 똥을 잘 누자는 캐치프레이즈까지 걸고 대통령이 되는 시대니까.”(p.179) 존 레논의 이 말은 작가 자신에게 그 화살이 돌려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정말 존 레논을 이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는 거야?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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