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희는 몸이 건강한 사람이었다
    By
        2007년 05월 18일 05:49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경기도는 차라리 하나의 나라였다. 인구가 1천만이 넘으니 스웨덴보다 많다. 거대한 경기도는 수도권 집중을 막아보려는 온갖 정책적 규제 속에서도 괴물처럼 자라고 있었다. 서울이 블랙홀이라면 경기도는 그를 싸고도는 하나의 은하계처럼 느껴진다. 공장과 아파트와 차량이 넘쳐나는 경기도는 가장 큰 광역시도다.

    2007년 5월 7일 찾은 부천은 20년 전의 부천이 아니었다. 변두리의 여유가 있는 부천이 아니었다. 5월 8일 찾은 시흥 반월 공단에는 수만 명의 외국인 이주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었다. 안산시 원곡동은 수십 개 나라에서 온 외국인 이주 노동자들이 사는 국제도시가 되었다. 가게 주인들은 10개 국어를 알아야 한다.

    현재 국내에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은 190개국 90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는 우리나라 인구의 1.84%로 1990년보다 약 18배 정도 늘어난 수치이다. 엄청난 증가다. 이런 추세라면 십수 년 안에 한국도 다인종 다문화의 정상적인 현대 국가가 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들의 생각도 정상화시키려는 노력들이 진행 중이다. 

    다인종, 다문화의 정상적 현대국가로 

       
    ▲ 파키스탄 문화 수업의 한 장면
     

    외국인 이주 노동자는 한국 사회에 필요한 존재다. 대학 진학률 82%의 나라, 그에 비례하여 청년 실업자는 늘어가지만 3D 업종에는 만성 인력난이다.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고달프고 위험하고 지저분한 일을 외국인 노동자들이 하고 있다. 그런데 노동자는 상품이 아니라 사람이고 함부로 쓰다 버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이주 노동자를 다 내보낼 것이 아니라면 같은 인간으로서 함께 살아갈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이주 노동자를 인간으로 대접하지 않는 한국의 ‘사장님’, ‘사모님’들이 많다. 폭언, 폭행하고 임금체불하고 사기치고 사라져버리는 자본가들이 많다. 이주 노동자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활동하는 단체들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지난 15년 동안 이주 노동자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상담하고 돕고 있는 ‘외국인이주노동자 인권을 위한 모임’ 석원정 소장은 요즘 <프레시안>에 ‘우리 안의 아시아’라는 글을 연재하고 있다. 이제 그녀는 대한민국 국민들을 교육시켜야 할 필요를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다. 정말 기가 막힌, 대한민국이 부끄러운 사연들이 많다.

    자기가 쓴 이주 노동자의 이름 대신 수첩에 ‘검둥이’라고 써놓았던 ‘사장님’도 있었다. “근로감독관이 ‘외국인 이름이 뭐냐?’고 물었더니 사업주는 ‘전혀 기억 못 한다’고 답변하더니, 감독관이 이어 ‘일을 시킬 때는 뭐라고 불렀을 것 아니냐’고 재차 물었더니 ‘이름은 무슨 이름? 그냥 야, 너, 했다’고 아주 태연하게 대답했다.”

    노동허가제를 실시하라

    외국인 노동자는 88년 올림픽을 전후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산업기술연수제가 실시된 것이 1993년이었다. 그리고 산업기술연수제는 올해 초 폐지되었다. 대신 고용허가제가 2004년부터 실시되고 있다. 고용허가제는 노동자를 연수생으로서가 아닌 노동자로서 들여오는 제도이니 진일보한 제도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고용허가제는 한계를 가지고 있는데 근본적으로 사용자 위주의 제도라는 것이다. 현행 고용허가제에 의하면 이주 노동자들은 3년간 한국에 체류할 수 있고 총 3번까지 사업장을 옮길 수 있으며 사업장을 옮기려면 사업주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이 규정을 악용하여 사업주들은 이주 노동자들을 사실상 묶어 놓고 있다.

    고용허가제의 한계로 인하여 다시 늘어가는 미등록 이주 노동자(불법 체류자)는 19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그들이야말로 인권의 사각지대에 살고 있다. 온갖 불이익을 당하고도 하소연할 곳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미등록 이주 노동자들을 합법화하고 노동허가제를 실시하라는 요구가 진보적 인권단체로부터 계속되고 있다.

    지난 2007년 2월 1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이주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의 권리를 인정하는 판결이 나왔다. 이제 이주 노동자는 한국의 생산 현장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임을, 노동자임을 인정한 것이다. 늘어가는 국제결혼으로, 100만 이주 노동자로 급속하게 다문화 보통 국가가 되어 가는 대한민국에 필요한 이정표다.

    만년 집행위원장 박석운

    ‘외국인이주노동자 인권을 위한 모임’은 비슷한 단체들 중에서 가장 먼저 결성된 단체다. 1992년 5월이니 꼭 15년 전에 만들어졌다. 소장 석원정은 내 친구 박석운의 부인이다. 둘이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의 단칸방 신혼집에 쳐들어가서 자기도 했다. 80년대 후반, 90년 대 초반엔 광명시 철산동에서 이웃해 살았다.

    박석운은 장기표, 김근태 등이 떠나간 자리를 메우면서 아직도 ‘재야인사’로 남아 있다. 그는 지금 한미FTA저지범국민운동본부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지만 지금까지 그가 집행위원장을 맡았던 시민단체, 사회단체, 노동단체들이 포함된 범국민대책위원회나 범국민운동본부가 몇 개나 되는지 모른다.

    이제 집행위원장은 그의 고유 감투가 되고 벼슬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집행위원장을 맡았던 민중연대를 비롯한 이른바 ‘전선(戰線)’이나 ‘범국민’ 운운하는 재야는 진보정당이 깨고 나와야 할 알이고 벗어나야 할 번데기라는 것이 나의 인식이고 그런 만큼 나의 생각이 그의 인식과 달라 33년 친구 사이에 어색함도 없지 않았다.

    그는 여섯 달 째 영등포 민주노총이 있는 건물, ‘범국본’ 사무실에 갇혀 있었다. 작년 말 한미FTA반대 집회가 과격했다고 그 책임을 물어 수배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감히 건물 안으로 쳐들어와 잡아가지는 못하니 별 수 없이 건물에 갇혀 살고 있다. 민첩하고 자신감 넘치는 박석운의 얼굴에도 세월의 연륜이 쌓이고 있다.

    조만간 몽골의 초원을 그리워할 석원정

    몇 년 전부터 석원정의 상담소에는 몽골인들이 주로 찾아오기 시작하여 이제는 찾아오는 이주 노동자의 80%가 몽골인이다. 몽골인 상담 직원을 채용하여 몽골어 서비스가 가능해지면서 몽골인 노동자 상담소로 특화되다시피 하고 있는 것이다. 몽골의 인구는 270만 명, 그 중에서 1%에 달하는 2만 7천 명이 한국에 와 있다.

    석원정은 오랜 상담으로 이제는 몽골인들의 정서를 이해한다. 정서를 이해하다 보니 몽골말을 잘 모르면서도 몽골인들의 말을 알아듣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조만간에 몽골인들이 그리워하는 초원을 석원정도 그리워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누구나 고향을 그리워하지만 몽골인들의 향수는 전염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수백만 년 동안 열대 사바나에서 살면서 진화를 하여 인간이 되었다. 그런데 열대 사바나는 초원에 듬성듬성 숲이 있는 풍경이다. 그래서 인간은 숲이 드문드문 있는 초원에서 마음이 편안하고, 그런 풍경이 인류의 마음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다. 몽골 초원도 여름이면 아마 비슷한 풍경일 게다.

    ‘외국인이주노동자 인권을 위한 모임’에서는 2004년부터 초등학생들에게 아시아의 문화 체험을 통해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이해를 돕는 문화교육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다. ‘다문화사회’를 준비하기 위해 개발한 프로그램이다. 몽골, 네팔, 버마, 필리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출신 이주 노동자들이 강사로 활약하고 있다.

    황희(黃喜)는 몸이 건강한 사람이었다

    파주 임진강가 반구정(伴鷗亭)에 가서야 알았다. 황희는 건강한 사람이었다. 황희는 69세에 영의정이 되어 87세까지 18년 동안 영의정을 지냈다. 그것도 누구보다 부지런한 임금, 세종대왕 밑에서 영의정을 지냈으니 오죽이나 고달팠겠는가? 그 고령에 그 과중한 업무를 견뎌냈으니 그는 초인적인 건강의 소유자였음에 틀림없다.

    그는 87세에 공직에서 물러나와 90세에 별세했다. 그의 유명한 양시론도 실은 그의 건강으로부터 나왔던 것이다. 남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할 수 있는 건 건강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건강하지 못하면 남의 말을 이해할 수 없고 그래서 나이가 들면 대부분 고집스러워진다. 양비론자가 될 확률도 높아지는 것이다.

    생각과 판단은 머리로 하지만 머리는 몸의 일부다. 아마 황희도 ‘걷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2005년 5월 14일부터 2006년 10월 28일까지 격주 주말 산행을 하여 백두대간을 종주한 후 38살 나이에 목수가 된 대구의 허경도는 몸무게만 15kg 줄인 것이 아니라 ‘새로운 비상’에 불필요한 생각의 짐을 정리하였음에 틀림없다.


    페이스북 댓글