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뺀질한' 사회주의자, 르네상스적 예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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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5월 19일 01:5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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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윌리엄 모리스는 사회주의자다.

    “사회주의자의 참된 임무는 노동자에게 그들이 사회의 주인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피압박 계급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인상지우도록 하는 것이다.…중략…지금 우리들 앞에 놓여 있는 과제는 사회주의자를 만드는 것, 지배 계급에 대해 적개심을 느끼며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당과 정치의 엄청난 어리석음을 어떤 유혹도 갖지 않는 사람들로 구성된 조직의 틀을 만드는 것이다.”(p.28)

    “형제들이여, 연대는 천국이고 연대의 결여는 지옥이다. 연대는 생명이고 연대의 결여는 죽음이다. 당신이 이 땅 위에서 하는 행동, 그 모든 것을 행하는 것은 연대를 위해서이다.”(p.205)

       
      ▲『윌리엄 모리스 평전』 박홍규 지음, 개마고원  
     

    그런데 이 사회주의자, 참으로 묘하다. 출신은 부르주아로 태어나서 부르주아로 죽은 탓에 부르주아가 아닌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고, 성분은 철들 무렵 이후부터 건축가 지망생, 화가 지망생, 시인, CEO 겸 디자이너, 고건축물 보호운동가, 출판인 등 예술적이지 않은 경우 역시 단 한 번도 없다.

    사회주의자가 그러면 안 되냐고? 물론 안 될 거야 없다. 하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사회주의자의 전형적인 초상과는 잘 어울리지 않아서 그렇다.

    윌리엄 모리스가 활동하던 시대인 19세기 말 영국의 상황이라면 파업과 투쟁, 투옥과 망명, 지하활동과 국제연대운동 등 세계사의 파란만장을 그야말로 온 몸에 문신 새긴 그 어떤 얼굴이 사회주의자로서 맞춤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좀 더 쉽고도 직접적인 예를 든다면 마르크스, 엥겔스와 동시대 인물로서 윌리엄 모리스는 너무 ‘뺀질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윌리엄 모리스(1834~1896)는 여러 분야에서 종종 호명되는 인물이다. 건축과 디자인에서는 현대 건축과 디자인의 아버지라고 불리기도 하며, 환경운동에서도 역시 비슷한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시인이었던 그는 옥스퍼드대학에서 시학교수 자리를 제안 받았으나 거절한 바도 있다. 또한 출판인으로서 윌리엄 모리스는 활자체 곧 타이포그라피의 중요성을 알고 그 아름다움을 실현한 선구적 인물이기도 하다.

    『윌리엄 모리스 평전』의 저자 박홍규는 이같은 르네상스적 활동의 바탕을 ‘사회주의’라고 명명한다.

    “왜냐하면 그의 디자인은 사상이자 혁명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예술과 사회주의 그리고 유토피아는 명실 공히 하나의 생활이었다. 따라서 그의 생활예술인 디자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생활혁명가이자 생활사회주의자인 그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건축과 디자인을 비롯한 모리스의 예술은 사회주의라고 하는 ‘삶의 본질에 대한 인간적 이해력’에 근거하기 때문이다.”(p.286)

       
      ▲ 윌리암 모리스 캐리커쳐  
     

    곧 윌리엄 모리스의 예술과 정치는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며, 그 까닭은 예술과 정치가 모두 당대의 삶에 대한 성찰과 그에 따른 실천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삶을 깊이 이해하면 예술과 정치도 무르익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박홍규는 더 나아가 윌리엄 모리스의 핵심을 “삶을 예술처럼, 세상을 예술처럼”(p.8)이라고 시적으로 표현한다.

    “모리스에게 예술이란 노동을 무용하게 만드는 산업화에 저항해 노동자가 자신의 참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저항의 원리였다. 즉, 예술이란 궁극적으로 노동의 즐거움을 표현하는 행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p.24)

    윌리엄 모리스로서는 지금 이곳의 대척점에 예술이 있다. 그 예술은 만인에 의한 만인의 즐거운 노동과 행복의 동의어인 셈이다. 여기를 넘어 그곳으로 가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회를 바꾸어야만 한다. 그 필요에 따라 사회주의 이념이 호출된다. 그 이념에 따라 윌리엄 모리스 특유의 유토피아가 모습을 드러낸다.

    물론 그 유포피아의 핵심은 예술, 곧 삶의 아름다움이다. "이처럼 삶의 아름다움이 확장되는 일련의 과정이 모리스의 사회주의가 확장되는 과정에 다름아니다"라고 나는, 박홍규를 좇아, 이해한다.

    나의 어설픈 눈에도 윌리엄 모리스의 한계들은 쉽게 발견된다. 가령 노동의 아름다움을 말하기 위해서는 유토피아가 필요한 게 아니라 보다 구체적이고도 현실적인 투쟁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곧 전술과 전략을 말해야 하는 자리에 윌리엄 모리스는 전술과 전략 이후의 승전도를 앞서 그렸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윌리엄 모리스는 충분히 낭만주의자이자 이상주의자였다. 윌리엄 모리스는 윌리엄 모리스의 노동, 물론 그것 자체도 훌륭한 것임에는 분명한, 노동을 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 덕택에 나는 윌리엄 모리스를 좇아 말할 수 있다.

    나에게는 나만의 아름다움이 있다. 따라서 나에게는 나만의 사회주의가 있다. 내가 아름다울 때 나는 옳으며, 그에 따라 세상이 달라진다고 나는 믿는다. 나는 그렇게 사회주의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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