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신이 뭔일 하는지 모르는 대통령
        2007년 05월 28일 08:1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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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학자와 역사학자가 만나 정치와 사회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한미FTA와 올해 대선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눴다. 민주화 그 후 20년 한국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한국사회의 바람직한 미래상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토론을 했다.

    정태인 성공회대 겸임교수와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의 대담은 4월 초파일(24일. 목요일) 프레스센터 18층에서 이광호 <레디앙> 편집국장 사회로 2시간 남짓 진행됐다. 앞으로 세 차례에 걸쳐 대담 내용을 싣는다. <편집자 주>

    이광호 두 사람은 알고 지내는 사이인가.

    정태인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박노자 참여연대 사무실에서 한 번 뵈었다. <한겨레21>에 실린 정 선생의 ‘멕시코 시리즈’는 잘 읽었다.

    <한겨레21> 강연 시리즈를 함께 했다.

    ‘멕시코 시리즈’는 아주 탐독했다. 나프타 이후 멕시코 자본주의는 과연 어떻게 되어 가는지 개인적으로 대단히 궁금했는데, 정 선생께서 쓰신 것 보고 ‘신예속’ ‘신종속’이라는 것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신자유주의 속의 ‘신종속’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87년 이후 20년이 지나가고 있다. ‘민주화 이후’라는 표현이 일반화되고 있다. 그 후 20년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과 평가가 날카롭게 대비되고 있는 것 같다. 최장집 교수의 경우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실패를 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는데 반해, 백낙청 교수 같은 분은 이 시기를 민주주의가 지속적으로 확장되는 과정으로 보고 있다.

    민주화 세력의 실패 논쟁이 여기서부터 촉발되는 것 같다. 최근 노무현 대통령은 민주화 세력이 실패했다면, 독재시대가 더 좋다는 거냐는 식으로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두 분은 87년 투쟁(시민 항쟁과 노동자 투쟁)과 이후 20년을 어떻게 떤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나.

    87년은 ‘직선제 개헌’이라고 하는 구호가 말해주듯 민주주의의 요구가 폭발됐다. 또 7, 8월에는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났다. 사회경제시스템에 대한 조직적인 반란의 단계였다. 87년 체제는 이 두 가지 과제를 갖고 있었다고 본다. 그것을 최장집 선생은 ‘형식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로 나눴다.

    이를 박정희 체제에 대한 반대로 말할 수도 있다. 하나는 민주주의 발전, 다른 하나는 국가 동원형 발전과는 다른 대안 제시, 이 두 가지 과제를 안고 있었다. 진보나 민주주의를 얘기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사회경제체제를 제시하고, 그것을 가지고 국민들을 설득하는 과정이 이어졌어야 했다.  

    87년 투쟁, 민주주의와 새로운 사회경제시스템 위한 투쟁

    그런데 바로 양김이 분열했고, 노태우 정권이 중간에 끼어들었고, 그 다음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이라고 하는, 과거 기준에서의 민주주의자들이 집권했다. 불행한 건 이들이 신자유주의 정치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물론 80년대부터 신자유주의 논리는 들어와 있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정책을 처음 본격적으로 추진한 것은 자본시장을 개방한 김영삼 정권의 세계화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좀 억울한 것이 있다. 물론 외환위기 수습 과정에서 IMF 플러스로 간 것은 분명 김 대통령 잘못이다. 그리고 이런 신자유주의적 정책 기조를 바로잡을 것으로 기대했던 노무현 정부가 신자유주의 정책의 완성본이라고 할 수 있는 한미FTA를 추진했다.

    이렇게 개괄해보면 최장집 선생이 말한 바, 사회경제체제의 선택이라는 면에서 지난 20년은 실패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는 이제 다른 대안을 제시하는 세력이 등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 단계에 다시 들어섰다. 이것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서 신자유주의적 개혁이라고 부르는 시스템이 굳어지게 되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지난한 우회로를 걸어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의 실질적 내용과 민중이 골고루 잘사는 것을 확보하려면 엄청난 우회로를 걸어야 할 것이다. 운동도 한 20년은 ‘죽었다’ 하고 지내야 하지 않을까.

       
      ▲ 정태인 성공회대 겸임교수 (사진=레디앙)
     

    역사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87년은 ‘미완의 혁명’으로서의 특징을 지니지 않나 싶다.(박노자 교수는 대담 당시 ‘만회된 혁명’이라는 표현을 썼다-편집자)  혁명이라는 것은 대중이 기존의 방식으로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는, 기존 체제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는 측면과 통치계층이 기존의 방식으로 더 이상 통치를 지속할 수 없다는 양측의 상황에서 발생하는 것인데, 당시에 바로 그런 상황이었던 것 같다.

    지배세력이 혁명세력의 분리통치 성공

    그래서 특히 노동자대투쟁의 경우 한국 민중사의 전환점이라고 봐도 될 만큼 당시 혁명적 분위기가 만연했다. 그런데 그것이 ‘미완’이라고 하는 것은 이 혁명이 통치계층을 새롭게 재편하는 과정에서 운동진영이 자신의 대오를 정비하지 못한 채 체제 내로 포섭되고, 그럼으로써 체제 강화를 이루는 결과를 가져 왔기 때문이다.

    당시 혁명적으로 나갈 수 있었던 계층은 중산계층의 학생운동권, 혹은 그 주위의 지식인과 노동자, 두 부류였다. 이 가운데 중산계층 출신의 인텔리들은 90년대 이후 제도권 정치에 많이 흡입된다. 체제가 그들을 잘 포섭한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김대중 같은 사람이다. 당시 반체제운동의 상징처럼 되어 있다 결국 신자유주의의 결정적 단계에서 대한민국을 이끌 사람이 된 것이다.

    노무현 정권의 여러 실세들과 주역들 가운데서도 87년과 그 직후에 혁명가연한 포즈를 취한 사람이 많은데, 예를 들어 유시민 같은 사람, 체제가 그들을 잘 포섭해서 대민통제의 주역으로 만든 것이 아닌가 싶다. 다른 하나는 노동에 대한 통치다. 대기업에 근무하는 정규직 남성 노동자가 노조를 결성해서 임금을 올릴 수 있는 임단협 코스가 마련됐다. 민주적인 임단혐 코스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물론 그들에게 경제적 투쟁의 기회는 주어졌지만 정치적 투쟁의 기회는 보류됐다. 그때부터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와 중소기업 노동자의 사회격차가 훨씬 더 벌어지게 된 것이고 노동계급이 통일된 정치조직을 갖지 못한 상황에서 이 계급이 분열의 길로 가게 된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정규직 일부에 대한 포섭이 이뤄졌는데 이 같은 포섭이 훨씬 심해진 것은 노조 관료들에 대해서이다. 9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민주노총이라 하더라도 많은 경우 주요 노조 관료들이 경영자들이 던져주는 이권을 나눠먹으면서 노동대중 이해관계를 거의 우회적인 방법으로 배반하는 길을 택하기도 했다.

    결국 87년 체제는 한국 지배 세력이 혁명 세력이 될 만한 세력을 교묘하게 분리하고 포섭해 기존 체제를 강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삼성-재경부-조중동 연합 청와대 386 포섭 눈에 보여

    물론 현재의 체제는 80년대 중반과 정반대다. 국가가 재벌 위에 선 것이 아니라 재벌이 국가 위에 서 있다는 점이 다르다. 지배연합은 유지되고 있지만 그 안에서는 서로의 위치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내가 보는 87년 체제의 두 가지 특징은, 이처럼 국가와 재벌의 입장이 바뀌었다는 것, 그리고 일부 중산층 출산의 활동가와 일부 노동자(특히 노조간부)에 대한 지배층의 포섭이 잘 이뤄졌다는 것이다.

    지배계층 (내부에서의 위상) 변화는 내가 청와대에 있을 때도 뼈버리게 느꼈다. 삼성과 같은 재벌, 재경부, 조중동 연합이 386을 포섭하는 게 눈에 보였다. 과거에는 국가가 지배연합의 위에 있었고, 그에 맞서 조중동이 일부 대립하는 측면이 있었는데, 이제 3자연합으로 공고화 됐다.

    그것이 이른바 과거의 민주주의자들에 의해 이뤄지는 것인데, 그 계기는 다 개방이다. 개방과 성장의 환상에 의해 국민을 그쪽으로 끌어들인다. 개방과 성장은 신자유주의를 내부로 끌어들이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삼성과 재경부, 조중동의 연합이 공고화 됐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은 어떤 면에서 그들의 허수아비라 볼 수 있을 정도다.

    만약 87년의 격변이 없었다면 한국 사회의 경제사회정책이 지금과는 다른 것으로 발전했을까.

    정통사학에선 가정법을 잘 안 쓴다(웃음). 만의 하나 김대중이나 노무현 계통이 권력을 잡지 않았다면, 김영삼류와 피를 섞은 군사독재의 적자들이 계속 이 나라를 잡았다면, 민중에 대한 양보의 폭이 더 컸을 지도 모른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가 극단적인 신자유주의로 갈 수 있는 바탕은 중산층 시민활동가와 일부 노동자가 그들을 ‘우리’의 일부로 보고 있고, 때문에 그들의 정책에 대한 저항성이 약했다.

    민중에 대한 양보 노태우 때가 더 컸다

    국민의료보험도 노태우 정권에서 시작됐다. 국방정책도 그렇다. 노태우 정권은 실제 양보의 폭이 컸다. 노동자대투쟁의 결과, 노동자들이 정치적으로 조직되지는 못했지만, (조직화될) 위험성을 감지한 지배층이 상당한 양보를 시작한 것이다.

    한국에서 복지국가의 싹이 자라기 시작한 것을 그 때부터라 생각할 수도 있다. 김대중, 노무현 계통의 집권이 극단적이고 양보 폭이 좁은 신자유주의 집권의 길로 이어졌다고 보는 게 논리적이지 않은가.

       
      ▲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 (사진=레디앙)
     

    김대중이나 노무현 정권에서 헤게모니 정치가 관철되었다는 의미인가.

    그렇다. 노조 간부 등 노동자 상층, 그리고 시민활동가들에게 그들이 갖는 상징성과 헤게모니적 권위 같은 것이 컸던 것이다.

    박 선생께서 혁명에 대해 설명한 대로, 87년 대투쟁이 없었어도 기존 시스템으로는 통치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경제시스템 자체가 그랬다. 결국 어떤 식으로건 변화를 했을 것이다. 그런 변화의 흐름에서 신자유주의가 필연적인 것은 아니었다.

    87년 대투쟁도 그렇고 이후 (현재와 같은) 상황 전개에도 진보의 책임이 있다. 87년에 요구됐던 것은 새로운 사회경제시스템이었다.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지식인들은 알고 있었지만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다. 진보 진영이 대중 조직과 새로운 시스템에 대한 비전을 공유하고 그 힘으로 착실하게 커왔다면 신자유주의 흐름을 막아낼 수 있었을 텐데, 그렇지 못했다.

    노태우-YS 초기 격차 줄어…양극화 필연적 아니다

    88~94년 기간 중에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가 줄어든다. 양극화는 필연적인 게 아니다. 개방으로 신자유주의를 정식화하면서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개방으로 인해 위기가 닥치면 더 많은 개방이 필요하다는 이상한 논리, 그래서 더 많은 위기가 닥치면 더 많은 개방이 필요하다는, 그런 논리에 빠졌다.

    지식인들도 그런 흐름이 대세라고 하면서 그 이전에 만들지 못했던 사회경제시스템에 대해 스스로 의심하게 됐다. 그러면서 한국에서 유지 가능하고 국민들의 힘과 역량을 끌어올리는 사회경제시스템에 대해 철저히 분석하지 못했고, 대중을 설득하지도 못했다. 우리 쪽의 그런 한계도 맞물려 있었다.

    87년 이후 20년 동안, 군부독재의 막내로서 노태우, 이종교배 결과로서 김영삼, 민주파로서의 김대중, 노무현이 차례로 집권을 했다. 앞의 두 대통령 기간과 뒤의 두 대통령 기간의 질적 차이가 있나. 있다면 무엇이라고 보는가.

    저는 큰 차이를 잘 모르겠다. 그런 건 있다. 대중의 기대의 차이가 컸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휠씬 많은 기대를 받았다. 그리고 그런 것 때문에 좀 더 근본적인 대안을 만드는 데 소홀했던 것 아닌가 싶다.

    노대통령이 일찍이 변화된 이유들

    나 역시 지식인으로서, 경제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88년부터 97년까지는 뭔가 열심히 했다. 그런데 97년 이후로는 당장 실현가능한 조그만 정책에 대한 탐구만 많이 했다. 옛날 하던 것과 같은, 큰 흐름 짚어가면서 하는 것은 소홀히 했다. 그 결과가 지금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또 이들 정권에서 삼성-재경부-조중동의 연합이 더 강화된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물론 부분적인 분배정책이 도입된 것도 사실이다.

    김대중 정부에서 국민기초생활보장제가 도입됐고 의약분업이 시도됐는데 이는 바람직한 것이다. 노무현 시대에 그런 굵직한 것이 없었던 게 더 많은 개방을 선택한 계기가 됐다.

    근본적인 복지국가로의 전환은 노태우도, 김영삼도, 김대중도, 노무현도 모두 고려한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만큼 민중으로부터의 압력을 받지 못한 탓이다. 이들 정권이 사회복지정책을 부분적으로 도입한 것은 민중에 대한 최소한의 양보를 통한 민심수습을 의도한 측면이 강한 것 아닌가. 그런 면에서 보면 노태우 정부와 김대중 정부 간에 큰 차이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 점은 있다. 취임 초기 노무현 대통령도 스웨덴식의 유럽형 사회모델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것이 우리 사회에서 본격적인 복지정책이 나오지 못한 것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는데, 복지정책은 사회적 대타협이라고 할까, 계급의 세력균형에 기초해 나가야 한다.

    그런데 정부 초기에 기대의 폭발이라고 할까, 화물연대 사건이라든지 하는 것이 있고 나서는 보면 대통령이 민중진영에 대해 막 짜증을 냈다. 그래서 이들과 같이 연합해서 뭘 하겠다는 생각이 사라진다. 이후 대연정은 (연합을 한나라당과) 옆으로 하겠다는 것이고, 그것도 안 되니까 밖으로부터의 개혁을 하겠다고 나간 것이다.

    노 대통령이 유럽식 사회모델을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그가 대중조직에서 성장하면서 사회경제체제에 대한 상을 가진 것이 아니고 막연하게 ‘유럽 모델이 이상적이다’라고 생각만 하고 있는 수준이었지, (그런 모델의 실현은) 대중과의 소통 속에서만 이뤄질 수 있다는 자각이 없었기 때문에 유럽형 모델에서 신자유주의적 모델로의 노선 변경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나 싶다.

    노대통령 유럽모형 선호, 전략보다 막연한 생각

    정권에서 경제 분야의 개혁적인 학자들이 다 물러난 것이 2005년 여름이고, 그 다음에 대연정이 제안됐고, 그 해 가을부터 한미FTA가 추진된 셈이다. 인과관계를 떠나 현상적으로 보면 정권 내에서 신자유주의를 막고 있었던 사람들이 물러나면서 대통령이 한 쪽 방향으로 치우치게 된 것으로도 볼 수 있겠다.

       
      ▲ 이광호 편집국장 (사진=레디앙)
     

    원칙적인 얘기지만 노르웨이나 스웨덴의 경우 복지국가로의 전환은 정통 통치자의 착한 마음에 의해 이뤄진 것이 아니라 대중적인 압력과 사민주의 세력의 집권에 의해 이뤄진 것이다.

    노 대통령은 정통 통치자의 한 사람인데, (그가 유럽식 사회모델을 선호한 적이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진심으로 복지국가를 해야 한다는 대중들의 계급적 이해관계를 대표해서 생각한 것이라기보다는, ‘스웨덴이 잘 살더라’ ‘안정되게 잘 살더라’ ‘생활수준 최고더라’ ‘스웨덴이나 독일처럼 하면 체제가 대단히 안정될 것이다’, 그런 생각을 막연하게 갖고 있어서가 아니었겠나 싶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가 자본 세력의 압력을 받으면서 자본의 이해관계를 충실히 반영하는 본연의 자세로 돌아온 것 아닌가 싶다.

    언어로는 여전히 동반성장이다. 동반성장은 이정우 교수가 만든 말인데, 분배를 통한 성장이다. 분배를 통한 성장, 분배를 하지 않으면 성장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한 편에 있었고, 그런 생각 별로 없는 386, 그리고 시장에 맡기는 성장이 분배도 개선한다는 이상한 논리를 내세운 조중동-관료 연합이 다른 한 편에 있었다.

    그런데 (분배를 통한 성장을 주장했던) 한 편이 떨어져 나가면서 ‘성장을 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가게 됐고, 거기에 ‘역사에 남을 일을 해야 한다’는 심리가 작용하면서 한미FTA가 추진된 것 같다. 이른바 ‘개혁론’에서는 내부에서 개혁 하는 것은 ‘하세월’이고 바깥에서 때려서 한꺼번에 개혁한다, 이런 논리도 있었다. 이것은 이모 의원이 들고 나온 얘긴데, 이 사람이 하는 말은 삼성이 하는 말이나 다름없다.

    진보는 실체가 없는 말이다

    노무현 정권은 자신이 새 시대의 첫차가 되기를 원했는데 구시대의 막차가 된 것 같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노대통령이 무슨 기준으로 새 시대와 헌 시대를 나눴는지는 정확하게 모르겠다. 구시대의 ‘막차’인지도 모르겠고.

    이런 노무현 정권의 성격을 표현하는 용어가 매우 다양하다. 좌파에서부터 중도우파까지. 우파들의 이데올로기적 공세 성격을 지닌 좌파는 논외로 쳐도, 대통령이나 그의 핵심 측근들은 자신들을 ‘진보’로 부르고 그렇게 불리기를 원하는 것 같다.

    이 사이에 중도 우파/자유주의, 자유주의 보수/개혁 세력의 표현도 있다. 정태인 선생은 참여정부에 참여한 인사이기도 한데. 두 분은 노무현 정권을 어떻게 표현하겠나.

    저는 진보라는 말을 안 쓰려고 한다. 실체가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진보는 앞으로 나아감인데, 노무현의 경우 개방주의적으로 앞으로 나가는 것이 진보일 것이다. 그래서 계급적 이해관계라는 좀 더 과학적인 잣대로 보면 현 정권은 국가 관료와 삼성 재벌 주요 언론 세력과 그들에게 포섭된 중간계급 정치인의 충실한 대표자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재벌 관료의 연합과 그들에 의해 영입된 중산 시민운동가들의 균형 문제는 있다. 정권 초기에 시민운동가 출신 영입인사들의 목소리가 다소 클 수 있었던 것은 정권이 민심을 얻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보다 가혹한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위해서는 헤게모니적 기반을 다져야 할 필요도 있었던 것이고.

    그래서 동반성장 얘기도 나오고 이정우 선생 같은 사민주의자가 영입돼서 3년이나 함께 갔다. 그런데 이후에는 거의 망국적이라 할 신자유주의 정책이 추진되다보니 시민운동가 출신 인사들의 목소리가 줄어들고 재벌관료집단과 그들에게 완전히 포섭된 유시민 같은 자들이 정권 안에 남아서 강경 우파의 의제를 대리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자유주의 정권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따지고 보면 이 정부의 이념을 자유주의라고 보기도 어려운 게, 대민 통제 방안이 전혀 철폐되지 않았다. 국가보안법도 그대로고 양심수는 동아시아 기준으로 봐도 많다. 업무방해로 구속된 노동자나 삼성일반노조의 김성환 위원장, 또 양심적 병역거부자 등 1,000명에 가까운 양심수가 있는데 노 대통령이 이 점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지 오래된 것 같다.

    실제 대민 통제 방식에선 아직도 상당 부분 군사 독재적 잔재가 남아있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든다. 그래서 저들을 자유주의라고 부르려면 여러 가지 단서를 달아야 한다. 그들을 자유주의적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그저 자유주의적 색채를 비치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현재 노무현 정부가 관념적으로 가 있는 곳은 ‘비전 2030’인데, 이것은 이념적 성격으로 보면 제3의 길이다. 사회투자국가적 성격 굉장히 강하다. 거기에 한미FTA까지 결합되는 제3의 길이니 신자유주의적 성격이 굉장히 강한 사회투자국가라고 할 수 있겠다.

    현 정부의 문제는 어디 있느냐. 지배집단과 일부는 대립하고 일부는 같이 가는 것인데, 지배집단이 원하는 정책은 토론 없이 전격적으로 간다는 것이다. 한미FTA가 대표적이다. 반면 집권 초기에 이정우 선생이 네덜란드 모델을 얘기했을 때, 말 한마디 했을 뿐인데 난리가 났다.

    재경부는 청와대에 들어와 있고 바깥에는 삼성이 있고 조중동은 언제나 응원해줄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이쪽(개혁파)의 주장이 조금이라도 나오는 경우 저 쪽에서 포위공격을 하면 장기토론이 된다. 그냥 토론만 하다가 시간이 가고 그러다가 ‘비전 2030’에 일부 흔적을 남기는 식이다.

    지배집단 원하는 것은 토론없이 전격처리

    우리나라 정치가 정당정치가 아니라는 측면도 봐야한다. 정당에 의해 대통령에 당선되면 움직임의 폭에 한계가 주어지는데 우리나라 정당정치는 그것이 아니다.

    이 정부도 정당에서 정책을 준비해서 들어간 게 아니고 몇 개의 아이디어만 있었다. 한국이 해야 할 일은 뻔했기 때문이다. 양극화 해소 같은 게 대표적이다. 이들 아이디어 가운데 지배세력과 맞지 않는 건 토론으로 날을 새고 지배세력과 맞는 것은 급속히 시행됐다.

    노 대통령이 한FTA에 대해서도 그렇고 ‘지금 만들어놓은 정책 다시는 안 바뀔 것이다’고 했는데, 역설적으로 맞는 말이다. 자신이 신자유주의를 제도적으로 반영구화하는 일을 했다고 하는 자각은 전혀 없는 것이다. 또는 신자유주의가 뭐가 나쁘냐고 생각하는 정도인지도 모르겠다.

    노무현 정부에 저는 세 가지를 기대했다. 사민주의는 기대도 안했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해서는 상식 수준에서 대우를 개선하지 않을까, 국가보안법 없애지 않을까, 양심적 병역 거부자에게 대체복무를 허용하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그 가운데 이뤄진 게 하나도 없다.

    셋 다 보편적 인권의 문제다.

    자유주의를 내세우는 분이니 그런 것은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아무 것도 이뤄지지 않았다.

    보편적 인권의 문제에서 좌파라고 공격받아도 뚫고 나가면 아무 문제 없었다. 그런데 노 대통령은 당선 후 경제 문제와 같은 큰 그림을 그리자, 인권 문제 같은 데서 양보하고 경제 쪽에서 좋은 일 하자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그런 가치는 그리 절박하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과거처럼 매 맞아 죽거나 이런 건 없다. 과거에 내가 요즘처럼 한미FTA 얘기하고 다녔으면 스스로 발에 돌 매달고 바다에 빠져 죽은 걸로 됐겠지만. 이를테면 그런 식이다. 인권 문제는 돌파할 수 있었다. 그냥 해버리면 되는 건데, 반대가 심한 건 토론을 한다.

    아주 쉽고 단순하고 확실한 문제에 대해선 토론을 한다. 반면 추상적이고 복잡한 논의가 필요한 문제는 전격적으로 처리한다. 강금실 장관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큰 문제는 오히려 토론 안 한다’고. 이라크 파병이 그렇고, 한미FTA가 그렇고, 새만금이 그렇다.

    노 대통령을 가까이서 지켜본 분이니 한 가지만 물어보고 싶다. 노무현 대통령이 살인훈련 거부 문제나 여호와의 증인 가운데 수감된 사람이 역사적으로 만 명을 넘었다거나, 그런 것 때문에 한국이 세계적으로 양심수가 많은 나라라는 것에 대해 대통령이 문제의식을 갖고 있나.

    박 교수가 방금 말한 게 다 지난 대선 공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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